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승엽 (李承燁ㆍ1905~1954ㆍ49세)"은 1950년, "6ㆍ25 한국전쟁" 중,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장"으로 재직했다. 당시 서울에 남아있던 미처 피하지 못한 민족진영 인사인 "김규식ㆍ안재홍ㆍ정인보ㆍ방응모ㆍ김용무" 등의 납치를 지도했다. 1940년, "대화숙"에 가입하고, "식량배급조합 이사"를 지낸 적이 있었기에, 친일 활동을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 리승엽 (李承燁ㆍ1905~1954.07.30ㆍ향년 49세)
박헌영의 최측근ㆍ일제 강점기 친일 사회주의 운동가ㆍ북조선 정치인(최고인민회의대의원ㆍ인민검열위원장)ㆍ조선공산당 창설에 관여ㆍ조선로동당 초대 정치위원ㆍ노동운동가ㆍ언론인(기자)
• 출 생 : 경기도 부평군 (원적지는 부천군) • 사 망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사 인 : 사형
• 학 력 : 인천고등상업학교 중퇴 (3ㆍ1운동 가담으로 퇴학)
• 경 력 : 1924 : 조선일보 기자 → 1931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시, 일경에 체포 (4년간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 1937 : 조선공산당 청년동맹 사건으로 체포(1939년까지 복역) → 1946 : 남조선노동당 경기도 책임자ㆍ남조선노동당의 기관지 "해방신문" 주필 → 1948 : 로동당 비서ㆍ초대 사법상ㆍ국가 검열상ㆍ당 제2비서 → 1950 :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장으로 재직ㆍ조선공산당 인민검열위원장 → 1951 : 노동당 비서 (박헌영의 후원) → 1952 :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ㆍ금강 정치학원 사건으로 반당종파행위로 재판에 회부
2. 3ㆍ1운동에 가담
경기도 부평에서 가난한 뱃사공의 아들로 출생하였고, 인천부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뱃사공으로 일을 하다가, 나중에 여인숙을 운영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도 인천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인천고등상업학교" 재학 중, 1919년 3ㆍ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에 처해졌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3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이후 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열악한 근무 환경에 분개하여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3년, "조선공산당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1924년, "제1차 조선공산당" 창건 작업에 참여하였고, 9월 "조선일보"에 입사해 기자가 되었다. 1925.09월, "화요회" 계열의 주도로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였으며, "조선일보"를 사직했다. 이후 노동운동을 하며,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 위원"을 역임하였다. 1926년, "공산당" 조직관련 혐의로 "조선총독부"에 피체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30년, 부산에서 "박장송ㆍ안영달ㆍ김형윤" 등과 함께 지하에서 "전조선 피압박ㆍ․ 피착취 계급에 격(檄)함" 이라는 전단을 제작ㆍ배포하려다 검거되어, "부산반전반제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1931년, "박헌영ㆍ김단야"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했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4년간 복역하였다. 1937년, "함남 함흥"에서의 "제4차 조선공산당 청년동맹 사건"으로 붙잡혀, 1939년까지 복역하였다. 1941년, "대화숙"에서 활동하면서, 친일파로 변절했다.
3.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과 정치 활동
1945년, "8ㆍ15광복" 직후, "장안파 공산당 제2비서"가 되었으나, 08.16일 "박헌영"이 귀환하여 통일재건 "조선공산당" 재창당시, "박헌영 계의 재건파"와 합류하여 활동했으며, "재건파 공산당"으로 건너가 정치국 국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건국준비위원회"에도 가담했다. 1945.09월, "재건파 조선공산당 정치국원"에 선임되고,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대리"를 지냈다. 1946.01월, "조선인민공화국"이 해체되자, 2월 "민족주의민족전선"에 가담하였다.
이후 "조선공산당"이 "조선인민당ㆍ신민당" 등과 통합하여 "남조선로동당"의 창당 조직에 참여했다. "남로당"이 창당되자,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1946년 "남로당" 경기도 책임자가 되었고, 이어 "박헌영"으로부터 "남로당" 기관지 성격의 신문인 "해방신문" 주필자리를 넘겨받아, 활동하였다.
4. 월북
1948년 초,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는 "김일성"을 따라 남하하여, 06.28일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서울시장"이 되어, "서울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장"으로 재직했다. "조봉암"을 변절자로 규정하여, "처벌한다"는 벽보를 붙이게도 했다. "박헌영"의 후원 하에 1951년 "노동당 비서"가 되었고, 1952년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남로당"계를 제거하려던 "김일성"의 견제를 받아오다가, 1952.10월에 유격대 양성기관인 "금강 학원"이 정부 전복을 도모했다고 하는 "금강 정치학원 사건"이 빌미가 되어, 체포되었다. 1953년, "반당종파분자"와 미국간첩 혐의를 받고, "반당종파행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53.03월,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1954년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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