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군(八路軍) 간부 출신"으로,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이 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했으며, "팽덕회(彭德懷)"가 이끄는 "홍군(紅軍) 제3군단"에 소속되어, 유명한 "대장정(大長征)"에 참가했다. 조선인 10여 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아, 중국혁명과 관련된 명성을 굳히게 되었다. "8ㆍ15광복" 이후, 북한의 "민족보위성 부상ㆍ인민군 제2군단장"을 역임했다.
1. 무정 (武亭ㆍ김무정 (金武亭)ㆍ1904~1952ㆍ향년 48세)
독립 운동가(중국 화북지방)ㆍ연안파ㆍ전략전술의 귀재ㆍ조선의용군 총사령ㆍ팔로군 총부 작전과장ㆍ팔로군 포병단장ㆍ화북조선청년연합회(1941.01월 타이항산(太行山)) 회장ㆍ북조선제2군단장ㆍ북조선수도방위사령관ㆍ"연안파"의 거두로서, 전략전술에 뛰어나, "김일성"에게는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고, 6ㆍ25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김일성"이 제거했다.
• 출 생 : 함북 경성군 • 사 망 : 북한 애국열사릉 • 사 인 : 병사
• 본 명 : 김병희 (金炳禧) • 별 명 : 김무정 (金武亭) 보통 성을 빼고 무정이라 부른다
• 학 력 : 허베이성 보정군관학교 포병과 • 계 급 : 조선의용군 총사령관ㆍ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 경 력 : 민족보위성 차관ㆍ보안간부훈련대대부 포병담당 부사령관 (1946) →인민군 제2지휘소 사령관 (1948) → 인민군 제2군단장ㆍ평양방위사령관
"중국 화북 지방"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였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1년 "루이진(瑞金)"의 "중화인민공화국" 임정 수립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에는 북조선 군인으로,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연안파" 세력들 상당수가 6ㆍ25전쟁 기간 동안, "김일성ㆍ빨치산 파"에 의해, "패전책임 전가"로 제거되기 시작하였다. "무정ㆍ김한중" 등이 첫 대상이었다. 결국 "무정"은 제거되었다.
2. 중국에서 독립운동
"함북 경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녔으나, 1923년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1924년 "중국 바오딩군관학교(보정군관학교ㆍ강무당 포병과)"에 입교, 같은 해 졸업ㆍ임관하였다. 1925년, "북경"으로 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상하이(上海)"에서 "중국 공산당 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상하이 폭동" 당시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다가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국공분열" 후, "루이진(瑞金)"의 "중국 노농홍군"에 입대, 1934.10월부터 전개된 25,000리 "대장정(大長征)"에 참여하였다. 조선인 10여 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아, 중국혁명과 관련된 명성을 굳히게 되었다. 1937.08월, "노농홍군"이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이름이 바뀔 때, "총사령부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38.01월, "제8로군" 최초로 창건된 "포병단(병력 1,000여 명) 단장"이 되었다. "제8로군"이 화북 일본군에 대공세를 퍼부었던 1940년 하반기, "백단대전(百團大戰)"에 포병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8로군 포병단 단장"으로 "연안파" 거물로 떠올랐다. "8로군"에 있으면서, "펑더화이(팽덕회)"의 부관으로 근무하였는데, 결혼도 "팽덕회"가 주선하여 이루어졌다.
3. "김원봉"의 임정 합류에 반발
그 뒤, 주로 조선인 민족간부 양성에 주력하여, "화북조선청년연합회 (1941.01월 타이항산(太行山) 속에서 결성) 조직을 주도, 회장에 취임했으며, 1942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성격을 분명히 하여, 단체명을 "화북조선 독립동맹"으로 바꾸게 된다. 1940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소속된 사회주의 독립투사들이 "김원봉"의 "임정" 합류에 반발, 갈등을 빚다가, 1942년 "최창익"을 우두머리로 "화북 연안"으로 건너오자, 그들을 규합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산하 군대조직인 "조선의용군"을 창설, "김두봉"을 주석으로 하고, 자신은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그 해 말 "타이항산"에서 "화북조선혁명 군사학교"를 창설, 조선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4. "김일성"에 의해 제거
해방 이후, "조선의용군"이 중국에서 "국공내전"에 참전한 동안, "김두봉"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북한으로 입국하였다. 그가 북한으로 귀국하자, "김일성"은 그의 명망과 자기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는 태도에 불편해 하며 불안을 느끼고 항상 경계하였으며, 처음부터 그를 강력한 정적으로 보았다. 1946.0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중앙위원ㆍ07월 북조선노동당 제2비서ㆍ보안간부훈련대대부(사령관 최용건)의 포병담당 부사령관ㆍ1948.03월 조선노동당 제2차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1950년 "6ㆍ25한국전쟁" 초기, "제2군단장"으로 출전했고, "인민군" 후퇴 시에는 "수도(평양)방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0.12.04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불법살인ㆍ명령 불복종죄"로 규탄 받고 강등, "인민군 수인 (囚人)부대 연대장"이 되어, "평양 모란봉극장"을 지하에 건설하기 위한 작업에 종사하였다. 중국의 요구로 인도되었으나, 1951.07월경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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