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야 (金丹冶ㆍ김태연(金泰淵)ㆍ1901~1938ㆍ37세)"는 동지인 "박헌영"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박헌영"이 죽은 줄로만 알던 "주세죽(박현영 부인)"에게 박헌영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주세죽"과 3번째로 결혼했다.
1. 김단야 (金丹冶ㆍ김태연(金泰淵)ㆍ1901~1938ㆍ향년 37세)
독립운동가(사회주의 계열)ㆍ언론인ㆍ고려공산당 당무위원ㆍ1920년대, "삼인당(三人黨 : 박헌영ㆍ임원근)"이라고 불리며, "공산주의 활동" ㆍ1925.10.15일,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17명의 기자를 해직시켰는데, "김단야ㆍ 박헌영ㆍ임원근"도 해직당했다. 큰 키에 가는 몸매ㆍ성격도 사교성이 풍부해 외향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기자 재직하면서, 글 쓰는 솜씨는 뛰어난데다, 밝은 성격에 재치가 넘쳐 동료 기자들에게 인기가 좋았으나, 퇴근 후 동료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 출 생 : 경북 김천 • 사 망 : 소련 모스크바 • 사 인 : 처형 (총살형) • 처 : 이상분 • 자 녀 : 1남 1녀
• 2 혼 : 고명자 (高明子ㆍ1904~1950(?)ㆍ46세(?)ㆍ충남 부여) • 3 혼 : 주세죽 (朱世竹ㆍ1901~1953ㆍ52세ㆍ함남 함흥)
1932년, "일제 밀정"으로부터 밀고 받은 "일제 경찰"에 검거령이 내려졌다. "상하이"에서 같이 활동하던 동료 "박헌영"은 끝내 "일경"에 잡혔고, 그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김단야ㆍ주세죽"은 도망쳤다. 그 후 "김단야"는 "주세죽"과 "소련"으로 망명하였고, 1934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 해 "김단야"는 동지인 "박헌영"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박헌영"이 죽은 줄로만 알던 "주세죽(박현영 부인)"에게 박헌영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주세죽"과 3번째로 결혼했다. "김단야"에게는 고향에 본처가 있었고, 2번째 부인은 같은 운동가였던 "고명자"이다.
1937년에 접어들면서 "김단야"는 "당 재건운동"에 뛰어들 기회를 다시 맞게 되는데, "코민테른"이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여, "당 사업"에 나서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갑자기 "소련 정보기관"에서 "우리가 갖고있는 정보자료에 따르면, 당 사업을 위해 그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그에게 통보한다.
그리고 1937.11.05일, "소련 내무 인민부"는 그를 느닷없이 체포해 버렸다. 그를 "간첩"이라고 "소련 정보기관"에 투서한 인물은 "김춘성"이란 가명의 조선인이었다. "김춘성"은 "조선공산당 간부 김철수"가 만든 "조선공산당 제3차 집행부"의 일원이던 "제주도 출신 이성태"라고 추측되고 있다. 그 투서에는 "김단야" 뿐만아니라 "박헌영ㆍ조봉암ㆍ김찬ㆍ김한" 등 당대 공산주의 최고 지도자들이 모조리 "일제의 간첩"이라고 매도당했었던 때였다.
한편, "소련 정보기관"에 체포당한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에서 "일제의 밀정"로 내몰렸다. 이어 변호사도, 반론권도 없이, "소련 최고 인민재판소 군사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되었고, 재판소는 그에게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반혁명테러 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는 어떤 변호도 받지 못한 채, 이듬해 1938.02.13일에 처형당했다.
2. 한의사의 아들ㆍ일본으로 유학
"경북 김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한때 "한의사"로 가세를 일으켰다 한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부터 "한의사 자격"을 빼앗겨 농민이 되었다고 한다. 6~7살 때, 서당에서 2년 동안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1914년, 보통학교를 마칠 때까지 여느 아이와 다름없는 평범한 생활을 지냈다고 한다. 1915년, "개신교(장로교)학교"인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면서, 조금씩 새로운 의식에 눈뜨며 "식민지 아들"로서 "이유 있는 저항"을 시작했다.
"미국인 교장(장로교 선교사)"과 조선 학생을 일삼아 때리던 일본 선생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앞장섰다가 1916년 12월 퇴학당했다. "개신교 신자"였던 가족들은 "개신교 선교사"를 반대하는 동맹휴학으로 그가 제적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학비를 대주었던 가족들은 앞으로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에 1917.01월, 어머니한테만 살짝 귀띔하여 조그만 여비를 받아 들고 "일본 도쿄"로 떠났다. "도쿄 세이고쿠(正則) 영어학교"를 다니면서, 야간 수업료를 마련하려고, "우유배달부ㆍ신문팔이ㆍ사탕팔이" 등을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1917.08월, 아버지로부터 "학비를 지원해 줄테니, 돌아오라"는 편지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고, 그해 9월, "경성부의 배재학교"에 입학했다.
3. 1920년대, 삼인당(三人黨) 활동 : 박헌영ㆍ임원근ㆍ김단야
일찍부터 "학생 운동"에 뜻을 두어, "배재학교" 재학 중 "3ㆍ1운동"에 참가하였고, 3월 말 고향 "경북 김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김천지회"에서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그 뒤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 활동을 했으며, 경찰의 추적을 피해 12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박헌영ㆍ임원근"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은 "삼인당(三人黨)"이라 불리면서 같이 활동하게 된다. 활동 무대를 "상하이"로 옮긴 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화요파 트로이카ㆍ화요 3인조"로 불리던 "박헌영ㆍ임원근"과는 "고려공산청년회ㆍ화요회ㆍ신흥청년동맹"에서 함께 활동한, 가까운 동지 사이였다.
1922.01월, "모스크바"에서 "원동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을 때, "박헌영ㆍ여운형ㆍ김규식ㆍ이동휘"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다. "여운형ㆍ김규식ㆍ박헌영" 등과 "몽골"까지 자동차로, "몽골"에서는 마차ㆍ열차로 "소비에트연방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 대회가 끝나고 1922.02.20일 그의 삶에 가장 감명을 준 "레닌"과 회견하게 된다. 그는 "극동청년대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 17명과 함께 "레닌"을 만났고, 이 짧은 만남은 그가 "사회주의 사상"을 확고히 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ㆍ상하이ㆍ국내"를 오가면서 활동했고, 1922.04월에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옮기려고 입국하다가, "박헌영ㆍ임원근"과 함께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는다.
4. 조선일보 기자 재직
1924.01월, 출옥하여 고향 "경북 김천"에서 요양하다가, "조선일보 기자"로 취직했다. "조선일보"에 "레닌 회견 인상기" 등을 싣는 등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박헌영ㆍ임원근"과 함께 비밀리에 "화요파"에 가담하여 활발하게 사회운동을 했다. 여러 활동 가운데 그가 힘을 쏟은 것은 1925.04.18일에 닻을 올린 "고려공산청년회"였다. 이 공청에서 "박헌영"은 "책임 비서"였고, "김단야"는 "조사부"를 맡았으며, "주세죽"은 "후보위원"이었다.
그러나 1925.09월 초, "서울청년회" 계열 출신으로 "조선일보 논설위원" 활동하는 "신일용(辛日鎔)"이 "필화 사건"을 일으켜,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에 압력을 넣게 되면서 "조선일보"는 09.08일자로 정간되었고, 윤전기까지 압수되었다. 윤전기를 쥔 "총독부"는 진보적인 신문기자들을 해고시키지 않으면 신문을 내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조선총독부"의 해고 압력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은 "조선일보"내 보수적인 기자들이었다. 보수적인 기자들은 "북풍회(사회주의 단체)" 소속 기자들과 연대해 "총독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적 성향의 "홍증식 기자"를 중심으로 한 "화요회 계열" 기자들은 "총독부"의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
5. "6ㆍ10 만세운동" 활동ㆍ1930년대 활동
1925.10월,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뒤, "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와 연락하기 위해, 1925.12월 2번째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1926.01~ 07월까지 "불꽃(火花ㆍ조선공산당 기관지" 주필이 되었다. 또한 "조선공산당 해외부" 설립에 참여했으며, 국내 공산당의 재정을 조달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였다. "상하이"에서 기관지 "콤뮤니스트"를 발행했고, 1926.04월, "순종 사망" 소식을 듣고 격문을 만들어 국내로 보내면서 "6ㆍ10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하였고, 노동자 파업 운동을 주동했다.
1929년, "모스크바"에서는 "국제 레닌학교"를 졸업하고,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두원"등과 함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근거하여, "당 재건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고, 같이 국내로 들어왔다. 1929.11월, "박민영ㆍ권오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직부를 담당했다. 그러나 1930.02월, "일경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검거망을 피해 국내를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9월에 "상하이"로 활동무대 옮기면서, 잡지 "콤뮤니스트"를 발간하면서 반제국주의 운동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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