"백선엽 (白善燁ㆍ1920~ 2020ㆍ100세)"은 친일 군인ㆍ만주국 간도특설대 장교(헌병중위)ㆍ육군대장ㆍ박정희 생명의 은인ㆍ조만식 비서(1945.08~12)였다. 1949.02월, 군 내부의 "남로당 세력을 색출하는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 (朴正熙ㆍ1917~ 1979ㆍ 61세)"이 "남로당 조직책"으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김창룡"의 직속상관이며, 육본 정보국장인 "백선엽 대령 (白善燁ㆍ1920~ 2020ㆍ100세)은 "사형" 위기에 처해 있던 "박정희 소령"을 만났다. 박 소령이 그에게 "한번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자, 백 국장은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라고 답했다.
1. 백선엽 (白善燁ㆍ시라카와 요시노리ㆍ1920~ 2020ㆍ향년 100세)
친일 군인ㆍ대장ㆍ박정희 생명의 은인ㆍ만주국 간도특설대 장교(헌병중위)ㆍ조만식 비서(1945.08~12)ㆍ이승만 후계자ㆍ군인(한국군 최초 대장)ㆍ정치인(교통부 장관/서울 1기 지하철건설)ㆍ박정희(소령/만주군 출신/남로당 프락치 활동 중 체포) 처형위기에서 구해준 생명의 은인ㆍ6ㆍ25전쟁 당시, 휴전 회담의 한국군 대표ㆍ다부동 전투(경북 칠곡)ㆍ제일 먼저 "평양"입성ㆍ유일한 "미 1군단" 배속ㆍ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ㆍ백(白)야전사령부(지리산의 빨치산 소탕)→2군단
외교관(캐나다/중화민국/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ㆍ기업인(충주비료 사장/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호남비료 사장/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한국에탄올 사장/대한화학펄프 사장/비료공업협회 회장)ㆍ교육인(선인재단 이사장/ "인천대학교ㆍ선인재단" 설립자 (백인엽 중장과 함께)): "선인학원"에서는 "학생체벌ㆍ교사의 예비군복 착용ㆍ부정입학ㆍ부정 편입학ㆍ졸업장 판매ㆍ기부금 입학ㆍ교사해고ㆍ학교근처 주민재산 침해ㆍ중국인 공동묘지 침탈" 등의 비리 문제가 불거졌다.
• 출 생 :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 호 : 우촌(愚村)ㆍ운산(雲山) • 학 력 :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제9기, 만주 봉천군관학교) →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 처 : 노인숙(盧仁淑ㆍ1925ㆍ1944년 가을ㆍ평양에서 결혼)
• 경 력 : 1940~1945- 만주국 육군 중위 → 1952.07 -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 1946~1960- 대한민국 육군 대장 → 1953.01 - 육군 대장 진급 (대한민국 군 최초 대장)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제9기)"로 졸업하여, "만주국 장교"로 "간도 특설대"에서 복무하였다.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1945년 광복을 맞았고, 해방 직후에는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이내 "소련군"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게 되자, 1945.12월에 월남하게 된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에서 활동하였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 "한국군 장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제1사단장"으로 승진한 뒤, 줄곧 전쟁에 참전하다가, 1952년의 "휴전 회담" 때, 한국 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휴전 문서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예편 후, "중화민국ㆍ프랑스ㆍ캐나다 대사" 등의 외교관을 지냈다.
"만주국 헌병중위"였던 그가 창씨 개명한 이름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로 "윤봉길"이 "상해 홍구 공원"에서 폭사시킨 "일본 육군대장 요시노(大將 白川義)"와 같다. 본인이 한 번도 거론하거나, 거론된 적이 없다가 "김효순(간도특설대 저자)"가 "직속상관"이었던 "소네하라 미노루(만주군 옌지 헌병 분단장)"의 회고록에서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경력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군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 백선엽ㆍ박정희의 비교분석
① 숙군 사형위기 "박정희 소령" 구해줘, 후에 "5ㆍ16 주역들"과 만나게 된다.
백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을 죽음으로부터 구해 준 인물로 유명하다. 1949.02월, 군 내부의 "남로당 세력을 색출하는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이 체포됐다.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조직책"으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백선엽(육본 정보국장)은 "사형" 위기에 처해 있던 "박정희 소령"을 만났다.
박 소령이 그에게 "한번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자, 백 국장은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라고 답했다. "박정희 소령"이 다른 군인을 포섭하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남로당 조직"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의연한 "박정희 소령"의 자세를 높이 샀다. 백 국장은 "미군의 동의와 이응준(총참모장)의 재가"로 "박정희 소령의 형 집행정지"를 받아냈다. "박정희 소령"은 "불명예 제대"하는 처분으로 끝났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한다.
• 백선엽 : 나가서 하실 일 있나요? • 박정희 : 마땅한 게 없습니다. • 백선엽 : 그러면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하시는 게 어떨까요? "박정희 문관"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됐다. 당시 "전투정보과"에는 백 국장이 뽑은 "육사 8기생"들 가운데, 똘똘하다고 소문 난 중위 "김종필ㆍ석종선" 중위가 근무하고 있었다. 박통이 훗날 "5ㆍ16 군사정변"의 주역과 연을 맺은 자리였다. 이후 "백선엽"을 생명의 은인으로 대우했다. 사석에선 백 장군이 3살 아래인데도 불구하고, "형ㆍ백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② 박정희 대통령과 만남
"육본 정보국장" 재직 중, 1948.10.19~ 10.27일 발생한 "여수ㆍ순천사건(여순 14연대 반란사건, 3,400명 학살)" 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ㆍ숙군 사업"을 지휘하였다. 이때 같은 "만주군" 출신으로,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던 중, 체포ㆍ처형위기에 처한 "박정희(당시 소령)"의 목숨을 구해준다.
1948.12.15일, "국방부"는 "육군본부 정보처"소속이던 "백선엽"등 중령 8명을 대령으로 특진 발령했다. 이후 그는 "남로당 빨치산 토벌ㆍ군내 좌경인사 숙군작업"에 주력한다. 이때 "김창룡"의 강경책과 달리, 좌익혐의자 중 단순가담자를 선별하여, 가벼운 징계를 내릴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킨다.
"백선엽"은 "숙군 과정"에서 검거되었던 "박정희 구명"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박정희"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백선엽"은 "박정희"에게 전향을 권고한다.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은 "백선엽 대령"에게 "박정희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만나 줄 것을 부탁했다.
"박정희"를 만난 "백선엽"은 도움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숙군 과정"에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을 만났을 때, "박정희"는 "1번만 살려달라며,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거듭 부탁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좌익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상태였다.
"옥석을 가리기 힘들었던 만큼, 무리한 일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바로 1년 후에 터지는 동족상잔의 대전란을 앞두고, 적어도 군내의 좌익조직을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다행이다"
"김창룡" 등은 "박정희"를 "남로당의 총책"으로 보고, 숙청하려 했으나, 그는 "박정희"의 구명에 적극적이었다. "백선엽"은 "이드 대위(미육군 정보국 고문관)"에게 부탁하여, "하우스만 대위ㆍ윌리엄 로버츠 준장"에게 "박정희 소령"의 구명을 요청했다."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형 집행정지 조치를 얻어냄으로써,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이후 군내부의 반대와 일부 장교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박정희"가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했다. "공식 보직"이 부여되지 않은, "편제외 인원"으로 "비 편제 군무원" 자격으로 근무하던 "박정희"에게는 급여가 없었으나, "백선엽"은 "동료ㆍ부하 장교"들을 설득하여, "장교 월급"에서 일부 각출하여, "박정희"의 "문관 월급"을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를 옥중에서 잃고, 연인과도 사별하여, 의기소침한 "박정희"를 독려하여, 동기를 부여한다.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기적적으로 회생ㆍ현역으로 복귀하여,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3. 갑자기 미국으로 불려가, "아이젠하워 대통령" 면담
미국, "이승만" 제거 후, 후임자로 검토 (조봉암ㆍ조병옥ㆍ신익희 등)ㆍ 미국이 "이승만" 후임 고려한 "백선엽"ㆍ사형 위기 "박정희" 구했다. (중앙일보 2020.07.11)
"6ㆍ25전쟁"이 막바지였던 1953.05월 "백선엽 장군(육군참모총장ㆍ33세)"은 급하게 미국으로 건너갔다. "J 로턴 콜린스(미 육군참모총장)"의 초청으로 갑자기 잡힌 일정이었다. 방문 기간이 1달이 넘었다. 왜 갑작스러운 미국 출장이 잡혔을까?
당시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 협정"에 반대해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반공포로"를 독단적으로 석방하려 하자, 그를 제거하려는 "에버레디(Ever-ready) 계획"을 세워 놨다. 물론 이 계획은 실행되진 않았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에버레디 계획"을 실행한 뒤, "조봉암ㆍ조병옥ㆍ신익희" 등 정치인에게 사태 수습을 맡기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만 알려졌다. 일각에서 "미국"이 "이승만 정부"를 전복한 뒤, "백선엽 장군도 후임자 군에 넣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유광종(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은 "생전 백 장군에게 "에버레디 계획" 관련 여부를 물어봤는데, 웃으며 "풍문으로 들었다"고만 답했다. 그러면서 "미 중앙정보부(CIA)도 나를 찾아왔다"고 덧붙였다"고 전했다. 미국이 "에버레디 계획"을 가동하는 상황을 위해, "백 장군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해외로 빼돌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이 "백 장군을 고려했다"는 정황은 더 있다. "워싱턴 DC" 도착 당일, "알레이 버크(미 해군 제독)"이 백 장군 숙소를 밤늦게 찾았다. "버크 제독"은 백 장군에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한ㆍ미 상호방위조약을 건의해봐라"며, "당신이 얘기하면 만나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의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을 흔쾌히 들어줬다. 백 장군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한ㆍ미 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곤란하다"면서도, "원칙적으론(in principle) 동의한다."고 여러 번 얘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 내용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해도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4. "간도특설대" 활동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 투쟁을 하는 "독립군(1939~1943)"과 "열하성ㆍ하북성"에서 "팔로군(1944~1945)"과 전투를 수행했으며, 150여명 이상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였다. "팔로군"의 주요 인물들은 해방 후, "북한 인민군 창설"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그가 썼던 대부분의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아예 다루고 있지 않다. (다만 일본어로 출판한 자서전에만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라고 소회를 밝힌 바는 있으나,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에 대해, "그러나 한 가지 역사상의 비극적인 그것(역사적으로 불가피했었던 간도특설대 대원)만큼은 너무도 유감스럽다."는 간소한 사과만 했을지언정, 국민들 앞에서 진지한 사죄를 한 적은 아직도 없다는 비판이 있다. 허나 그가 직접 "독립군"을 토벌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009년 인터뷰에서 "독립군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슨 토벌을 하느냐?"며, 독립군을 직접 토벌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일어판 저서에서는 "우리들이 쫓았던 게릴라 중에는 조선인이 섞여있다"는 식의 서술을 한 적은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동족상잔의 사례를 같은 조선인으로서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토벌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간도특설대"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일본의 대대적인 만주에 대한 사전토벌로 "한국계 독립군"은 "자유시 참변" 등으로 소멸되거나, 존립하더라도 "팔로군" 휘하의 공산군으로 편입되어, 후일 6ㆍ25당시 "남침의 선봉대"가 되었기에, 사실상 그에 의해 죽은 한국계 독립군 세력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절대적이다.
< 간도특설대 활동 회고 >
"간도특설대"에서의 "백선엽"의 구체적 역할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백선엽"이 남긴 "회고록(군과 나)"에 그의 활동 내역이 일부 보인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간도특설대"에서 "김찬규(金爛奎)ㆍ송석하(宋錫夏)ㆍ김석범(金錫範)ㆍ이용(李龍)ㆍ신현준(申鉉俊)ㆍ임충식(任忠植)ㆍ윤춘근(尹春根)ㆍ박창암(朴菖岩)" 등과 함께 근무했다. 그는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아래와 같이 회고 했다.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고 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00년 일본어로 발간된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 "간도특설대"에 대해,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폭파ㆍ소부대 행동ㆍ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고 썼다. "간도특설대"는 "對 비정규전 특수부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기동타격ㆍ공작ㆍ정보ㆍ심리ㆍ매복ㆍ추격ㆍ섬멸작전"을 주로 행했고, 또한 "만주군 헌병대"에도 "2차대전" 종전까지 근무하여, 향후 "국군 육군 정보국장"을 하고, "한국 전쟁"시, "빨치산 토벌의 선봉장"이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는 그의 일본어 저서 "대 게릴라전- 미국은 왜 졌는가?"로 이어지며, 같은 "1사단장"을 지낸 "전두환"이 "對 비정규전 부대인 "특공여단""을, 후방 "2군직할부대"로서 창설하는 것으로 맥을 잇는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ㆍ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간도특설대"는 1938.12.01일, 기존에 있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였으며, "사령부"는 "간도성(젠다오 성) 연길(延吉) 부근 명원구"에 있었다. "보병ㆍ기갑 혼성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로 늘어났다고 한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50%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는 1938.12월 창설 직후, "간도ㆍ길림ㆍ통화" 일대에 출몰하는 "안창길ㆍ양정우ㆍ진한장ㆍ최현" 등의 "반만항일(反滿抗日) 세력의 토벌"에 투입되었다. 1941.12.30일, "만주국군관학교(봉천군관학교)"를 9기로 졸업하고, "견습 군관"을 거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근무하였다. 1943.12월, "러허성(열하성)"에서, "간도특설대 기박련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1944년 봄, "열하성ㆍ중국 북부"에서는 "팔로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일제"는 "만주군 3개 여단"을 파견했다. "간도특설대ㆍ백선엽"은 "만주군 철석부대" 산하에서 정보수집ㆍ반공 선전ㆍ체포된 항일세력 심문 등을 맡았다. 1944년 여름, "간도특설대"는 "열하성"을 떠나, "하북성"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간도특설대ㆍ백선엽"은 1945.01월까지 "항일 세력"을 상대로 한 작전을 벌였다. 작전이 끝나자, 그는 "원대 복귀 명"을 받고 귀대했다. 1944년 가을, "노인숙"과 "평양"에서 결혼하였다. 1945.08월, "일본"이 패망할 당시, 그는 "만주국군 헌병 중위"였다. 그는 "만주"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만나, "명월구"에서 "강제 무장 해제"를 당했다.
5. 1950.08 : 다부동 전투 (多富洞戰鬪)
1950년 "6ㆍ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전투로, 국군에게 있어서는 "낙동강 전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하게 해준 결정적인 전투
• 일 시 : 1950.08.03~29 • 장 소 : 경북 칠곡군 가산면 • 지휘관 : 백선엽ㆍ김점곤ㆍ최금석ㆍ김동빈ㆍ김재명ㆍ이두황ㆍ차갑준ㆍ정영홍ㆍ고근홍ㆍ박치옥ㆍ안광영ㆍ이재일ㆍ존 H. 마이켈리스 • 북한군 : 최용진ㆍ김병철ㆍ이성준ㆍ태병열ㆍ정봉욱ㆍ홍림ㆍ황석ㆍ김양춘ㆍ이창권ㆍ현학봉
• 병 력 : 국군 : 30,000여명(3개 사단)ㆍT-34 전차(34대) / 북한군 : 10,000여명 • 피 해 : 국군 : 사상- 10,000명 / 북한군 : 24,000명ㆍ손실- 전차 13대
북한은 무기ㆍ훈련이 부실한 "국군"을 연이어 물리치고 승리하여, 3일 만인 06.28일 "서울"ㆍ07.05일"오산 전투"에서 "UN군"까지 격파하고, 07.24일 "대전"ㆍ7월 말 "목포ㆍ진주"ㆍ8월 초 "김천ㆍ포항"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ㆍUN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전투가 몇 차례씩 벌어졌다. 08.03일 "UN군"은 "마산~ 왜관~ 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국군이 북한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로 진출하려던 세를 꺾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행되면서 미군이 도착함에 따라 대대적인 반격으로 이 지역에서 북한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냄에 따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공격의도를 좌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하여야 했고, 이는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6. 평가ㆍ비판
① 5ㆍ16 군사정변 당시
"필립 하비브(주한 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이 본국에 보낸 장문의 기밀문서를 보면, "백선엽"은 "한국 전쟁" 이후, "한국군에 파벌을 형성해, 부패의 온상이 됐던 인물"이었으며, 결국 이 때문에 "5ㆍ16군사정변 준비세력에 의해, 옷을 벗어야 했다"고 나와 있다.
② "선인재단"에서 부패를 저지른 자들을 척결하지 못한 점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빨치산 토벌" 이후, 남겨진 고아들을 모아 살피고, "선인재단"을 세워, 가난한 고학생을 돌보는 등 많은 선행으로 존경받았었다. "6ㆍ25전쟁" 중, "국군ㆍ경찰"의 유자녀, 전쟁 중, "학살ㆍ실종" 등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서울"에 보육원 성격의 "유아원"을 설립하고, "백선 유아원"이라 하였다. "백선 유아원"은 1952년 "지리산 토벌 작전" 뒤, 버려진 고아들을 수용한 시설로, 당시 "전남 광주 송정리"에 세워졌다. "6ㆍ25전쟁" 이후, 그는 손을 뗐지만, 그 뒤 1983년 "백선 사회봉사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19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관구"에 넘겨져,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보건복지부ㆍ광주광역시"의 요청으로 "정신지체인 아동시설"로 운영하였다.
원래 명칭은 설립자인 "백선엽"을 기리는 의미의 "백선"이었으나, 여기에 "수녀회 성인인 사도 바오로"의 영성을 뜻하는 "바오로"를 담아, "백선 바오로의 집"으로 바뀌었다. 이때 세운 "보육원"은 후일, 그가 정계에 은퇴한 후, 교육사업에 투신하는 시발점이 된다. 33살에 "장군"으로 전쟁을 치른 뒤 예편하여, "인천"에서 "중학교ㆍ상업고교"를 인수, "백선엽ㆍ백인엽" 두 "장군 형제"의 이름 1자씩을 딴 "선ㆍ인 학원"을 설립한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가정에서 면학하였기에, 일부 고학생들의 장학금을 후원하다가, 동생인 "백인엽"과 함께 "인천"시에 소재해 있는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선인재단"의 여러 사립학교를 설립ㆍ운영하였다. 그러나 선인재단은 재단 내부의 극심한 비리ㆍ부패 행위로 말미암아, 1981년 초, "선인재단"의 간부들의 비리ㆍ부패행위가 문제가 되자, 책임을 지고 "선인재단 이사장 직"을 사퇴하였고, 1994년 "선인재단"의 모든 학교는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선인학원"에서는 "학생체벌ㆍ교사의 예비군복 착용ㆍ부정입학ㆍ부정 편입학ㆍ졸업장 판매ㆍ기부금 입학ㆍ교사해고ㆍ학교근처 주민재산 침해ㆍ중국인 공동묘지 침탈" 등의 비리 문제가 불거졌다.
③ 미국에서 "백선엽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위대한 전쟁영웅"으로 최고의 예우를 받고 있다.
"국군"의 현대화에 막대한 공헌을 한 점으로, "국군의 아버지" 격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 3사단"을 격퇴하지 못했다면, "6ㆍ25전쟁"은 패배로 끝났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전쟁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다. 1951.04.01일, "6ㆍ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 3사단"을 격멸한 전승기념으로 "백선엽 호국 구민비"가 설립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원수 진급대상자"가 되었으며, 실제로도 "원수 진급심사"를 실시했으나, 평가와 비판 항목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인하여, "원수 진급"이 좌절되었고, 현재 계류 중에 있다.
7. 참전 군인이 말한다 : 백선엽은 조작된 영웅
① 2020.07.20일 : 6ㆍ25참전 박경석 (예비역 준장) : 군사편찬 개입, 스스로 전쟁 영웅 돼. "반민족행위" 따라 법대로 대우해야.
"박경석(88ㆍ예비역 준장)"은 단호했다. "육사생도(2기)" 출신으로, "한국전쟁ㆍ베트남전쟁"에서 야전을 두루 거친 노병인 그는 백선엽은 전쟁영웅이 아니라고 했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장교"로 친일ㆍ반민족 행위를 했고, "한국 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화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10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백선엽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를 막아냈다. 평생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앞잡이였던 백씨가 한국군 최초의 명예원수가 될 순 없다"고 앞장서 반대했다. "채명신ㆍ박정인ㆍ이대용 장군" 등 참전 군 원로들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 결국 무산됐다.
② 백선엽은 조작된 가짜 영웅이어서 용서할 수 없다. 백선엽은 조작된 전쟁영웅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백선엽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없다. 백선엽 가족은 그의 주검을 가족묘지로 이장해야 한다. "백선엽이 일본군 장교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며 항일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고, 여기에 더해 한국 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든 위선자"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백선엽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1사단장이었으니 공적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법적으로도 장군은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죠.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장군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없어요. 백 장군이 예편 뒤, 자청해 30여 년 동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자신과 채병덕 총참모장 등 일본군 출신 군인들 중심으로 한국 전쟁사를 미화했다." 그 예로 백씨를 전쟁영웅으로 만든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를 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그의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 수암산~ 유학산~ 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 대구 접근로"를 방어해,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낙동강 전선은 월턴 워커 중장이 한국군(5개 사단)ㆍ미군(3개 사단) 등 8개 사단을 지휘해 "워커 라인"으로 불렸다. 그의 제1사단은 8개 사단 가운데 하나였는데, 공적이 부풀려졌다"고 했다. 일부를 전체로 과장했다는 얘기다. 또 "개전 초기 전투 상황도 왜곡됐다"고 했다. "제1사단"은 "개성"에 주둔했는데, 북한군은 개전 5시간 만에 "개성"을 점령하고 남하했다. 당시 그는 "경기도 시흥 보병학교"에서 교육받다가 참모의 연락을 받고 즉시 귀대해 부대를 지휘했으나, 전차 등 장비에 밀려 후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설명은 다르다.
06.24일은 "육군구락부(현, 육군회관) 준공기념파티"가 열린 날로, "춘천 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친 "김종오 대령(제6사단장)"을 포함해, 전방 사단장은 모두 참석했다는 것이다. "백선엽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임진강 남쪽에서 후퇴하던 사단에 합류했다. 그도 사단장으로서 당연히 이 파티에 참석했을 것이다. 부대를 비운 이유로 든 교육은 의무가 아니라 출석을 임의로 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술판을 벌이고 있어 남침에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개전 과정에서 북한군의 전차를 몸으로 막고 산화한 것으로 알려진 "제1사단 육탄 10용사"는 뒷날 "10용사" 가운데 몇몇이 북한방송에 출연해, "조작"임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사건 외에 "제6사단의 심일 소령과 육탄 5용사"도 조작 무용담이죠. 모두 일제 강점기에 조작된 "일본군 육탄 3용사"를 베끼기 해, 지휘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백선엽은 후퇴를 참 잘하는 사단장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여서, "내가 등을 보이면 총을 쏘라"며, 진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는 미담 역시 사실이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미군 군사고문단을 극진히 대접해 맺은 인연을 배경으로 승승장구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말했다. 진짜 한국전쟁의 영웅은 누구일까? 그는 1984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선정한 "4대 영웅(김홍일 장군ㆍ김종오 장군ㆍ더글러스 맥아더 장군ㆍ워커 장군)이라고 밝혔다. "김홍일 장군"은 개전 초기 국군 패잔병을 모아 한강방어선을 구축해 3일을 버텼고, "김종오 장군(당시 대령)"은 "제6사단장"으로 3일 동안 춘천을 방어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해 미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고, "워커 장군"은 낙동강을 사수했다.
8. 청빈한 삶? 2,000억 강남 건물에 자식들 재산싸움
형제끼리의 "재산다툼" 외에도 "백선엽 일가"는 유독 "돈"과 관련해 입길에 오른 인물들이 여럿이다. 동생인 "백인엽(전 예비역 중장)과 백희엽(사촌누이ㆍ증권가 큰 손)이 있다. 보수 세력들은 백선엽이 청빈하다고 주장하나, 그가 군인이었을 때, 미국의 평가는 정반대였던 것 같다. "5ㆍ16쿠데타" 당시 "필립 하비브(미 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은 본국에 보낸 장문의 기밀문서에서 "백선엽은 혜택과 진급, 적절한 사면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파벌적 역량을 축적했다. 백 장군은 다른 참모총장들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덕흥빌딩(서울 강남역 5번 출구 바로 앞)"은 시가로 2,000~ 3,000억 원 정도 된다. 현재 "백남혁(장남)"은 "덕흥빌딩" 소유주다. 재산을 "장남" 명의로 해놓았던 게 사달이 났다. 소송과정에서 "장남"과 척을 진 "백선엽"은 말년에 "아내 노인숙(1925~ )"씨와 둘이서 지냈다고 한다. "장남"을 뺀 "3남매"는 "미국 시민권자"로,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백선엽은 "서울 강남역" 앞에 2,000원 대의 건물을 가족 명의로 소유했던 자산가였지만, 수년에 걸쳐 가족 사이 송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 "백남혁(장남)"은 "덕흥빌딩(서울 강남역 5번 출구 바로 앞)" 소유주다. 지하 5층ㆍ지상 16층 규모의 대형빌딩으로, 대지 853㎡(258평), 건평 11,381㎡(3443평)에 이른다. 빌딩 전문 부동산업체 관계자는 "삼성타운이 들어오면서 여긴 부르는 게 값인데, 해당 건물은 초역세권이라 평당 5억 원은 될 것"이라며, "땅값(2020년 공시지가 683억 원) 말고도 건물은 시가로 최소한 2,000~ 3,000억 원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등기부등본을 보면, 백선엽은 "백남혁(장남)" 명의로 돼 있던 땅에 건물을 올려, 1994.12월 역시 "장남" 명의로 "소유권 보존등기"를 마쳤다. 당시 "장남" 나이는 41살이었다. 백선엽의 재산 형성과정을 추적한 "전필건(전, 교육부 사학혁신위원)"은 "40대 초반 나이에 강남 한복판에 대형 건물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명의신탁에 의한 차명소유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차명 소유"는 백선엽 가족이 2007~ 2010년 사이에 벌인 재산다툼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2007.04월, 백선엽의 3남매(1녀ㆍ2녀, 2남)는 "장남"을 상대로, "부동산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인용 결정"을 받았다. "장남"이 자신 명의의 "건물의 매매ㆍ증여ㆍ전세권ㆍ저당권" 등의 권리 행사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3남매"는 이어 "진정명의회복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 "등기부상" 주인은 실제 주인이 아니니, "실제 주인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해달라"는 주장이었다. 2008.08월, "서울중앙지법"이 "3남매"의 손을 들어주자, "장남"은 "서울고법"에 항소했고, 2010.01월 다시 "3남매"가 일부 승소했다. "대법원"까지 간 재산다툼 결과, 해당 건물은 "장남ㆍ백선엽 부인"이 1/2씩 소유하게 됐다가, 2012년 "백선엽 부인"이 지분을 350억 원에 "장남"에게 매각하면서 지금은 온전히 "장남" 소유가 됐다.
※ 백희엽 (1916~1995) 백선엽 사촌누이ㆍ증권가 큰손ㆍ사채시장 큰손ㆍ한국 증권가의 대모
대한민국 최초의 "슈퍼개미"라고 불렸다. 평양 대지주 딸ㆍ일본 동경 짓센 여자대학 졸업ㆍ남편 - 박용학(40년대 후반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 돈으로 한국사회를 주름 잡았던 인물이다. 1975년 "중동건설 붐"을 타고, 건설주가 폭등하면서 증권가에 이름을 날리게 된 "백희엽"은 "동아건설"을 비롯하여, 해외 건설주를 대량 매집해 거액을 벌었다. 한창 명성을 날릴 때에는 단순히 "어떤 주식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만 나도, 관련 주식이 폭등할 정도였다고 한다. 1950년 6ㆍ25때, "무일푼"으로 월남한 후, "페니실린ㆍ마이신ㆍ군복ㆍ 종이" 등 온갖 장사를 다해서 번 돈으로 1960년대 말 "주식투자"에 뛰어들었다. 기업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저평가 우량주"를 선별하여 장기간 보유하는 방식으로 큰 이익을 보았다. 남루한 옷차림을 즐겼고, 외신을 통해 세계 경제 흐름을 파악하며, 국내 투자에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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