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金弘壹ㆍ1898~1980ㆍ82세)"은 중국군 현역 군인 신분으로 임시정부의 "김구"를 도와, "윤봉길ㆍ이봉창"의 거사에 쓰일 폭탄을 준비했다. "미군"의 역할이 한국의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김홍일 장군"이 "한강 이남"에서의 "지연전"을 대성공시켜, 무려 7일이나 되는 시간을 벌었다.
1. 김홍일 (金弘壹ㆍ1898~1980ㆍ향년 82세)
한강 방어선 전투의 영웅ㆍ중화민국 최초의 육군 소장(사단급 부대 지휘)ㆍ독립운동가ㆍ"한국광복군 참모장"을 거쳐, 최초의 장군 임관자(준장)으로 임관하여 "6ㆍ25전쟁"에 참전ㆍ육군사관학교 교장ㆍ외교관(7대 외무부 장관)ㆍ신민당 국회의원(7대)ㆍ신민당 총재ㆍ민주통일당 고문ㆍ1961년 "5ㆍ16 군사정변" 직후에는 잠시 "외무부 장관"을 역임ㆍ"국방개론" 집필
• 출 생 : 평북 용천군 양하면 오송동리 • 사 망 : 서울 • 사 인 : 병사
• 호 : 일서(逸曙) • 별 칭 : 최세평(崔世平)ㆍ왕웅(王雄ㆍ중국식 가명) • 학 력 : 구이저우의 육군군관학교
• 처 : 최서경(사별)ㆍ민경란(재혼) • 자 녀 : 3남 (장남 김극재) • 수 상 : 을지 무공훈장ㆍ태극 무공훈장
• 저 서 : 국방개론(1949)- 국군이 지향해야 할 국방력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자칫 공백으로 남아있을 뻔 했던 건군 초기 및 6ㆍ25 이전의 군사연구 분야에서, 국군 내부에 이러한 식견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인물이 있었다는 점에 많은 의의가 있다. 상비군의 유효상한 비율을 인구대비 8/1000(즉, 0.8%) 수준으로 설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1949년 인구 3000만 대비 상비군 24만이 적정하다고 제시하였다.
2. 1950년 "6ㆍ25전쟁" : 초기 방어전의 결정적 공헌자
"미군"의 역할이 한국의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김홍일 장군"이 "한강 이남"에서의 "지연전"을 대성공시켜, 무려 7일이나 되는 시간을 벌었다. 이러한 성공이 아니었다면, 이후 전투에서의 방어와 "인천상륙작전" 등의 반격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6ㆍ25전쟁" 초기 방어 당시 "김홍일"의 공로는 아무리 높이 평가받아도 지나치지 않다.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인사배치"도 적절했는데, 당시 "김홍일 장군"의 "시흥사"는 그냥 1인 사령부였다. 기껏해야 "김홍일 장군ㆍ당번병ㆍ부관" 정도였다. "김홍일 장군"의 이전 직책이 "비전투부대인 학교장"이었으니, 휘하 병력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거기에 한국군의 철수장면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라, 장교들은 약장을 떼어 누가 장교인지 병사인지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을 수습하여, "순수 지휘부"를 구성했다. 그래서 철수하던 "유재흥"을 붙잡아 "참모장"을 시키고, 퇴각 중이던 무슨 장교를 찾아 "부관"을 시키고, 소대장이 부족하면 하사를 소대장으로 임명하는 식으로 진행한 것이다. 그렇기에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는 "김홍일 장군"에 대해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격찬하고 있다. 한마디로 개전 당시 "채병덕"의 전략적 과오로 인한 군사적 위기를 대부분 수습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1군단"이 된다. "김홍일 장군"은 당연히 "초대 1군단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국군의 지연작전"을 기획한다. 이때 임명장의 내용을 보면, 국군 내에서 유일하게 "사단 급 제대운영 경험"이 있는 "김홍일 장군을 임명한다."고 되어있다고 한다. 이후 "김홍일 장군"의 "지연작전"에 따라, 국군은 "북한군"을 적절히 저지하였고, "김석원"과 같이 예편된 사람을 곧바로 기용하여, "수도 사단"으로 임명하는 등, 적절하게 인재를 배치하였다. "김홍일 장군"이 있었기에 "낙동강 전선"이라는 것이라도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인천 상륙작전"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열린 "군 원로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하였다. 군 원로들과 함께 "한강 방어"를 제안했으나, 당시 "채병덕(육군총참모장 겸 국방부참모총장)"이 거부하여 "한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졌다"고 전해진다. 구체적으로 "김홍일 장군 회고록"에서는 전 병력을 모아서 결전을 할 것인지, 아니면 지연전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병력을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제했으나, 전략연구를 해본 인사가 없어서 자신의 주장이 공허했다고 적혀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신성모ㆍ채병덕ㆍ김홍일ㆍ유동열ㆍ지청천ㆍ이범석ㆍ김석원"이고, "이응준 장군(광주 5사단장)"은 불참하였는데, "김홍일ㆍ김석원ㆍ지청천ㆍ이범석" 등 경험 많은 숙장들은 "한강방어선 구축"을 주장한데 반해, 정작 "신성모(국방부장관)ㆍ채병덕(참모총장)"은 그 결정을 미뤘다.
"채병덕"은 회의장을 나서면서, "늙은이가 자꾸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고 우긴다."고 하며 화를 내면서 "매번 지기만 한 장개석 군 장군이 무슨 장군이냐"며, 했다. 그러나 정작 "채병덕"은 "일본군 병기장교" 출신으로 실전 경험이 전무 했다. 같은 일본군 출신으로 "포병 소좌 출신"인 "군번 1번 이형근 장군"조차 채병덕을 무시했을 정도였다.
"김석원" 역시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기를 그 어느 때보다 "김홍일 장군"이 열을 올리며, "한강선 결전"을 주장했고, 이에 대해 "이범석ㆍ지청천ㆍ김석원"이 적극 동조했으나, "국방장관ㆍ총참모장"이 구체적인 대답을 않고 희망 섞인 기대만 하고 있어, 유야무야 끝났다고 표현하고 있다. "김계원" 역시 회고록에서 "채병덕"이 "김홍일"을 "후퇴만 하던 중국군 경력가지고 무슨"이라고 비하했다는 비슷한 내용의 증언을 하고 있다.
06.27일, "김홍일"은 "채병덕"의 요청으로 "1사단 작전지도"를 맡게 된다. 이 요청에 따라, "파주"로 달려가 보니, 당시 "백선엽"이 지휘하던 "1사단"이 예상외로 선전하고 있었고, "1사단"을 작전지도하기보다는 "의정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습격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뒤, "적 전차가 창경원에 침입하였다"는 전보를 듣게 된다. 이에 그는 곧바로 "백선엽"에게 공격작전을 취소하고, 도강 후 후퇴하여 "한강 동안"에서 방어에 대비하되 "수색ㆍ행주"에 공병대를 파견하여 선척을 집합하고, 치중부대를 먼저 도하시킨 다음, 부근 민가를 몇 집 헐어 그 재목으로 보병이 통과할 "부교를 가설하는 것"을 지도했다.
하지만 "백선엽"은 "육본"의 명령이 사수였기에 어쩔 수 없다는 답을 한다. 이에 "김홍일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때 정말 답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아무튼 "백선엽"이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은 직속상관이 아니었기에 명령이 아니라 조언이라는 한계를 느낀 "김홍일"은 "채병덕"에게 찾아가 철수를 건의했지만, "채병덕" 앞에서 말이 먹히지가 않았다.
전황은 심각해졌고, "채병덕"은 계속해서 "수도 사수! 북진 통일! 나가자!" 이러고 있었다. 결국 "5개 사단"이 철수하기 전에 "한강철교ㆍ한강 인도교"가 폭파당했다. 결국 북한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여 대부분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1사단"마저 사단장인 "백선엽"이 부대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후퇴해서 한강 이남에서 다시 살아 만나자"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이 때 구원 투수로 등장,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보직한다.
말이 "사령부"지, 휘하 병력은 커녕 참모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1인 사령부"였으나, 병력을 수습하여 "3개 사단"으로 구축해 낸다. 공식 전사에서는 "채병덕"이 "김홍일 장군"을 "시흥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적었으나, 최근 연구결과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이응준 장군"과 함께, 피로에 쩔어 있던 "채병덕"에게 찾아가 설득해서 "시흥사" 자리를 쟁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김홍일 장군"이 부임하면서 국군의 전투력은 급격히 상승한다.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라주바예프의 전쟁보고서"의 내용이다.
초기만 해도 부실한 부대로 적혀있던 한국군에 대한 언급이 갑자기 6일 만에 견실한 전투부대로 이야기가 바뀐다. "라주바예프"는 보고서에는 한국군의 초기대응이 부실하고, 주로 소화기와 대인화기 중심이므로, 전차대대의 공습을 받으면 급격히 무너졌다 등의 평가를 했다. 그러나 "김홍일 장군"이 부임한 이후, "라주바예프 보고서"에는 한국군 포병이 포대 단위의 경우, 매우 효과적이고 견실한 사격 통제, 사격의 정확도 등이 보여 졌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렇게 긁어모은 병력으로 "한강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또한 "맥아더"와 직접 만나서, "한강선 방어계획"을 제대로 설명하였고, 현재 부족한 탄약ㆍ무기의 공급ㆍ미 공군에 의한 한강철교의 파괴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약 1~2주 정도를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지연전"을 펼쳐, "미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7일이나 버티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이후 "수도 사단ㆍ1사단ㆍ2사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미군"과 협조하여 "진천~ 음성~ 청주" 축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낙동강 방어 작전"에서 "안강~ 기계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제1군단장"으로서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때 "명태사건"으로 "1사단장"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김석원 장군"이 "시흥국민학교 지휘소"로 "김홍일 장군"을 찾아와 도와줄 일이 없겠냐며, 찾아온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곧 재편된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진천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김홍일 장군"이 구국영웅인 이유는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지연작전"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당시 전군이 총 "8개 사단"이었는데, 그 중 5개 사단이 사라졌다. 그나마 "1사단"은 "중화기ㆍ소화기"는 상실했지만 제대를 유지하면서 퇴각했고, "중부 6사단ㆍ동부 8사단"은 적을 격퇴하면서 후퇴 중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5개 사단"은 전 병력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약장을 떼어내고, 한강변에 달려가 병사들과 싸우면서 뗏목을 타고 한강으로 남하하려고 했다고 적혀있다. 그야말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렇게 무너진 병력을 수습하고 다시 이를 전투능력을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했다. 만약 이렇게 조직화하지 않았더라면, 이후의 "지연작전"이나 "낙동강 전선"을 유지할 병력 자체가 없어서 무너졌을 것이다. 거기에 단순히 병력을 모은 것만이 아니라, 병력을 적절하게 배치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17연대"인데, "17연대"가 "시흥사"에 도착하자, 병력이 부족함에도 후방으로 후퇴시켜 수습할 시간을 마련하였다.
"1사단"의 경우, 제대를 유지하면서 철수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백선엽"의 "군과 나"에 서술되어 있듯이 "백선엽"은 "한강 도하" 이후, 병력을 찾을 수 없어서 소문을 듣고 "시흥사"에 가보니 "1사단" 병력이 남아있어 재회할 수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김홍일 장군"이 퇴각 중이던 병력을 수습하고 "1사단"을 수습한 것이다. 만약 "김홍일 장군"이 없었으면, "1사단"은 제대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1사단"이 제대를 유지하면서 철수했다면, "백선엽"이 자서전에서 "우리 남쪽에서 살아서 보자는 말을 병사들에게 했다"고 적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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