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국 (李康國ㆍ1906~1955?ㆍ49세)"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수석 졸업한 소문난 수재ㆍ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 중, 공산주의 이론에 입문하였다. "김수임 (金壽任ㆍ1911~1950.06.28ㆍ39세)" 간첩사건"으로 공소기록에 등장한 "이강국"은 당시 "북한의 상업성 국장"으로, "남로당"의 주요 인물이었다.
1. 이강국 (李康國ㆍ1906~1955?ㆍ향년 49세)
김수임의 정인ㆍ독일 베를린 대학교에 유학한 엘리트ㆍ이론가ㆍ북조선 정치인
• 출 생 : 경기도 양주 • 사 망 : 평양 • 사 인 : 사형 • 호 : 이촌 (耳村)
• 학 력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ㆍ독일 베를린 대학교
• 가 족 : 본처 (유부남) • 연 인 : 김수임
• 경 력 : 1945 : 조선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ㆍ약칭 건준)에 참여- 건준 조직부장ㆍ조선공산당(박헌영)과 "8월 테제" 작성으로 친분ㆍ조선인민공화국 체신부장 직무대리,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 1946.02 : 좌익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 → 1947.02 :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 → 1948.08 :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상업성 법규국장 → 1948.09~ 1953.08 :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무성 부상 (김책과 공동) → 1950.12 : 인민군 야전병원장 (제69호 병원장: 두만강 부근 소재) → 1951.11 : 무역성 산하기관으로 일반제품 수입상사인 조선상사회사 사장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수석 졸업한 소문난 수재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 중 공산주의 이론에 입문한 뒤, 독일의 베를린 대학교에 유학한 엘리트이자 이론가였다. 유학 중에는 독일 공산당에 가입해서 활동했고, 1935년 귀국하여 "함경남도 원산부"에서 노동 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체신부장 직무대리ㆍ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1946.02월 좌익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ㆍ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미군정"이 1946.05월 "조선정판사 사건"을 계기로 하여, 조선공산당 건물들을 철저히 수색하자, "박헌영" 그룹은 미군정의 전면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1946.07월 소위 "정당방위의 역공세"라면서, 합법과 비합법의 전술을 배합하는 "신 전술"을 채택하여 반격을 준비하였다.
2.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수석 졸업
1906년 경기도 양주(楊州)의 몰락한 사대부 집안에서 "이기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5년 "보성고보"를 우등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다. 1930.03월 대학을 졸업한 후, 잡지 "신흥"을 발행했으며, 1931년 "박문규ㆍ유진오ㆍ최용달" 등과 함께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창립했다. "자산 300만 원의 부호"였다는 처가의 도움으로, 1932년 "독일 베를린대학"으로 유학했다. 재학 중 "프롤레타리아 과학동맹" 등의 단체에 간여하면서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미야케 시카노스케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중심이 된 "독서회 그룹"에 독일공산당원으로 가담했으나, "나치스의 탄압ㆍ일본영사관의 박해"로 인하여, 1935년 귀국했다. 귀국과 동시에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1935.12.28일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으며, 그 와중에 잡지에 기고하는 등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이주하ㆍ최용달" 등과 원산에서 "반파시즘운동ㆍ민족해방전선"의 통일을 꾀하려고 "좌익노조"를 결성하였으며, 결국 "원산 철도국 사건(원산 민족해방전선사건)" 등으로 1938.12월 체포되어 1940년 보석으로 석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렀으며, 1943년 2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5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ㆍ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며,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벌였다.
3. 공산주의 활동: 여운형ㆍ박헌영과 친분
1945년 광복 전, "건국동맹" 관계로 "여운형"과 긴밀히 연락했으며, 광복 후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을 재개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ㆍ약칭 건준)"에 참여했다. "건준 조직부장"을 맡았지만,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전부터, "8월 테제" 작성에 간여하는 등 "박헌영"과 가까워졌다. "조선인민공화국" 체신부장 직무대리와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1946.02월 좌익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미군정이 1946.05월 "조선정판사 사건"을 계기로 하여, 조선공산당 건물들을 철저히 수색하자, "박헌영" 그룹은 미군정의 전면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1946.07월 소위 "정당방위의 역공세"라면서, 합법과 비합법의 전술을 배합하는 "신 전술"을 채택하여 반격을 준비하였다.
1946.08.25일자 "조선인민보" 기고를 통해, "미군정을 철수하고, 정권은 인민위원회에 넘겨주라! 미군은 속히 물러가라!"는 미군정에 대한 비판 기고문으로 발표하였다. 1946.09월초, 미군정은 "박헌영ㆍ이주하ㆍ이강국" 등의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09.18일 밤 9시 "평양방송" 전파를 탐으로써, 월북사실이 확인되었다.
연인으로 알려진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했다고 한다. "여간첩 사건"으로 유명한 "김수임"은 당시 "베어드 대령(미군 헌병감)"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있었는데, 미군 헌병이 운전하는 사령관 차를 "이강국"과 동승해 38선까지 검문을 피할 수 있게 해준 것이라고 전해진다.
4. 최 후
월북 후,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 1948년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ㆍ상업성 법규국장, 1950.12월 인민군 야전병원장(제69호 병원장: 두만강 부근 소재), 1951.11월부터는 무역성 산하기관으로 일반제품을 수입하는 회사인 "조선상사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휴전 무렵, "리승엽ㆍ조일명ㆍ임화" 등과 함께 정부 전복기도ㆍ테러학살ㆍ미국 첩자 혐의로 체포된 뒤, 1953년 실각하였다.
1953년, "남로당 사건"에 연루되어, "최용건"의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2년 뒤인 1955.12.10일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09월, 발굴돼 공개된 "미군정보 장교"인 "소령 조지 실리"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강국이 미군 방첩대 (CIA's covert Joint Activities Commission) 요원"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이 드러나, 기존 통설대로 "이강국"이 "김수임"을 통해 남한 정보를 수집해 간 것이 아니라, 거꾸로 "베어드가 김수임과 연결된 이강국"을 통해 북측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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