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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인물

군인 : 김창룡 (1920)ㆍ이승만 양자ㆍ특무 부대장ㆍ관동군 헌병

by 당대 제일 2022.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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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金昌龍ㆍ1920~1956ㆍ36세)"은  일제 강점기, "관동군 헌병 오장(伍長ㆍ하사)"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여순 사건의 진압ㆍ한국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육군 특무부대 지휘관"이었으며, "여순 사건"과 관련해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 (朴正熙ㆍ5~ 9대 대통령)"을 수사하기도 했다. 

 

1. 김창룡 (金昌龍1920~ 1956향년 36)

군인 (육군 특무부대장육군 중장이승만의 총애)김구 암살사건 배후 의혹ㆍ복무기간 (1941~1956): 일제강점기 관동군 헌병 오장(伍長ㆍ하사)육군 중장방첩대장 (안두희 상관 : 방첩대 소속 현역 육군포병 중위)

•  출 생 : 함경남도 영흥군      •  사 망 : 서울 용산구 원효로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      •  사 인 : 피살

•  학 력 : 함경남도 영흥농잠실습학교육군사관학교(3)        •  참 전 : 태평양 전쟁한국 전쟁

김창룡

"윤치영(이승만의 비서실장1대 내무부 장관윤보선 전 대한민국 대통령의 숙부)""김창룡" 오래 살았다면, "419혁명과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1공화국" 시절 각종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있었으며, 특히 "김구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구""안두희"에게 암살될 때, "김창룡""육군본부 정보국의 방첩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체포된 "두희"에게 여러 편의를 보아준 사실이 있다"김신(김구의 2)"은 당시 계급이 "소령"에 불과했던 "김창룡"이 단독으로 살해를 지시했다고 볼 수 없다며, 사건전모에 비춰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심지어 "김창룡""김구 암살"의 배후일 뿐 아니라, 역시 "김구 암살"과 관련이 있던 "채병덕 장은산성모"의 입을 막기 위하여 이들의 죽음에도 개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이러한 소문들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2. 사망

"특무대"를 이끌며, 군에서 좌익 세력을 솎아내는 "숙군 작업"을 주도한데다, "일제 헌병"으로 하면서 배운 공작 기법과 고문 수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조작 사건"을 무수히 일으킨 것으로 평가된 그는 군과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적을 많이 만들었다.

결국 1956.01.30일 오전 7:30"서울 원효로 1" 출근길에 "강문봉 중장(姜文奉1923~1988)" "허태영 대령(許泰榮1919~1957)이진용 대령(李鎭鎔1920~1991)송용고 중령(宋龍高1925~1957)초식 소령(申初湜1927~1957)" 4명의 군인에 의해 피격, 현장을 탈출하려 하였으나, 추가로 쏜 권총 5발을 맞고 사망했다.

3. 월권행위 김창룡 암살음모교사

혁혁한 전공실적으로 "이승만"의 신임을 얻는 가운데, 상관인 "강문봉 중장"을 무시하면서 감정의 골이 패이게 된다1954.05,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친밀한 사이였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 군내 부패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하였다"공국진"은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되었고, "김창룡""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시도했다"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육군참모총장"도 그가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밖에 없었다.

"공국진""강문봉 군단장"으로 있는 "2군사령부 참모장"으로 발령내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 보좌관을 체포연행하기도 하였다"김창룡"의 월권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강문봉"1955.10,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이나 유학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김창룡""정일권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하였고, 이는 "김창룡 암살음모교사"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주목할 것은 "이승만""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승만"은 적십자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즉시 "육군 중장"으로 추서했다"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해 애도의 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군은 전국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수사에 착수했으며, 전군 장병의 휴가 및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하루 동안 전 육공군 부대가 조기를 게양하였고, 장병들에게는 가무음주 금지령이 내려졌다"이승만"은 그 날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운 것이다"라고 말하, 비문을 직접 써서 보낸 후 범인 체포를 거듭 독촉하였다1956.02.03,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시신은 "국립대전 현충원" 안장되었다.

1956, "김창룡"이 암살당하자, 그의 묘가 "관악산"에 있던 시절, 묘비명을 "이병도"가 썼다고 한다"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개"였다가, 건국 이후에는 "독재자 이승만의 개"가 되어, "625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의 온갖 전횡을 일삼은 "김창룡"을 비판하는 내용은 묘비명에 하나도 없고, "호국의 영웅으로 찬양하고, 미화했다"는 비판이 있다"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 그는 죽었으니,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이병도"의 비명은 "동란 중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5천 명이다"는 김창룡의 업적도 소개했다. 그러나 이 업적에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도 포함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범인은 1달 후, 그의 "특무대" 부하로, "허태영 대령" 등 현직 군인들로 밝혀졌다"허태영""김창룡"의 전횡비리를 보다 못해, 군 민주화를 위해 거사했다고 진술했다그러나 이 사건에는 다른 배후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정확한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김창룡 암살사건""이승만"이 작위적으로 조성한 3대장 사이의 갈등이 "충성경쟁"을 야기하는 원을 넘어서서, 그들 사이에 살기 띤 경쟁을 야기 시켰음은 물론, 그 위에서 줄을 당기고 있던 "이승" 자신에게까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로 격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4. 일제 강점기 활동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농잠학교(2년제)"를 마친 후, "만주철도 소속 장춘역 역원"으로 종사했다1940년 초, 일본인 소개로 "관동군 소속 헌병보조원"이 되었으며, 1940년부터 "만주"에서 "관동군 헌병보조원헌병 이등병"으로 근무했다. 1941, "소련" 국경부근에서 "첩보 부대원"으로 시작하여, 평생 동안 정보 공작의 전문가로 살아가게 되었다.

"헌병교습소" 훈련을 마치고 "관동군 헌병"이 되었으며, "소련-만주" 국경에 파견되어 "소련 공산당중국 공산당"의 움직임을 탐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그 뒤, "일본 사복헌병"이 되어, "정탐원"으로 활약했다1943, "상하이"에서 활동 중이던 "왕근례(중국공산당)"을 체포하였고, 이로 인해 "왕근례"가 이끌던 비밀 조직이 일망타진되는 성과를 올렸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오장(伍長하사)"로 진급하였으며, 이후로도 많은 비밀 조직을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5. 해방이후 활동박정희 심문

1945년 해방이후, 고향에 돌아왔다가 "치안대"에 구금되었고,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다시 체포되었다. 이때 "일본헌병 오장"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2차례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다1946, 월남하였고, "국군 제3연대(전북 이리)"에 신병으로 입대 후, "3연대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1947, "조선경비사관학교(3)"에 입교, 속성으로 졸업한 뒤, 1947"육군 소위" 임관하였다"첩보 부대"에서 근무한 경력을 인정받아, "정보 소대장"을 맡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한 소련군 장교의 사진촬영 사실을 적발해, 추방하게 하는 등 능력을 발휘했다.

북한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는 반공 전선의 일선에 섰고, 동료들을 정탐하고, 군부 내 좌익사들을 감시하였다. "남로당" 간부들인 "이재복이중업" 등을 체포하였고, "남로당" 거물인 "김삼룡이주하"도 그의 손에 체포되었다군내에서는 "송호성" 등이 좌익과 연계를 갖고 있다며 숙군 작업도 주도했는데, 그에게 용공 세력으로 지목받은 장교들은 대개 "송호성"처럼 "광복군"이었거나, "오동기"처럼 "중국군" 소속으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었다.

1948, "육군 대위"로 승진하여,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장교"로 보직되었다좌익 색출검거에 앞장섰으며, "여수순천사건"의 진압좌익군인 색출숙청작업을 주도했다"여수순천 반란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참여했다가, "남로당" 가입혐의로 체포된 "박정희 소령" 심문하였으나,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을 위시한 압력에 순응해서, 도리어 "박정희"의 연대 신원 보증에 참여하고 살려주었다. 1949, "방첩대장"으로 부임하였고, 그해 6"김구 (한국독립당 당수)"가 암살되었다. 이때 암살자가 "방첩대" 소속 현역 육군포병 중위 "안두희"였으므로, 배후로 의심받았다.

6. 한국 전쟁

1950.08.01, "부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서울 수복 후에는 부역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북진할 때, "평양지구 특무대장"으로 있다가, 14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검경 합동수사본부장" 일을 계속했다. 이때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권력 실세였다그는 수사권을 독점했으며, "이승만"과 직통 보고라인을 갖고 있었다종전 뒤에도 "이승만"의 각별한 신임 속에, "1공화국"의 각종 공안사건들을 맡아 처리했다그러나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용공 사건간첩 사건들"은 후에 조작이라는 진술이 나왔다.

1949년 제14연대장 "오동기" 등이 연루된 "인민해방군 사건"이나, 1950"남로당 이강국"연인이라는 "김수임"을 체포해 처형한 사건, 소총을 관 속에 숨겨 대구로 이동하던 불순분자들을 적발한 , 부산정치파동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사건" 등이 있다625전쟁 중, 잔류 시민들의 부역자 여부를 색출탐문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좌익 부역자들을 엄히 다루어 원성을 샀다.

"특무대장"으로 있으면서, "동해안 반란사건"국가원수 암살미수사건"등 각종 정치사건을 조작하여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이승만"의 반대파를 축출하였다1953. "국제간첩 정국은"을 적발한 사건도 "이범석의 족청계" 숙청을 위해 조작 또는 과장된 사건이라는 설이 있었다그밖에 "동해안 1군단"이 연루된 "동해안 반란사건", 1955년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간 "조소앙"이 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개천절 이승만 암살음모사건"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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