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李商在ㆍ1850~1927ㆍ77세)"는 "이승만"의 스승으로, "독립협회"에서 그를 만난 이후,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이며, 재정적 후견인이 되었다. 과거에 낙방한 후, 승지였던 "박정양"의 개인비서로 관계에 투신하였으며, 1881년 "일본"을 시찰, 개화사상을 접하였다. 귀국 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1. 이상재 (李商在ㆍ1850~1927ㆍ향년 77세)
개화파 운동가ㆍ독립운동가ㆍ교육자ㆍ언론인(조선일보 사장)ㆍ민중 계몽운동(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ㆍ재산이 없던 "이상재"는 "경성의 전셋방"에서 병사하였다. 개인적으로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전세"로 전전하던 그는 사망 당시, "쌀 27가마"의 빚을 남겼다. "윤치호ㆍ이승만ㆍ김성수ㆍ안창호ㆍ송진우" 등이 모금운동을 하여, 이 빚을 갚아주었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세 아들이 그보다 먼저 죽고, 4째 아들 "이승준" 만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 출 생 : 충남 한산군 한산면 종지리 • 사 망 : 일제 강점기 경성부(서울) 재동 셋방 • 사 인 : 병사 (노환ㆍ합병증)
• 호 : 월남 (月南) • 본 명 : 아명 : 계호(季皓)→ 성인이 되어 상재(商在)로 개명
• 별 칭 : 만년 청년 • 학 력 : 한학 수학 • 종 교 : 개신교 • 처 : 강릉 유씨ㆍ후처 : 장순재 • 자 녀 : 4남
과거에 낙방한 후, 승지였던 "박정양"의 개인비서로 관계에 투신하였으며, 1881년 "일본"을 시찰, 개화사상을 접하였다. 귀국 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정치적 스승인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외교에 개입한 "청나라 사신"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귀국 이후, "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1899.11월 "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었다.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한일합방"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5년, 이후에는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으며, 1919년 "3ㆍ1만세 운동"에는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관련자로 지목되어 연행되기도 했다. 이후, 교육ㆍ청년의 계몽ㆍ각성을 역설하는 등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ㆍ신간회" 활동하였다.
2. 평 가
풍자ㆍ기지가 넘치고,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어하였다. 그 근거로 "계몽사"에서 만든 "이상재 전기"에는 풍자와 경구로써 부당한 현실에 저항한 재담가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나온다. "신사유람단"을 따라갔을 때, 일제가 총ㆍ칼을 보여주며 힘을 자랑하자, "칼로 일어서면 칼로 망한다"는 예수가 로마제국의 군국주의를 논박하기 위해 한 말(마태복음 26:52)을 인용했고, 을사오적들에게는 "대감들, 일본에 가시지요. 당신들 나라 망하게 하는데, 재주가 있으니 말이오"라고 독설하였다.
"서재필"은 그의 부음을 듣고, "조선일보"에 한 기고에서 "그는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송진우(동아일보 사장)"은 "세상을 풍자하는 해학은 동방삭을 앞섰고, 슬플 때는 굴원을 생각하게 한다"며,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고 일신은 근심하지 않아 머리는 희고 마음은 붉었다"고 평하였다. "윤치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인 분"이라고 평하였다. "김동길"은 그의 "솔직함과 가식이 없음"을 높이 평가했다. "월남 이상재가 한 시대에 우뚝 선 거물인 까닭은 범사에 솔직하고 가식이 없고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신 어른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고 평하였다.
3. 일 화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우연히 "이완용ㆍ박제순"과 조선인 귀족들과 마주보고 앉게 되자, 그는 인사말로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 가셔야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들이 의문을 표하자, 그는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데 선수 아니십니까. 대감들이 일본으로 이사 가시면, 일본이 망할 것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의 풍자ㆍ조롱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일합방" 직후, 어느 저명인사가 자발적으로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였는데, "이토(伊東)"라고 하였다. 개명 소식을 듣고, 그는 그 인사의 집 대문에 가서 용변을 보았다. 그 인사가 "이상재"에게 항의하자, "너는 이 똥과 같은 놈"이라며 조롱하고, 떠났다.
강연회ㆍ기독교 선교 활동을 다닐 때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헌병ㆍ순사들이 들어와, 그를 감시하고 강연내용을 주시했다. 겨울의 어느 강연에서, "개나리 꽃이 활짝 폈다"고 일갈했다. 당시 순사ㆍ헌병의 제복이 황색인 점을 착안, "개"는 황색 제복이었고, "나리"는 헌병을 조롱했던 것이다.
1918년, 무렵 YMCA의 중학부에 재학하던 "변영로"가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지 않고, 종로 거리를 걸어가노라니까 뒤에서 누군가가 "변정상(卞鼎常)씨, 변정상 씨"하고 자기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이상재"가 그렇게 부르면서 따라오는 것이었다. "변영로"는 불쾌히 여기며, "선생님. 노망이 아니세요? 아버지와 아들을 분별하지 못하시니, 아무리 우리 아버지가 선생님의 친구이기로 노상에서 이름을 부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며, 항의하였다. 그는 "이놈아. 그러면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란 말이냐. 기백이 그만하면 됐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너는 변씨 가문의 씨답게 체통을 지켜야 하며, 너희들은 한국인의 씨이니 씨알머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농담조로 가르친 것이다.
1925.02월, 손자 "이홍직"의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조선총독부 총독ㆍ일본인 경기도지사"의 축사를 대신 한국인 직원들의 낭독 이후, 내빈 대표로 축사를 낭독할 때, 그는 "여러분, 조선말 들으실 줄 아시오? 나는 일본말을 몰라서 조선말로 하오."라며, 한글로 축사를 낭독하였다.
4. 사상ㆍ신념 : 맹목적 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개화파" 출신이었던 그는 맹목적인 "현상 유지"에는 반대하였다. "대한제국"의 멸망 원인을 신문물을 거부하고, 쇄국 정책을 단행한 점을 지적했다. 우리의 것을 지키기는 지키되, 좋은 것은 지키면서,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 외국인 풍조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서로 부를 때, "긴상(김씨)ㆍ복상(박씨)"하거나, 미국식으로 "미스터 김(Mr.Kim)ㆍ미스터 박(Mr.Park)"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매우 불쾌히 여겼다. 어찌하여 한국 사람들을 제 나라 고유의 말이나 버릇대로 부르지 않고, 일본인ㆍ미국인의 흉내만 내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입을 열어, "요즘 웬일인지 상놈도 많고, 미친놈도 많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였다. "요새 일본 말이나 좀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 김상놈(김상)ㆍ박상놈(박상) 하더니, 미국 풍조가 들어와서는 어떤 사람들은 미쳤다 김(Mr. Kim)ㆍ미쳤다 박(Mr. Park) 하니까 말이지!" 그제야 무슨 뜻인지 깨닫고, 좌중은 폭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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