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 (李範奭ㆍ1900~1972ㆍ72세)"은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고, "임시정부 광복군 참모장"이었으나, "부산 정치파동"의 주역으로,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도왔다는 점과 "한강철교 폭파"로 희생자를 양산했다는 점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1971.07월, "서울 국립현충원"에 있는 "이승만 묘비"를 친필로 썼다.
1. 이범석 (李範奭ㆍ1900~1972ㆍ향년 72세)ㆍ이승만 묘비 작성자ㆍ청산리 전투
군인(중국군 소장)ㆍ독립운동가(임시정부 광복군 참모장ㆍ육군 중장)ㆍ청산리 전투에 참전ㆍ조선민족청년단 (족청ㆍ族靑ㆍ1946.10) 설립자ㆍ국무총리(1대)ㆍ국방부장관ㆍ내무부장관)
• 출 생 : 한성부 용동 • 사 망 : 서울 명동 성모병원 (국립 현충원) • 사 인 : 병사 (심근경색) / 어머니 연안 이씨ㆍ아내 김마리아 역시 심장병으로 사망 • 학 력 : 중국 항저우 체육학교ㆍ중국 윈난 육군강무학교
• 호 : 철기 (鐵驥) • 별 칭 : 왕운산(王雲山)ㆍ인남(麟男)ㆍ이국근(李國根)ㆍ이국진(李國鎭) • 종 교 : 대종교
• 처 : 김 모씨(1915~1915ㆍ천안군수 김승현 딸ㆍ중국망명으로 이별)ㆍ올레리아(1925ㆍ러시아 여인ㆍ자살)ㆍ김마리아(1925ㆍ러시아계 한국인ㆍ경주 김씨 김미하일로비치 딸)
• 자 녀 : 2남 (이부흥ㆍ 이인종) • 가 족 : 매부- 신석우 (1894~1953ㆍ우창(于蒼)) 독립운동가ㆍ조선일보 사장
• 정 당 : 자유당→ 신민당 • 저 서 : 회고록 - 우등불ㆍ방랑의 정열ㆍ한국의 분노 / 논설집- 민족과 청년(1948)ㆍ혈전 - 청산리 작전
• 경 력 : 1929~1940 :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육군소장 → 1940~1946 : 대한독립군ㆍ대한광복군 중장ㆍ한국광복군 참모장ㆍ제2지대장ㆍ중국 동북항일군 작전과장ㆍ육군 제3로군 참의급(參議級) 고급참모(중국군 소장)겸 중국군 제3집단군 제50군단 참모처장ㆍ제3집단군 55군단 참모처장ㆍ전역 후, 한국광복군 육군소장ㆍ북로군정서 중대장ㆍ대한민국 국무총리(1대)ㆍ 국방부장관ㆍ주 중화민국대사ㆍ내무부장관 → 1940 : 광복군 창설에 참여ㆍ광복군 육군 소장에 보임 (1945 : 광복군 육군 중장 진급) → 1942 : "나월환(광복군 제2지대 지대장)"이 암살되어, 제2지대장 겸임ㆍ미국 중국방면군과 연합작전을 성사시켰고, 독립군 장교들에게 OSS 특수훈련을 주도 → 1949 : 단정 수립에 동참하여, 1948.07.31~ 1950.04.20일까지 제1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역임ㆍ08.15일부터는 국방부 장관도 겸임ㆍ주 중화민국 대사ㆍ내무부 장관 → 1952 : 제2대 부통령 후보 낙선ㆍ1953- 6개월간 구미 각국의 정치ㆍ군사정세 시찰. → 1956 : 제3대 부통령 후보 낙선 (이승만의 견제)
고등학교 재학 당시,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ㆍ북로군정서" 등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하였으며,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뒤, "소련ㆍ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광복군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ㆍ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그는 재정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는데, 중국에 있을 당시, "아편 장사를 해서 돈을 모아 치부할 기회조차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민족청년단" 운영 과정에서도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의연금이나 기부금에 의존해야 했다.
1945년, 귀국을 시도했다가 강제로 "상해"로 되돌려 보내졌고, 194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호상"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반공주의 정치활동을 하였다. "김구"의 "남북협상"에 반대하여 "이승만"에 협력ㆍ단정수립에 동참하여, 제1대 국무총리 (1948.07~1950.04)를 역임하였고, 1948.08월부터는 국방부 장관도 겸임하였다. 이후 "주 중화민국 대사ㆍ내무부 장관"을 거쳐, 1952년 제2대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고, 1956년 "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이승만"의 견제로 낙선하였다. 1960년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탈당ㆍ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 조선민족청년단 (족청ㆍ族靑)→ 대한청년단 (한청)→ "족청 계"는 "자유당 창당"의 핵심세력
• 결 성 : 1946.10 (서울에서 조직) • 목 적 : 청년운동단체 • 설 립 : 이범석 (광복군 참모장ㆍ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 광복군 육군 중장)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6명의 당선자를 냈으며, "이승만 집권" 뒤 "대한청년단"에 흡수ㆍ통합되었다. 1949.01.20일 "대한청년단"에 흡수됐다. 이후 "대한청년단 족청 계"는 "자유당 창당"의 핵심세력이 되었으나, 그 수장인 "이범석"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자유당"에서 배제되었다.
2. 평가ㆍ비판
① 신념 : 민족지상 국가지상주의 (民族至上 國家至上主義)
② 평가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다는 평가가 있다.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유능한 장군이라는 평가가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③ 비판
"부산 정치파동"의 주역으로,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도왔다는 점과 "한강철교 폭파"로 희생자를 양산했다는 점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조선민족청년단" 운영 당시,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점 때문에, "미군정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범석의 민족주의"를 몹시 싫어하였다. "독재주의"라는 비판도 있는데, 그는 "미군이 투쟁했던 적이 독재주의라면, 그 미군이 독재주의 성격을 띠고 있는 청년 운동을 도와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간단한 논리의 귀결"이라며, 반박하였다.
동시대의 정치인인 "조봉암"은 그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하였다. "나치 연구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고, "나치 추종자ㆍ파시스트"라는 이야기를 듣던 그는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ㆍ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비난도 있다. 역사문제연구소에 의하면, "그가 민족을 많이 외쳤으니까, 친일파 숙청을 열렬히 주장해야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와 정 반대였다"며, 이범석의 민족지상이나 일민주의는 기만적인 것으로 "민족주체성이 배제된 파시즘"이라 비판하였다.
3. 논란ㆍ의혹
① 청산리 전투 관련
임시정부의 기록과는 달리,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자서전에서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북로군정서)과 자신"만이 참여한 것처럼 서술하였는데,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으로 싸운 것이며, 김좌진과 이범석이 전투의 주역"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홍범도(대한독립군) 부대와 김좌진(북로군정서) 부대"가 전투에 가담하여 싸웠다. "청산리 전투"가 "북로군정서 단독의 전과"라고 알려진 것은, 전투 참가자 중 한 사람인 그가 "한국의 분노"라는 회고록에서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후에 "우둥불"이라는 다른 회고록을 다시 발표, "홍범도 부대가 전투 직전 도망갔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그 변명 또한 거짓임이 밝혀졌다.
"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군ㆍ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ㆍ최진동이 이끄는 연합부대"가 함께 싸웠으며, 그 중에서도 "홍범도 부대"의 활약이 특히 눈부셨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연합"으로 나와 있다. 임정 발표에 의하면, "만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서 제1연대장 홍범도, 제2연대장 김좌진, 제3연대장 최진동 등의 연합부대와 일본 병이 충돌하여, 일본군의 손해 사망자 6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
② 1948.10월 "여수ㆍ순천사건" 당시, "김구" 공격
1948.10월 "여수ㆍ순천사건" 진압 당시, 특별한 근거 없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다.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인 그는 10.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다. 그러나 "김구"가 여수ㆍ순천사건"을 배후로 조종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그는 대담에서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거나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라며, 극우를 강조했다.
이는 "김구"를 지목한 것이었다. 계속해서 그는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10.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도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고 언급하며, 이 반란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 10.27일, "김구"는 기자회견을 열고, 그 극우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며, 자신은 공산주의자들과는 손을 잡지 않는다고 해명하였다.
'한국 (근 • 현대사)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인 (4명의 친구) : 정일권ㆍ윤동주ㆍ문익환ㆍ장준하 (0) | 2022.11.06 |
---|---|
군인 : 정일권 (1917)ㆍ정인숙 내연남ㆍ만주군 장교(최상위계급 조선인) (0) | 2022.11.06 |
군인 : 김홍일 (1898)ㆍ6ㆍ25 한강 방어선의 결정적 공헌자 (2) | 2022.11.06 |
군인 : 신성모 (1891)ㆍ국방장관 (625 당시)ㆍ한강 인도교 폭파 지시자 (3) | 2022.11.06 |
군인 : 지청천 (1888)ㆍ광복군 총사령관ㆍ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 (0) | 2022.11.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