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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파- 남로당 : 이현상 (1905)ㆍ남부군 총사령관 (빨치산)

by 당대 제일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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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李鉉相ㆍ1905~ 1953.09.17ㆍ48세)"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ㆍ노동운동에 참여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ㆍ남조선로동당 활동"을 하였다.(1925년, "6ㆍ10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첫 감옥살이)ㆍ해방 후에는 남조선로동당의 간부ㆍ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파르티잔 활동을 주도했다.

 

1. 이현상 (李鉉相1905~ 1953.09.17향년 48)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사회주의자노동운동가혁명가정치가시인군인

•  출 생 :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  사 망 : 지리산에서 사살     •  사 인 : 처형 (사살)

•  묘 소 : 화장북한 애국열사릉(1968년 조성된 이현상의 가묘가 있음 북한의 제1"사증"을 추서 받은 인물이며, "애국렬사릉"에도 먼저 묻힌 인물

•  : 화산 (火山)     •  별 칭 : 큰 바위 얼굴 선생님로명선 (盧明宣)

•  학 력 : 고창고등보통학교(고창군의 사립명문) 중앙고보  보성전문학교(고려대) 법과ㆍ"보성전문"에 입학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투옥되면서, 학업은 중단

•  활 동 : 고려공산 청년회조선학생과학연구회(고려공청의 외곽 조직)신간회서울청년회   /   1933년 : "경성트로이카"결성- 이현상김삼룡이재유   /   1938- "경성콤 그룹"결성- 이현상박헌영김삼룡이관술정태식김태준   /   1946- "남로당" 결성- 박헌영이주하김삼룡이현상 등이 핵심 간부

•  : 최문기 (1972년 사망혁명열사릉에 있는 이현상의 가묘에 홀로 묻힘) 1920(16) 결혼무주군 무풍면의 유복한 집안 출신      •  : 하수복 (지리산 빨치산 간호병)- 아들 1(유복자) 이현상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사법시험응시를 포기하고 교사로 근무

•  친 구 : 유진산(1905~1974)임영신(1899~1977)동향출신으로 시신확인     •  가 족 : - 이면배 (일제강점기 초기에 "군북 면장", 이현상은 3남 중 막내아들)

•  자 녀 : 13녀   /  아들- 이극 : 모스크바 유학 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정년퇴직 후, 인민대학습당의 국제도서교환처장으로 근무   /  1- 이무영 : 중앙당학교 졸업조선인민군 정치부노동당에서 근무   /  2- 이문영 : 만경대 혁명학원 졸업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근무   /  3- 이상진 : 북한의 외교관으로 활동북한의 첫 여성 1등서기관이 되어 경공업 분야를 담당김대중의 북한 방문 때, 만수대의사당을 직접 안내

이현상

이현상의 집안은 "전주 이씨" 가문으로, "군북면"에서 가장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농이었다"고창고보"에서의 학업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며, 학적부에 따르면, "침착하며 약간 집요한 데가 있는 성격"이었다"중앙고보" 재학 중인 1926,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610 만세운동 학생시위"에 참여, 시위에 주도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1926.06.10, "거사 당일""중앙고보"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여했으며,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수형 생활을 한 끝에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이 사건으로 이현상은 중앙고보에서 퇴학을 당했다.

"고려공청학생과학연구회" 활동 중, 체포되어 2번째로 구속되었으며, 징역 4년형을 복역했다"경성트로이카" 조직 후, 서울지역의 공장파업을 조종하고, 동맹휴학을 일으키며 활동하던 중, 1933년 말에 체포되어 3번째로 구속되었으며, 징역 4년형을 언도받고, 1938년에야 출옥했다1940, "경성 콤 그룹" 조직 후,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발행하고, 전국적인 노동조직을 갖추어 가던 중, 체포되어 4번째로 구속되었으며, 복역 2년 만인 1942.10월에 ""으로 가석방되었다.

당시 20여 일간의 "단식투쟁"으로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병보석"되어 손수레에 실려 나왔다고 하는데, 가석방된 이후 "덕유산"으로 거처를 옮겨, 은둔생활을 하며 지낸다.  1947, "전평의 허성택박세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2달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이때 일제 시기, 악명 높은 고문 전문가이던 "노덕술" 등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06.25,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김원봉"에 대해 평가한 글을 게재하여, 일제 강점기 동안 보여준 "김원봉"의 비타협적 투쟁과 군사적 업적을 높게 평한 바 있다"남로당"은 이 글이 발표한 직후, "군사부"를 신설해, "유격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1948.05, 그는 "남북연석회의"가 끝난 후에도 남하하지 않고, "강동 정치학원"에 입교했는데, "" 인근 "강동군"에 설치된 학교로 "유격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관이었다.

교육을 마친 뒤, "이주하"와 함께, "단독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에 잠입해 활동할 것을 명령 받았다이현상은 월남하여 지하 활동에 들어갔다1948,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났는데, "반란군"은 거의 진압되고, 남은 부대원들은 "이현상" 지휘 아래,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되었다"강동 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남파된 "유격대""조선인민유격대의 제1병단3병단"으로 가세하였고, 통칭 "지리산 유격대"로 불리는 "이현상 부대""2병단"으로 명명되었다.

2.  이현상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최후죽음

1953.07.27, 남한 영역에 남은 "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협정 체결 1주일 후인, 08.03"평양"에서 "박헌영"이 정식으로 구속되고, "리승엽" 등은 처형되었다"남로당" 지휘 계통에 있던 "이현상""전남제주도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책임지는 "5지구당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이현상"은 모든 직책을 잃고, 하산을 계획했다거의 같은 시기, "토벌대""하동군 빗점골"에 숨어 있던 "이현상"을 추적하여 대략의 위치를 파악했다 09.17, "토벌대""빗점골"을 포위했고, 09.18일 오전11, 서남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제23연대 수색대 33명과 교전을 벌이다가, 지리산 깊은 골짜기(빗점골 합수내 너덜겅 바위)에서 사살되었다.

죽음

당시 "이현상"을 사살한 공을 놓고, "차일혁 경무관"이 이끄는 "경찰 수색대" "김종원(일본 하사관 출신여순사건 반란 진압 대대장계엄군 사령관양민 학살사건 조사 방해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연루) "국군부대"툼을 벌였고, "이태(빨치산남부군 기관지 기자)"등은 "북한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소문을 기록한 바도 있어,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 수 없다.

동향 출신의 친구인 "유진산임영신" 등 지인들이 시신을 찾아와 확인했다 그러나 "이현상"의 가족들은 대부분 월북한데다, 남은 친척들은 "한국 전쟁" , 고초를 당해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고, 유일한 혈육인 "숙부" 인수를 거부했기에, "토벌군" 측의 "차일혁" 화장하여, "섬진강" 다리 밑 "하동 송림" 주변 백사장에서 한 스님의 독경과 함께 "섬진강"에 뿌려졌다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로 이송되어, "빨치산"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창경원"도로변에서 바지만 입힌 채, 유품과 더불어 20 동안 전시하기도 했다.

3.  "이현상"

군경에 의해 사살된 "남한 빨치산의 총수 이현상"의 시신이 갈 곳이 없었다직계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있고, 유일한 혈육인 숙부가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이현상 사살"의 주역인 "차일혁 총경(서남지구전투경찰대 2연대장)"에게 "정인주 총경(5연대장)" 권유했다"차 총경, 비록 공비의 괴수로 국가를 혼란하게 했지만 그래도 한판 승부를 겨루었던 상대 아닙니까?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적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소?" "맞습니다. 비록 공비의 괴수였지만 그도 이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비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마지막 가는 길에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줍시다."

1953.10.08, "차일혁""2연대 본부" 옆에 있는 "섬진강 백사장"에서 이현상의 시신을 화장했다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 위에 유품인 염주를 올려놓았다"차일혁""칠불암"이 불에 탄 후, 부대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스님을 불러 독경을 하게 했다"이현상 시신"은 스님의 독경 소리와 함께 하얀 재로 변해갔다이따금 불어오는 강바람을 타고 하얀 재가 날렸다"지리산"에 스며 들어간 후 5년이 지나,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은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어 "섬진강 "에 흩날리고 있었다.

"차일혁"은 철모를 벗고 타다 남은 "이현상"의 뼈를 모아 담았다그리고는 "M1 소총"으로 곱게 빻아 "섬진강"에 뿌렸다다 뿌린 후 권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3발을 쏘았다. "~ ~ ~" "이현상"이 마지막 가는 길에 보내는 조사이다"지리산"에서 숨져간 수많은 원혼들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삶을 끝낸 "이현상"에게 보내는 조사였다"차일혁""이현상"의 수첩에 적혀 있던 한시를 떠올렸다.

智異風雲當鴻動 (지리풍운당홍동): 지리산에 풍운이 마침내 크게 일어,   伏劍千里南走越 (복검천리남주월): 칼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 (일념하시비조국): 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胸有萬甲心有血 (흉유만갑심유혈): 마음 속엔 끓는 피가 솟구치네.   < "이현상""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며,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창작한 한시 >

"차일혁"이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이현상"의 시체를 화장한 일이 알려지자, 일부 경찰 간부들이 시비를 걸었다"차 총경~ 빨갱이 시체를 화장해줬다면서? 그것도 중을 불러 염불까지 하게 하고화가 치민 "차일혁"은 큰 소리로 항의했다"죽은 뒤에도 빨갱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이제 지리산의 공비 토벌도 다 끝나가고 있습니다 나 역시 많은 공비들을 죽였지만, 그들 역시 같은 민족 아닙니까 내 친척일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소? 당신은 죽어서까지 공비 토벌하러 다니겠소?"

1955.04.01, "지리산" 일대에는 평화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 명의의 공고문이 나붙었다"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히 섬멸되었습니다."

4.  "차일혁 (빨치산 토벌대장)"의 수기 : 이현상 최후

"차일혁(빨치산 토벌대장)"의 수기에서 "이현상(남부군 사령관)"의 최후 장면을 살펴보면,  최후는 비참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누구의 총에 죽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이형련"의 얼굴은 더욱 새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미 치료는 불가능했다 "나중에 우리가 구천에서 만날 때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없는 곳에서 만납시다 이제는 말 안 해도 좋으니, 고개만 끄덕여 주시오나는 지도를 펴서, "이현상"이 숨어 있을 만한 몇 곳을 가리켰다"빗점골(반야봉 남쪽)"을 가리킬 때, "이형련"은 가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고개를 떨구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이형련 : 경성의전 출신해방 후, 광주 홍안과에 근무했음. 625발발 이후 전남도당에서 활동하다가 입산5지구당 기요과 부과장부위원장 "박영발"의 전속 의무관으로 있기도 했다)

"이형련"의 정보를 토대로, "서전사 사령관 실"에서 작전회의가 열리고, 작전지도가 그려졌다작전지도를 그렸던 "작전주임 한영환"은 본 작전이 끝날 때까지, 영창에 가두어둘 만큼,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했다. 전방지휘소를 "용강"에 설치하고, 본부를 "쌍계사"로 전진 배치했다"이현상"이 있다고 알려진 "빗점골""쌍계사"에서 4km 남짓한 거리였다.

1953.09.06, "5지구당 조직위원회""빗점골"에서 다시 열리고, "5지구당"은 완전한 해체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이현상"은 완전히 실권을 잃고, "반 감금상태"에 있었다09.13, "서전사 작전명령 9"가 하달되었다"빗점골"을 완전히 포위하고, 수색대를 잠복시켜, "이현상을 생포한다."는 작전이었다그러나 작전 개시일은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펴고 있던 "국군 56연대"로 인하여, 5일 연기되었다.

국군 측에서도 "전투 경찰"과 거의 동일한 모종의 정보를 입수한 듯했다09.17, "1연대""반선리(뱀사골 쪽)"에 부대를 배치하여 포위망 형성, "3연대""구례", "5연대" "함양 마천"에서 포위망을 구축, "2연대 1대대""주천"에 주둔하여 외곽 경비를, "2대대3대대618부대""용강"에 집결하여, "빗점골" 일대에 대한 작전을 개시했다.

이미 호위병도 없이, 거의 "감금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현상"이라지만, 평생을 "공산주의 운동"에 몸바쳐온 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작전 상황을 보고 받았다다음날인 09.18일 오전 11시경, "수색대"로부터 전과보고를 받았다"연대장님 어젯밤에 전투가 있었고, 방금 일대를 수색하다가, 늙은 공비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어제 야간전투 중 총에 맞아 죽은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등에서 가슴까지 관통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은 것 같습니다"이현상""7인조 호위병"이었던 "김진영김은석""선생님 죄송합니다."하고 시체를 부등켜 안고 울었다. "이현상"이었다. "이현상 시체""쌍계사"에 설치된 "연대 지휘부"에 옮겨 놓았다.

지금 내 앞에 누워있는 이 자가 바로 "이현상"이란 말인가전방 "지휘소장 김억순 작전과장"에게 보고하니, 너무나 충격이 컸던지, 계속하여 몇 번이고, 틀림없는 "이현상 인가?"를 나에게 되물었다그동안 많은 군경들이 이 자에게 희생당하고, "지리산 골짜기"마다 이 자를 잡기 위해, 이 잡듯 샅샅이 뒤졌으나, 자기를 포획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듯이 신출귀몰하여, 군경을 비웃던 "이현상"의 시체를 보자, 감개무량했다.

"이현상의 시체"40대 후반의 "중늙은이" 모습이고, 줄이 선 "미제 군복바지""군용 농구화"의 깨끗한 차림의 외양이었다군복 안에는 "일기"와 한시가 적힌 "수첩""가래(호두와 비슷)"가 있었고, 주머니 속에서 "염주" 나왔다. 그리고 허리춤 깊숙이 "소련제 권총"이 들어 있었다."빨치산 총수"였던 "이현상"이 손놀림을 위해, "가래"를 지닌 것은 이해되었지만, "염주"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의외였다.

5년이 넘게 "빨치산"으로 이 산 저산을 누비며, 신출귀몰하다는 소리를 듣던 그였다북에 있던 동지들이 대부분 숙청당하고, 외로이 "지리산"에 남아, 투쟁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던 것일까나는 그의 손때가 묻은 "가래""권총"을 왠지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오랫동안 겨루어 보고 싶었던 적이었지만, 그가 사살되고 나니, 오랜 친구가 멀리 떠나버린 것처럼 허전해,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며 간직하고 싶었다.

나는 "김용식"을 불러, "이현상"의 유품에 "권총이 있었다."는 것을 비밀에 붙이도록 하고, 다른 수대원들에게 "권총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설치 않게 했다나는 우리 수색대가 "이현상"을 죽이지 않았다면, 과연 누가 그를 죽였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그는 "평당원"으로 강등되어, 거의 "감금상태"에 있다가, "경남도당"으로 이송되어 가던 중에 사살 된 것이라면, 과연 누가 그를 죽였을까? 근처에서 "국군 56연대 수색대"도 우리와 함께 작전을 했었는데.

나는 "빨치산 내부에서 이현상을 죽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박헌영이승엽"의 몰락으로 "이현상""5지구당"이 해체되고, "이현상""평당원"으로 강등되어, "호위병"과 격리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현상"의 주위에는 일부 자신의 추종자들을 제외하고는 온통 "" 뿐이었다. 북한에서도 "박헌영"을 숙청했는데, 그의 심복이었던 "이현상"을 그냥 둘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러나 시체가 되어버린 "이현상" 만이 알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시원스럽게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09.20, "김억순 작전과장"은 공로를 내세울 양으로, "이현상"의 시신과 유품을 가지고 "경무대" 향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죽은 이현상은 보지 않겠다."고 했다"이현상의 시신"이 명동에 소재한 "경찰병원"에 며칠 안치되어 있는 동안, 그의 "보성전문" 동창들이 확인하였다. 고향 친구며, 정치인인 "유진산"이 그의 시체를 찾아와 "현상아, 너도 늙었구나."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갔다이후 "이현상의 시체""창경원"에서 그의 유품과 함께, 일반시민에게 공개되었다.

09.23, "하동 화개면장 하병기"씨를 비롯한 많은 "화개면민""2연대" 전원이 "화개국민학교"에서 열린 "이현상 사살 기념식"을 가졌다. 한편 "이현상 사살 공로"를 두고, 경찰과 국군은 서로 공을 주장했다경찰과 국군의 공로싸움은 치열했지만, 그것을 가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서전사남경사"의 공로싸움은 점차 "내무부국방부"의 갈등으로 번져 급기야 "내무부방부 합동 진상조사단"까지 구성돼 공로를 가리게 되었다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이현상 사살"에 대한 공로다툼은 "합동 진상조사단"의 조사로도, 매듭짓지 못하다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경찰의 공"로로 결론지어졌다.

"창경원"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던 "이현상의 시신"은 다시 "하동 화개장"으로 돌아왔다"이현상의 시체""이현상의 숙부"조차 역적이라며, 인수를 거부했다나는 한동안 시체 처리에 고심했다. "숙부"조차 인수를 거부해, 나로서도 난감했다10.08, 나는 "2연대 본부" 옆에 있는 "섬진강 백사장"에서 "이현상 시체"를 화장했다그의 유품인 "염주"도 함께 화장했다. 나는 "칠불암"이 소각되고, "주지"가 피살되어 갈 곳이 없어 우리 부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스님"에게 독경을 부탁했다.

나는 "이현상의 뼈"를 내 "철모"에 넣고, "M1소총"으로 빻아, "섬진강" 물에 뿌렸다그리고 "권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3발을 쏘았다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붙이는 나의 "조사(弔辭)"였다한 많은 그의 인생은 한 줌 재가 되어, "섬진강"을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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