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朴憲永ㆍ1900~1956ㆍ54세ㆍ김일성과 12살 차이ㆍ서자 출신)"은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랫말의 주인공ㆍ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ㆍ남조선로동당"의 당수로 활동하였고, "좌우 합작 운동"을 무성의하고 무원칙한 야합으로 간주하여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남북협상"에는 참여했고, 1948년 월북 이후, "북조선"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 박헌영 (朴憲永ㆍ1900~1956ㆍ향년 54세ㆍ김일성과 12살 차이ㆍ서자 출신ㆍ161cm)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ㆍ마르크스-레닌주의자ㆍ반기독교 운동가ㆍ노동운동가ㆍ혁명가ㆍ언론인
• 출 생 : 충남 예산군→ 서자(庶子)로 출생 (몰락한 양반 가문) • 사 망 : 평양 변방 야산기슭 (구체적인 처형시점ㆍ처형장소도 확인된 바 없다) • 사 인 : 숙청 (한국전쟁을 패전으로 몰고 간 미국제의 간첩 스파이ㆍ반당종파분자) • 처형 연도 : 1955년 설ㆍ1956년 설ㆍ1958년 설 등 • 처형 시점 : 07.19일ㆍ12.15일ㆍ12.19일ㆍ07.19일 (박헌영 처형 시, 방학세 일행과 같이 타고 간 박길룡 증언)
• 호 : 이정 (而丁ㆍ而靜ㆍ인민의 고무래)ㆍ이춘(而春) • 별 칭 : 조선의 레닌ㆍ암흑 속의 별ㆍ비운의 혁명가
• 가 명 : 이두수ㆍ이 춘ㆍ왕양옥ㆍ박건일ㆍ김성삼 • 학 력 : 경성고등 보통학교 (현, 경기고등학교)
• 처 : 주세죽(1처ㆍ1921~1933ㆍ1901~1953ㆍ박헌영이 죽은 줄 알고, 김단야와 재혼(1933~1937)→ 정순년(2처)→ 이순금(내연녀ㆍ이재유(저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의 처ㆍ오빠 이관술)→ 윤레나(3처)
• 자 녀 : 박 비비안나 (박영ㆍ1928~ ㆍ발레리나ㆍ대학교수) / 박병삼 (승려ㆍ법명- 원경) / 박 나타샤 (생사 불명)ㆍ박 세르게이 (생사 불명)
• 수 상 : 1950.05.27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 지주 "박현주의 서자"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약하였으며,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으며, "고려공산 청년회"의 주요 인사였다. 투옥ㆍ출옥을 거듭하였으며, 수감 중 1번도 동료ㆍ조직책을 누설하지 않았다.
1919년, "잡지 여자 시론"에서 기자로 단기간 근무하였고, 1924~1925년 "동아일보ㆍ조선일보"의 사회부 기자로 활약했다.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사업을 위해, "상하이"로 파견된 1932.01~ 1933.07월까지는 "김단야"와 함께,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 조선위원회" 기관지 "콤무니스트 지"를 발행했다.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을 갖고 있었던 그는 조선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의 발간ㆍ감수 등에 직접 관여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으며, 일제에 의한 5번에 걸친 "조선공산당" 탄압 이후, 당이 해체되면서, 1927.12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및 한국인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체포ㆍ수배ㆍ도피ㆍ은신 중에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1927년 재판에서는 "당의 조직과 당원을 진술하라"는 가혹한 고문ㆍ폭행을 당하면서, "광인"이 되어 "인분"을 먹고, 소리를 지르는 등 행동으로 "정신이상자"로 풀려나기도 했다. 1930년대에도 계속 "조선공산당"의 창당ㆍ조직 활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1940년 이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광주"의 벽돌ㆍ기와 공장의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지하 활동을 통해, "공산당 조직 재건 운동"을 지도하였다.
1945년 이후, 해방 정국에서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뒤, "건국준비위원회ㆍ민주주의 민족전선" 등에서 "좌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1948년에 월북했다. 그러나 "소련ㆍ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우고, "북조선분국"을 중심으로, "북조선 로동당"을 창건한 뒤, "당대 당의 통합"으로 "조선로동당"이 되면서, "박헌영"이 조직한 "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다. 1948.04월에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1948.0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뒤에, "부수상 겸 외무장관" 등을 지냈으나, "김일성"에 의해, "한국전쟁을 패전으로 몰고 간 미국제의 간첩"이란 이유로 숙청ㆍ희생되었다. 1953.07.27일, 남한 영역에 남은 "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 체결 1주일 후인, 08.03일 "평양"에서 "박헌영"이 정식으로 구속되고, "리승엽" 등은 처형되었다.
2. 성격ㆍ사상
인민의 고무래 - 평등하고 자유로워져, 행복한 불을 지펴야 되는 "인민의 아궁이"를 꽉 막고 있는 세력의 "잿더미"를 긁어내는 "고무래"가 되겠다. 토지 분배관 : 지주 가문의 서자였지만, 토지는 실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봤다.
신장은 161cm로, 왜소한 체구에 근육이 적은 체형이었으며, 기억력이 비상했다고도 한다. 고집이 강하고, 굳건한 마음을 가졌으며,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술ㆍ담배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론가이자, 치밀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취미는 요리하는 걸 좋아했었고, 솜씨도 뛰어났다고 한다.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는 성격이었다."여운형" 계열에서 "리강국" 등을, "장안파 공산당"에서는 "리승엽ㆍ임화" 등을 빼와,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고, 이들은 1953년 처형될 때까지, "박헌영"을 따르고 신뢰하였다.
②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랫말의 주인공 : 한국인이 가장 애창하는 가요ㆍ일제강점기 "민족의 노래"
국민가수 "김정구 (金貞九ㆍ1916~1998ㆍ82세)"가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의 주인공
1928.08월, "박헌영"은 만삭의 아내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감행하였다. 그의 탈출 소식은 조선 민중들에게 빅뉴스였으며, 모두가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1928.08월, "김용환"은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두만 강변"에 있었는데, 이때 "박헌영"의 탈출을 도와주고 그 감회를 노랫말로 만들어, 동생 "김정구에게 부르도록 하였다. "두만강 푸른 물에~ 그리운 내 님이여~"에서의 "내 님"은 다름 아닌 "박헌영"이었던 것이다.
1925.04.17일, "조선공산당"이 창당되고, "박헌영"은 산하 "고려공산 청년회"의 책임비서가 된다. 1925.11.25일에 터졌던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11.29일, "박헌영"은 아내 "주세죽"과 함께 "경성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됐다. "박헌영"이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당시 "상하이"에 체류 중이던 "여운형"에게 보내려던 보고서가 "일제의 밀정"에 의해 발각되어, "조선공산당"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체포ㆍ구속되었다. 그에게 "일왕에 대한 반역 혐의ㆍ공산당 정당 조직ㆍ폭력ㆍ선동 혐의ㆍ노동자 파업 독려 혐의" 등이 부과되었다. 수감 후, 악랄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으나, "박헌영"은 조직책과 동료들의 은신처를 끝까지 비밀에 부쳤다.
"주세죽"은 약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박헌영"은 열차편으로 "경성"으로 압송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김병로ㆍ이인ㆍ허헌" 등 "항일변호사"들이 무료변론을 자청했다.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된 그는 몇 차례의 병보석 신청 결과, 1927.11.22일 "정신병자"로 병보석을 얻어 석방되었으며, 석방 직후 아내 "주세죽"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섭다고 도망치기도 했다. "박헌영"의 몰골을 본 "상록수"의 "심훈"은 탄식했다."눈을 뜬 채 등골이 뽑히고,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으니, 그의 아내가 안은 것은 남편의 잔해(殘骸)였다."
3. "박헌영(당시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이 아닌, "김일성"이 낙점된 이유
"박헌영(당시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소련 군부"가 북한의 지도자로 "박헌영ㆍ김일성"을 택일하는 문제를 결정한 무렵인 1946.07월 말, 그가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 "스탈린"이 두 사람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낙점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이 "박헌영"을 지명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① 이론적으로 준비된 인텔리였으나, 1928년 해체된 조선공산당원으로 종파 활동을 한 경험이 있으며, ② 일제하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며, 10여 년 동안 3차례 투옥 생활을 하면서도 살아남은 것으로 보아 그 과정에서 일본에 전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③ 북한 대중에게는 박헌영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서울"로 돌아와 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은 전략적으로 실수했다. 남한의 우익과의 투쟁에 몰두하는 동안에 이미 탈진해 있었으며, 신진 공산주의자인 "해외파", 특히 "코민테른"과의 연계ㆍ배려를 소홀히 한 것이 실수였다.
고전적 공산주의자인 그는 이 점에서 순진했으며, "김일성"을 너무 낮고 어리게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박헌영"은 전술적으로 실수했다.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이 한국 정치의 중심지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서울에 집결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생존하지 못하고 월북했을 때, 그것은 이미 늦었다. 현지 기반이 없는 그들은 "국외자"에 지나지 않았다.
4. "여운형 암살" 배후 의혹ㆍ프락치 활용
한때의 동지였던 "여운형"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여운형" 주변에 "프락치"를 심어두고 감시하였다. "김규식" 주변에도 "프락치"를 심어두었다. 그가 심어둔 "프락치" 중, "권태양"은 "김규식의 비서"로 채용되어, "삼청장"의 핵심부로 진출하였으며, 이들은 "삼청장"과 "김규식" 주변의 정보를 빼내 그에게 전달하였는데, 그가 "김규식"에게 보냈던 프락치 중 "권태양"은 노선을 변경하여, "성시백(김일성의 부하)"의 공작원이 되었다. 2007년, 이정식은 "당의 주도권을 놓고, 여운형과 다투던 남로당의 박헌영 계열이 암살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2개월 뒤, "존 하지 사령관"은 서울을 방문한 "미국 육군차관 드레이퍼"에게 보고하기를, 6월 말까지 북한 공산당은 여운형을 "미군정과 연탁한 배반자"라고 맹공격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그를 추도하겠다는 등 야단을 부렸다고 한다. 1945.05월,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만들어, "좌우합작"에 반대하는 "남로당"과 갈라서자, 한 "남로당" 간부는 소련에 보낸 보고서에서, "여운형은 반동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로당과 투쟁하고 있다"고 비난할 정도로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미군정"은 "남로당"과 결별한 "여운형"을 "공산 세력에 역공을 가하는 카드"로 활용하려 했다. 암살 당일, "여운형"은 "미군정"이 제의한 "민정장관" 자리를 받아들일 예정이었다. "공산 진영"이 "장식용 황금도끼"라고 조롱했던 "여운형"이 그들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로 변할 우려도 함께 갖고 있었다.
"여운홍(여운형의 동생)"도 "박헌영"을 "여운형 암살"의 유력 용의자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여연구(여운형의 둘째 딸)" 역시 "박헌영"의 부하들의 개입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여운홍"은 해방 정국에서 "좌파에 의한 테러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여운홍"은 후일 "여운형"의 암살과 관련, "좌파"에 의한 테러를 지적하기도 했고, "여연구"는 부친을 암살한 것이 "종파분자들"이라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종파분자"는 "박헌영 계열"을 가리킨다.
이정식 교수는 이를 근거로 "남로당 계열" 등 "박헌영 계열이 암살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박헌영"은 정치테러를 할 만한 실력 행사 능력을 가지지 못했고, 1946.0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체포령이 내려져, 9월 "총파업 시기" 비밀리 월북해, "북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 상황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연구자에 따르면, "여운형 암살 당시 여연구는 모스크바 유학 중이라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며 "당시 수사당국은 좌파 한지근이 범인이라고 밝혔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박헌영"의 소행이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반면에 "김일성"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박갑동(박헌영 비서ㆍ남로당 지하총책)"에 의하면, "여운형ㆍ김일성"은 공산당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공동의 적인 "박헌영"을 타도할 목적으로 손을 잡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자금지원을 중단했다"고 한다. 이에 "여운형"이 "김일성"을 비난하자, 모의내용이 탄로 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이 여운형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박갑동"에 의하면, "김일성"은 월남한 반공청년으로 위장한 "한지근"을 남파시켜, 자연스럽게 우익청년조직인 "백의사"에 접근토록 하여, "여운형"을 암살하였다는 것이다. 체포된 "한지근"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 때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 박갑동은 "이러한 근거들은 미국자료에 의하면, 여운형의 진짜 암살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나와 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말한 "미국 자료"를 밝히지 않았으며, 어떤 연구자도 이자료를 찾아내지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는 "정병준 교수"는 "어떤 자료에도 미군정이 여운형 암살에 조직적으로 개입했었다는 정후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썼다. 동아일보 사장인 김학준은 "여운형과 김일성의 관계에 미뤄, 김일성이 여운형을 암살했다는 박갑동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라고 썼다.
5. "김규식"과 비교
"심지연 교수(경남대 역사학과)"는 "김규식(金奎植)ㆍ박헌영(朴憲永)"의 퇴장을 비교하였다. "김규식ㆍ박헌영"은 "이론가ㆍ합리주의자ㆍ냉철하다ㆍ샌님과 같다"는 공통된 이미지를 지녔다. 그러나 "김규식ㆍ박헌영"은 1945년 이후 서로를 적대시했다. "심지연 교수"에 의하면, 한 인물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시대정신이 대두되고,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아름다운 퇴장과 개인의 파멸은 물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볼썽사나운 퇴장"으로 나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김규식은" 전자요, "박헌영"은 후자다.
"김규식"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려 노력한 반면, "박헌영"은 독선적이고 모험주의적인 전략ㆍ전술로 일관하였음을 양자의 차이점으로 지적했다. "김규식"은 해방정국에서 정치세력의 통합을 모색하기 위해, "좌우합작"을 시도했고, 민족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국내외의 역학관계상 합작이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 지난한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추구하는 것이 시대정신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국이 자신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자, "김규식"은 주변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계를 떠났는데,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걸은 인물이 "박헌영"이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일제시기의 비밀주의를 답습하는가 하면, 젊고 유능한 새 인물을 기용하는 대신, 소수의 파벌 위주로 당을 운영했다. "좌우합작"을 파탄시켰고, "좌익진영"의 통합을 위해 물러나야 했을 때, 오히려 전면에 나섰다. 당내에서 비판이 일자, "정당방위의 역공세"라는 논리를 펴며, 총파업ㆍ항쟁을 주도했다. 이처럼 독선적이고, 모험주의적인 전략ㆍ전술로 일관하는 바람에, "박헌영"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노선을 따랐던 수많은 조직ㆍ조직원들이 파멸하는 사태를 빚고 말았다.
6. 인품ㆍ유흥ㆍ종교관
① 인품
1920년대, 이후의 국내외 공산주의 서신이나 이론을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는 "이론적 지식"이 해박한 편이었고, 1945.08월 "테제" 등은 그가 직접 작성했던 것이었다. 또한 "미국 유학"을 꿈꾸고 영어 공부를 하였으나, 학비를 마련할 수가 없어서, 미국유학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영어는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기초적인 수준의 일본어ㆍ러시아어를 구사하여, 별도의 통역 없이도 직접 외신 기자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체육 보다는 독서ㆍ명상을 즐겨했는데, 이 때문에 "김일성은 그를 이론가라고 농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적으로 돌변한 뒤에 "이론가"라는 칭호는 (사변적인 지식인이라는)경멸적인 의미로 많이 활용되었다.
"박갑동(박헌영의 비서)"는 그를 "단단한 표범과 같은 인상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박갑동"은 "그와 처음 악수를 하며 느낀 인상은 "표범과 같이 단단하고 민첩한 사람"이라는 그런 것이었다. "싸늘하게 웃는 풍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 같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와 직접 가까이 접촉할 때까지 박헌영 이라는 사람은 공산주의 투쟁 밖에는 모르는 편협하고 무서운 사람인 줄만 알았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풍골이 뛰어나게 잘생긴 영웅 형은 아니며, 또 순간적으로 대중을 감동시키는 웅변가도 아니며, 초면인 사람을 한번 만나 자기 편으로 만드는 그런 매력적인 힘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과장된 행동과 과잉 반응을 거부했고, 이는 정치인으로서는 다소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세심하게 배려하며 생일과 가족들의 행사까지 사소한 것도 기억하고 챙겨주기도 했다. 또한 종종 그의 곁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폭넓고 상식이 풍부하며 일반에 알려진 것같이 그렇게 괴팍스런 인간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때는 해방 전에 지하로 도피생활을 할 때 자신이 손수 끓여 먹던 찌개 이야기를 구수하게 늘어놓아 주위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게 한 일도 있다."
"정진숙(을유문화사 창업주)"에 의하면, 이상백을 통해 만난 박헌영은 "시골 샌님"같았다고 회상하였다. "박헌영"도 자신이 한 번에 쉽게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매혹적이지 못한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다. "박갑동"에 의하면, "박헌영의 풍모에서 풍기는 단단하고 차가운 인상이 다소 대중 정치가로서는 결정적인 마이너스가 된 것을 자신도 알고 있는 듯 했다."고 진술하였다.
② 유흥ㆍ놀이의 문외한
"유흥ㆍ놀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이런 점은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취약점으로 작용하였다. "김일성"은 "소련 대사관"을 자주 찾아가, 함께 술도 마시고, 당구도 즐긴 반면, "박헌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박헌영"은 남한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 점도 "소련"이 그 대신 "김일성"을 선택하는 요인이 됐다.
"스티코프(당시 연해주 군관구 정치위원)이 보낸 보고서에는 "김일성은 골수부터 뼛속까지, 소비에트 사람이며, 자식들이 우리나라(소련)에서 태어난 빨치산"이라고 적혀 있다. "스티코프"에 의하면, 당시 "박헌영"과 같은 "남로당" 지도자들은 남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 관계자"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던 반면,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관저,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 자주 놀러와, 술을 함께 마시고, 당구를 즐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교육 정도가 낮은 것이 문제가 되어, "소련 군정"은 재소 한인들을 불러, "김일성"에게 "당과 정부 운용 방침"을 교육시켰다.
③ 종교관
"기독교"를 "침략 제국주의의 아편"으로 보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였다. 1919년, "상하이"에 도착하기 이전까지는 교회에 출석하였으나,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반기독교적인 입장"에 섰다. 이후 그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교육ㆍ의료시설ㆍ구호 사업 등을 빌미로, "조선인"에게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침략의 도구ㆍ제국주의의 아편"으로 규정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심취한 그는 늘 "종교는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 아편"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하곤 했다.
특히 "기독교"는 "종교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종교"라고 평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이자, 억압과 차별의 수단으로, 야만인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학살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잔인한 종교이자,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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