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인물

군인 : 정일권 (1917)ㆍ정인숙 내연남ㆍ만주군 장교(최상위계급 조선인)

by 당대 제일 2022. 11. 6.
반응형

 

"정일권 (丁一權ㆍ1917~1994ㆍ77세)"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숨은 주역이다. 1950년, "육군참모총장 (5대)" 재직 시, 국군 총사령관을 겸임하여 육ㆍ해ㆍ공군을 지휘하였으나, "국민방위군 사건ㆍ거창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사퇴했다. 총리 재직 중, 자신의 아이를 낳은 "정인숙 암살사건"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빚자, 총리 직을 사퇴했다. 1970년,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1971년부터 8ㆍ9ㆍ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73년부터 "국회의장"을 지냈고, 1980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1. 정일권 (丁一權ㆍ나카지마 잇켄ㆍ1917~1994ㆍ향년 77세)

만주국 일본군인ㆍ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ㆍ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도와 외교관ㆍ간도헌병대 대대장 (일본군 중령ㆍ최상위계급 조선인)ㆍ군인(육군대장ㆍ군번5번)ㆍ국회의원(3선ㆍ8~10대)ㆍ국회의장ㆍ국무총리(9대)ㆍ외교관(주미 대사 3대/ 5대)ㆍ외무부장관(11대/ 13대)이승만 정권 시, 3대 파벌 구도형성(백선엽ㆍ이형근)

• 출 생 :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 (현, 우수리스크)      • 호 : 청사 (淸史)

• 사 망 : 미국 하와이 스트라웁 병원 → 국립묘지 장군 3묘역      • 사 인 : 병사 (임파선 암)

• 학 력 : 1937년 :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5기ㆍ수석 졸업) → 1940 : 일본 육군사관학교 (55)

• 처 : 5 명- 윤계원(요절)ㆍ박혜수ㆍ미 상ㆍ이모씨ㆍ정인숙         •  종 교 : 개신교

• 자 녀 : 3남 4녀 (정성일 (정인숙 아들) 포함)      • 가 족 : 형 2명(요절)    • 저 서 : 전쟁과 휴전ㆍ정일권 회고록

• 경 력 : 만주군 간도헌병대 대대장 (일본군 중령)ㆍ해방 전 만주국 군대에서 계급이 제일 높은 조선인 → 육군대장(1949~1957)국무총리(1964~1970)국회의장(1973~ 1979)외교관(주미대사외무부장관)공화당 총재 상임 고문(1970)국회의원(1971년부터 3, 8~ 10)

정일권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로 이주한 이주민의 자녀로 출생하여, "함북 경원"에서 성장하였다"함북 경원"에서 소학교를 다녔으나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고, 1930"만주 영신중학교"에 입학했다가 통합되어 "광명중학교"로 졸업하였다중학교 재학시, 성적이 우수하여, 학교 선배이자 영어교사인 "장내원"의 권유교련 교관의 추천을 받아 "봉천군관학교"로 진학한다1937.09"봉천군관학교(5)"를 졸업, 성적우수자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편입학했다.

1940, "일본 육군사관학교(55)"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임관하였다광복 후 귀국, "육군"에 참여하였고, 1949"육군 준장"으로 "지리산 공비 토벌"에 참여하였다군 복무시, "육군참모총장(58)"를 지내고, 1950년 한국전쟁 한국군 지휘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숨은 주역이다1950, "육군참모총장(5)" 재직 시, 국군 총사령관을 겸임하여 육공군을 지휘하였으나, "국민방위군 사건거창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사퇴했다1951,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1954"대장"으로 진급했으나, 휴전 후의 국군 내 "만주군" 인맥의 한사람으로서, 군내 파벌 갈등에 가담하였다.

1957, 예편 후, "이승만"에 의해 "터키대사"로 임명된 뒤, 외교관으로 활동했다이후 "프랑스대사미국 대사"로 임명된 뒤, 미국에서 "419혁명"을 접하였으며, "과도 내각"에서 "미국대사UN총회 한국대표"를 거쳐, "516 군사쿠데타" 발생 후, "박정희"를 지지하였다1964, "국무총리"가 된 뒤, "한일협정" 체결을 성사시키는데 노력하였으며, 1966~67년에는 다시 "외무부 장관" 되어, 총리외무장관을 겸직하며, "한일협정" 직후의 문제를 수습하였다.

총리 재직 중, 자신의 아이를 낳은 "정인숙 암살사건"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빚자, 총리 직을 사퇴했다1970,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1971년부터 89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73년부터 "국회의장"을 지냈고, 1980년 정계에서 은퇴했다그 뒤 "국정자문위원"을 거쳐, 1989년 한국반공연맹 이사장(22)한국자유총연맹 초대총재에 취임하였다.  "한일회담 강행정인숙 사건" 등으로 비판 여론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박정희"의 신임으로 정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서재에는 늘 "박정희 영정사진"이 걸려 있었고, "박정희"를 지칭할 때에는 꼭 "각하"라는 존칭을 으며, "박정희는 민족주의자"라고 칭송했다고 한다또한 "박정희"가 자신에게 말을 놓지 않고, "형님"이라고 늘 지칭했던 것을 자랑삼기도 했다.

유해는 "하와이"에서 비행기 편으로 귀국, 1994.01.22일 오전, "국회의사당 광장" 앞에서 "이만섭 의원" 주도로 영결식노제를 거행한 뒤, 경찰병력의 호송 하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장군 제3묘역" 묻혔다한편 "광명중학교" 동문인 "문익환 목사"도 같은 날 세상을 떠났는데, "문익환 목사"의 영결식은 "신대"에서 시작해, "대학로동대문"에 이르기까지 수십만 명이 참여한 "노제"로 치러진 반면, "정일권"의 장례식은 국립묘지에서 정치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루어져 TV뉴스에서 대비되었다그들은 태어난 해도 같고, 같은 중학교를 다녔으나,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갔으며, 같은 날 사망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 평가

생애 2등에 만족하는 "처세(處世)의 달인"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었지만, 최고 권력을 넘보지 않고 현실에 도전하기보다는 순응했다는 평가다. 1970.03.17일 밤11시경 발생한 "정인숙 암살사건" 이후, 그는 "정인숙의 암살 배후ㆍ정성일의 생부"로 의심받기도 했다. (정인숙 암살사건 참고) 미국에 있을 때, "정인숙"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정성일"이 찾아와, 친자임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사양했고, 이후에는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1993년, "정성일"은 "서울가정법원"에서 그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제소했다.

3. 정일권ㆍ박정희 관계

1963년, "박정희"로부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12월에 "외무부장관"이 되어 입각하였다. 이때 "공화당"의 신진 당료들과 "최두선 총리" 간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964년, "박정희 정권"에서 강행한 "한일협정 회담"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이어지고, 1964.05월 "최두선 국무총리"가 사임하자, 4월부터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1970.12월까지 6년 7개월 동안 재임했다.

"국무총리"로 취임한 정일권은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ㆍ식량증산 및 확보ㆍ물가 안정ㆍ공개 및 신속한 행정"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빠르면 6개월 늦어도 1년 안에는 국민이 원하는 모든 일을 과감하게 실천하겠다고 공약하였다. 그 뒤 아무도 "외무부장관직"을 선뜻 맡으려 하지 않아, 2개월간 "외무부장관직"을 겸직하였다. 1966.12~1967.06월까지, 다시 "외무부장관"이 되어, "총리직ㆍ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1965.02월, 이른바 "불도저 내각ㆍ돌격내각"이라 불리면서, 일본을 방문해 "사토 에이사쿠 수상"과 회담을 마무리하고, 6월 "한일협정"을 조인하는데 앞장섰다. 한일협정반대와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국회에서 본회의 도중에 김두한 의원의 국회오물투척사건 당시 오물세례를 맞았다.

1970.03.17일 "정인숙 (鄭仁淑ㆍ1944~1970.03.17ㆍ향년 26세)"사건이 터졌다.  1970.03.17일 밤 11시경, "정인숙"은 남산의 "타워호텔 18층 나이트클럽"에서 한 40대 남성과 만나 와인을 마셨고, 그 후 그곳에서 "Release Me ( 제발 날 놓아 주세요ㆍ영국 엥겔버트 험퍼딩크 노래)"를 듣고, 운전수 "정종욱(4째 오빠)"이 운전하는 "코로나 자동차"를 타고 가던 중, "서울 강변 3로(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에서 갑자기 나타난 2명의 괴한들에 의해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2발의 총탄(머리ㆍ가슴)으로 사망하였고, "정종욱"은 1발(넓적다리)이 관통당하였으나 부상당한채 생존해 있었고, 택시기사에게 도움을 청해, 구조되었다.

제3공화국 시절, 엄청난 미모로 최고 권력층의 실세와 유력한 정치인들을 두루 섭렵하고 다니면서 큰 위세를 떨쳤던 고급요정 종업원 출신 "정인숙"은 "박정희ㆍ정일권ㆍ박종규ㆍ이후락" 등 대다수 5ㆍ16 주체세력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야당인 "신민당"의 정치공세가 계속되자, "정일권"은 "박정희"를 찾아가 무릎까지 꿇었다고 한다. 바로 해임을 시키면, 세간의 루머만 커질 것을 우려한 "박정희"는 "정일권"을 불러 자진 사퇴를 권고한 뒤, "정종욱"이 구속되고, 잠잠해질 무렵 "정일권"을 해임하고 바로 "미국"으로 내보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