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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파- 연안파 : 김명시 (1907)ㆍ조선의 잔다르크ㆍ백마 탄 여장군

by 당대 제일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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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시 (金命時ㆍ1907~1949ㆍ향년 42세)"는 1948년, "이승만 정권" 수립 후, 거세진 좌익 숙청 작업 시기에 갑작스러운 최후를 맞았다. 해방 후, 종로 거리 개선행렬에서 그녀가 "김무정 (조선의용군 총사령)"에 이어, 말을 타고 지나갈 때 시민들이 "김명시 장군 만세"를 불렀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1. 김명시 (金命時1907~1949향년 42)

여성독립운동가 (중국에서 항일 운동)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 (7년간 복역)ㆍ조선의 잔다르크백마 탄 여장군조선의용군(193 9~1945)

•  출 생 : 경남 마산부 만정 (萬町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  사 망 : 부평서 유치장 (자살로 추정)

•  별 명 : 조선의 잔다르크백마 탄 여장군      •  가 명 : 김희원(金喜元)스베츠로바

•  학 력 :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 중퇴

•  (김인석): 마산 31 독립운동에 앞장서 만세를 부르다 부상을 당했다.

•  가 족 : 5남매 중 3남매(김명시오빠 김형선남동생 김형윤은 "사회주의 계열" 항일투사로, 모두 옥살이를 했다     오빠 김형선 : 1950년 한국전쟁 때 월북하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    남동생 김형윤(1910~?): 일제 강점기 말, 이후로 흔적이 없다.

김명시

1948, "이승만 정권" 수립 후, 거세진 좌익 숙청 작업 시기에 갑작스러운 최후를 맞았다1949.10.11일자 신문에 실린 "북로당 정치위원 김명시, 부평서 유치장서 자살"이란 제목의 기사가 그의 마지막을 간략히 설명한다기사에서 "김효석 내무장관""지난 10일 오전 540분경 자기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에 있는 약 3척 높이 되는 수도관에 목을 매고 죽었다"고 발표했다고 돼 있다하지만 고문치사인지, 자살인지 사인을 확인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섯 오누이 중 3째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고 생선행상을 한 어머니(김인석) 손에서 길러졌다1923,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1925"서울 배화여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 부족으로 중퇴했다오빠 "김형선(사회주의 운동가)"의 영향으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1925.10"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21)으로 선발돼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여자 동기로 "김조이(金祚伊1904~ ?창원사회주의 운동가조봉암의 부인)도 있었다.

1927년 재학 중 "상하이"로 파견돼,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했으며, 1930"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 등에 참여했다1932, "신의주"에서 "조선공산당 재건활동" 혐의로 체포돼, 7년간 복역 후 만기 출소한다"경성콤그룹""조선의용군"과의 군사협동 작전을 모색하기 위해, 연안파 "김무정"에게 보냈다.

1939, 중국으로 건너가 "김무정 장군" 직속하의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원"으로 일본 점령지구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중국 팔로군"에 들어가, "천진제남북경태원"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1939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조선의용군"에 소속돼 최전방에서 여성부대원을 이끌고 선전활동과 병력 모집에 앞장서 이름을 떨쳤다. 해방 조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 존재는 더욱 널리 알려졌다.

1945.12, 기자회견에서 "화북조선 독립동맹조선의용군"의 현황을 설명하고, "조선사람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해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 자주독립을 위한 좌우 협력을 강조해 주목을 받았다1946.02,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자, 서울지부 의장단으로 선출된다이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며, 1947"전라도"에서 발생한 우익테러 사건에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사단원으로 참여하고, "민주여성동맹 대표""존 하지 준장(미군정청 군정사령관)"에게 "반탁시위 항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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