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파- 남로당 : 박헌영 ③ (1900)ㆍ625 전쟁 남한봉기설ㆍ평가ㆍ생애

by 당대 제일 2022. 10. 31.
반응형

1950.05.17, "박헌영 (朴憲永ㆍ1900~1956ㆍ54세ㆍ김일성과 12살 차이ㆍ서자 출신)"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북한 당()() 간부와 인민군 주요 지휘관 연석회의에서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그러나 "김일성" "박헌영의 남로당 20만 봉기 설"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구 소련 문서"에 나타나듯, "김일성" "스탈린모택동"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

 

1. 평가 (긍정적부정적)

① 남북의 외면ㆍ평가 절하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경쟁자"로서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고, 남한에서는 "월북인사이며,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남한ㆍ북한" 그 어느 곳에서도 "박헌영"에 대해 기념하는 어떤 묘소도, 기념비도 없다. 그는 "일제 강점기" 중, 독립 운동ㆍ민족 해방을 위해 몸을 바쳤으나, 남ㆍ북한 모두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남한에서는 "남한을 적화하려던 인물"이라는 평가와 "한국 전쟁"의 원흉 중의 한사람이라는 비판도 있다. 일부에서는 "인민군이 남진하면, 20만 명의 남로당원이 호응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근거삼기도 한다. 어떻게든 "남한 체제"에 적응하지 않고, 월북하여 몰락을 자처했다는 비판도 있다. 반면, "북조선"에서는 "김일성"과의 정치적 대립구도에서 밀려나 숙청되어, "미국의 스파이ㆍ반당종파분자"라는 죄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북한과 함께"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는 비판도 있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좌우합작노선"의 "여운형ㆍ김규식"도 "북한"과 함께였으며, "김구" 또한 결국은 "북한을 찾아가는 무리수를 범했다"는 것이다. "박헌영ㆍ남로당 노선"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에서 2개의 경향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좌경적ㆍ모험주의적 지도"에 대한 비판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이들의 "주체적인 측면"보다는, 당시 남한 사회가 처해 있었던 객관적 상황, 특히 "미ㆍ소의 규정성"을 중시하는 견해이다.

② 긍정적 평가

그는 솔직하고, 직선적이었으며, 꾸밈이 없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담담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는 실천이 따르는 것만 같았다는 평가가 있으며, 약속을 잘 지켰으며, 지킬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비운의 혁명가라는 평가가 있으며, 이론가라는 평가도 있다. 자신의 생각을 지킨 사람이며, 대학교 교수ㆍ선생님ㆍ지식인과 같은 풍모를 지녔다는 평가가 있다.

"박노자(오슬로 대학교 교수)"는 "박헌영이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에 빠져 있긴 해도 근본적으로 온화한 성격에 열성적 노동계급 혁명가였다"는 평가를 내렸다. "최규진(대학교수)"는 그가 "빼어난 이론가이며, 이론이 굳센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박갑동"은 "박헌영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의 말은 대학교 교수의 강의와 같이 담담하며 직선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쏘는 듯한 안광과 단단한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는 확고하고 꾸밈이 없는 듯했다."

"미국을 맹목적으로 배척하자"는 의견에 맞서 "미국과의 외교론"을 펼친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박헌영이 합리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가졌기에, 해방정국에서 유혈사태를 최대한 막거나, 방지할 수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박헌영이 아니고 다른 공산주의자가 그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이남에서의 반미 투쟁은 더욱 극렬했을 것이다"라는 시각과 "만약 박헌영이 소련의 지시대로 모두 움직였다면, 남쪽에서는 날마다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았으리라 믿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박헌영에 대해 처음부터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인간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한번 자신의 사람이라고 판단된다면, 그는 자신의 간담까지 드러낼 만큼 솔직했다고 한다. 고집스럽고 편협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러한 성정덕분에 신념을 굽히지 않는 원칙주의자로 살았다. 그 예로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③ 부정적 평가

비타협적이며, 편협하다,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주로 존재한다. "폭력혁명"을 신봉하지는 않았으나, 과격하고, 폭력적인 인물로 규정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고집스럽고, 괴팍스러운 인간이라는 평가도 있고, 쇼맨십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일에 있어서 철저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되는 사람들만 썼기 때문에, 편협적인 점, 선동력ㆍ포용력 등 "대중적인 정치가로서는 부적격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그의 이념에 대해서도 편협하고, 종파적인 교조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조선공산당"에서 출당되었던 "조봉암"은 그가 "편협하고, 종파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조봉암"의 비판에는 1920년대 후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김구"와 비교하면, "김구"가 "자주독립적"인 반면, 그는 "외세 의존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김구"는 보다 적극적이었고, "반탁운동"의 의미는 "자주독립에 관한 논쟁에서 우파가 좌파에 승리를 거뒀다"는 데 있는데, 반면 "박헌영"은 "소련"의 지령을 따른 "북한 노선"을 추종해, "찬탁"에 나섰다가 남한 대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자주독립"보다 "사회주의 노선"을 따른 결과였다.

"이승만의 돈암장"을 찾았을 때, "윤치영(이승만의 비서)"는 직접 간을 봐서 식사를 차려왔다. "윤치영"이 해온 식사를 "김원봉"은 단숨에 해치웠지만, "박헌영"은 "음식에 독이 들었을 것"이라면서 끝까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군사력 외면"에 대한 시각이 있다. "박정희"는 그가 무력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박헌영은 빨치산 출신인 김일성과는 달리 군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육사 3기생부터 군내 당을 건설하기로 한 것 같은데, 지휘체계의 혼선이 컸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도 중앙당의 이재복이 지시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도당이 관리하던 하사관들이 멋대로 주동하여 일으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2. 1950년, 6ㆍ25 한국전쟁

1952.01월과 02월 2차례에 걸쳐, "김일성"에게 전쟁에서 인명살상ㆍ물자피해를 들어, 승산이 없음을 말하고 전쟁을 중단하자고 한 것도 "박헌영"이었다. 또한 "박헌영"이 전쟁을 하자고 하여, "김일성"이 순순히 복종하고 전쟁을 할 단계는 아니었으며, "남로당 빨치산이 호응한다."는 발언을 했다하여, "6ㆍ25전쟁"의 책임이 전적으로 "박헌영"에게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① 한국전쟁, 동조 논란

1949.08.12일ㆍ08.14일, "김일성ㆍ박헌영ㆍ스티코프(당시 연해주 군관구 정치위원)"의 대화 기록을 보면, 이미 두 사람은 전쟁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본 것으로 나타난다. 여름휴가를 떠나기 직전 이들을 만난 "스티코프"는 "두 사람이 무력 남침의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보고했다. "스티코프"는 이날 만찬에서 있었던 "김일성ㆍ박헌영"과의 대화를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이들의 대화록은 1995년 공개된 "구(舊)소련 비밀문서"에 담겨 있다.

② 남한 인민 봉기 설

1950.05.17일, "박헌영"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북한 당(黨)ㆍ정(政) 간부와 인민군 주요 지휘관 연석회의에서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한국 전쟁을 실행하면, 20만 명의 남로당 파르티잔들이 북한 인민군을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박헌영의 남로당 20만 봉기 설"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구 소련 문서"에 나타나듯, "김일성" "스탈린모택동"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

김광운(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은 "20만 남로당원 봉기설은 박헌영이 조선노동당에서 자기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밝혔다. 그는 "남한 지역의 남로당원"이 "10ㆍ1대구사태ㆍ제주4ㆍ3사태"로 상당부분 타격을 입고, "지리산ㆍ태백산" 등으로 잠입했으며, 식량난ㆍ질병ㆍ기근 등으로 대부분 전멸한 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말이 되면서, "제주4ㆍ3사태ㆍ여순 반란"에 뒤이은 "빨치산들의 유격전"을 거의 진압하였고, 전향한 좌익들은 "보도연맹"으로 묶어냈다. 무엇보다 "박헌영"이 내려 보낸 "정치공작원ㆍ무장 게릴라"들이 더 이상 남한에서 발붙일 여지가 없을 만큼 남한의 민심이 돌아서 버렸다.

③ 세균전 의혹 제기

그는 한국전쟁 중, "미국이 생화학 무기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는데, 1950.10월, "박헌영"은 UN에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하고, 화학 무기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1952.02.22일에도 그는 "미국의 세균전 감행" 주장을 제기하며, UN에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고, "미국"은 1952.01.28일부터 "세균을 가진 대량의 곤충을 북한상공에 비행기로 살포한다"고 주장했다.

④ 책임 공방론

"북한ㆍ친북성향 학자들"은 "6ㆍ25전쟁"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박헌영"에게 몰고 있다. 그들은 한국 전쟁의 원인을 "김일성"도 아니고, "스탈린"도 아닌, "공산당"을 배신한 "박헌영"의 사주 때문에 발생한 전쟁이며, "미국ㆍ이승만"의 "보도연맹 집단살해 공작"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ㆍ친북성향 학자들"의 다른 비판으로는 "김일성"과는 상관없이 그가 일방적으로 "스탈린ㆍ마오쩌둥"과 짜고 한국 전쟁을 기획했다는 설과 그가 "김일성"에게 전쟁을 하자고 했다는 비판을 한다.

그러나 "6ㆍ25전쟁"은 "박헌영"의 일방적인 책임이라고 볼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서울" 주변에 거점을 형성한 그가 "미군정"의 혹독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했을 때, 그는 정치적 망명객의 입장이었는데, 그는 "6ㆍ25전쟁"을 통해 반전을 노렸으나, "휴전"으로 세력만회에 실패하면서, "휴전의 공"은 "김일성"에게, "과"는 "박헌영"에게 돌아갔다.

⑤ 책임론에 대한 반론

"북"에서는 그가 공산당을 배신하고 한국 전쟁을 기획했다ㆍ김일성과는 상관없이 그가 일방적으로 스탈린, 마오쩌둥과 짜고 한국 전쟁을 기획했다ㆍ그가 김일성에게 전쟁을 하자고 했다ㆍ그가 남한으로 내려가면 20만 명의 남로당빨치산들이 호응하여, 통일을 이룰 것이라고 속였다고 비난한다. 1954.12.23일, "김일성"은 "조선인민군 군ㆍ정 간부회의"에서 "박헌영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비난했다.

"남조선에 당원이 20만은 고사하고 1000명만 있어서 부산쯤에서 파업을 하였더라면 미국 놈이 발을 붙이지 못하였을 것이다. 남반부의 군중적 기초가 튼튼하고 혁명세력이 강하였더라면, 미국 놈들은 우리에게 덤벼들지도 못하였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박헌영"이 공산당을 배신했다는 근거는 없으며, "한국 전쟁" 내내 "미국"의 침략을 규탄하였고, "미국이 DDT를 뿌렸다"는 의혹을 국제사회에 제기하기도 했다. 1952.01월, "중국의 펑더화이"와의 면담에서 박헌영은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3. 대통령 유력자설ㆍ활동

① 박헌영 대통령 유력자설ㆍ당대의 여론

1946년, 당시 "미군정"은 사회주의 계열을 탄압하지 않을 경우, "박헌영"이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우려가 있다는 보고를 하기도 했다. 1947년, "미군정"은 당시 사태를 그대로 방관했을 경우,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전망하였다. 1947년, 당시 "미군정" 내의 보고서들은 남한에서 "토지문제ㆍ보통선거ㆍ주 40시간 노동ㆍ남녀평등" 등 "좌익이 강조해 온 것을 우익은 제의하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몇 개의 보고는 총선을 실시하면, "박헌영이 대통령에 뽑힐 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고 한다. 1947.03.21일 작성된 "미군 정보문서"는 "지금 만일 남한 총선거가 실시된다면, 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였다. 이는 그대로 "미국 국무성"에 보내는 정보문서인 G-2 Periodic Report. No.485(1947.03.21)을 통해 "미국 정부"로 보고되었다.

해방 직후, 한 여론 조사에서 "박헌영"은 여론 조사에서 "대통령 감 1위"로 뽑혔다. "여운형"이 2위고, "이관술"이 3위였으며, "이승만ㆍ김구"는 한참 아래에 있었다. 1945.10.10~ 11.0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6%가 "박헌영"을 지목하였다.

② 좌우합작 운동 : "독립촉성중앙회" 참여

1945.09월, "한민당 창당대회"에 참여하여, 창당축하 인사와 함께 축사를 낭독하기도 하였고, "소련"의 지시를 받기 이전에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조직 시에는 "김구ㆍ김성수" 등 우익인사들의 입각에 찬성하였으며, "이승만"이 "독립촉성중앙회"를 결성했을 때, 참여하기도 했다.

"친일파 청산 문제"를 놓고, 친일파 청산을 꺼리는 "이승만"과 "묻지마 식 단결"의 "김구"에 반발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탈퇴한 것은 "박헌영"의 일방적인 책임으로 보기는 어렵다. 1947.01월부터는 "조선적십자사(대한적십자사의 전신)"의 이사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사로 선출되자, "김규식(조선적십자사 총재)"는 반발했고, 수시로 그와 마찰하였다. "김규식"은 그를 혐오하였다고 한다.

③ "신탁통치 찬성"에 대한 반론

1945.12.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신탁통치를 찬성했다"는 주장은 "동아일보"의 오보와 미국인 기자 "존스턴"의 날조에 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946.01월, 인터뷰에서 그는 "현재 한국은 소비에트화 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발언 도중 "소비에트 조선이 언제 될지 모르지만, 가령 된다 해도 소비에트 조선은 언제나 독립국이오."라고 소련 편입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또한 1945.12.30일에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에 참여했고, "조선공산당" 공식 성명을 통해 반탁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존스턴" 기자는 "박헌영은 조선의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는다. 또 조선이 몇 십 년 후에는 소련이 편입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내용의 허위기사를 작성, 발표했다.

그렇게 되어, 1946.01.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방송에서 "박헌영이 존스턴에게 1국 신탁제를 지지하며, 향후 10~20년 이내에는 소련에 합병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방송되었다. 미군정은 이를 "보도자료"로 내보내 파문이 커졌다. 그는 "신탁통치 찬성"을 부인성명을 발표하였고, "조선일보"는 방송의 보도와 "박헌영"의 부인 담화를 함께 실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1946.01.16일자에서 "조선을 소련의 속국으로-상항 방송이 전하는 박헌영의 희망"이라는 기사와, "박헌영의 매국언동, 한민당에서 배격을 결의"라는 기사를 싣고, 01.17일 "조공 박헌영씨 언동에 큰 파동, 전국적으로 배격운동, 각 정당과 50개 단체 분연 궐기"라고 보도하였다. 01.18일 동아일보는 이것을 가지고, 다시 사설을 썼다. 미국 기자 "존스턴"과 "동아일보"의 오보에 이어, 우익 언론에서 계속 "박헌영의 신탁통치 찬성 기사"를 내보내자, "박헌영"은 공식적으로 부인 성명서를 발표했다.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찬성했다"는 것의 거짓인 것은 그가 부인성명을 내자, 01.05일 합동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외신 기자들이 박헌영의 주장이 옳다는 공동 성명서를 냈다는 점이다. 그러나 "존스턴"은 다시 자기주장이 옳다고 말하였고, "동아일보"에서는 "뉴욕 타임즈에 오보는 없다. 존스턴 씨와 박헌영 씨의 회담진상 경위"라는 제하로 기사를 보도하였다. 그러나 "존스턴"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반론을 제시하지 않고 출국하였고, "박헌영"은 찬탁론자로 몰리게 되었다. "박헌영"이 찬탁으로 돌아선 것은 1946년 2월로 "소련"의 신탁통치 찬성 의사와 "미소에 의한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이후였다.

④ 맹목적 반미주의에 대한 반대

"박헌영"은 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주의ㆍ독일의 나치"를 패퇴시키는데 기여한 "미국"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으며, "맹목적인 반미주의는 옳지 못하다"며, 과도한 "반미 투쟁"은 삼가고, "미국"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볼 것을 설득하였다. 그는 "미국ㆍ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괴롭힌다고 보면서도, 이는 "미국ㆍ일본"만이 아니라 다른 강대국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파악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부터 해방정국에서의 반미주의적인 감정에 대해, "맹목적인 반미 감정은 옳지 못하다"며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다.

"박헌영"은 "공산주의자"로서는 드물게,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고, 해방된 "조선"의 건설에 있어서도 많은 기대를 갖기도 했다. 당시 "평양"에서는 "국제공산주의의 돌격대장"을 자칭하는 자들이 있었고, 또 당시 "스탈린"은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을 오로지 "반미 투쟁의 도구"로만 이용하려고 했다. "박헌영"이 "평양"에 가면, "반미투쟁"을 강화하도록 강요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이남의 인민들이 보는 미국은 이북 측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일방적인 침략자들이 아니고, 해방자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너무 심한 반미투쟁을 전개하면, 당은 고립되고 만다."고 주장하여, 자기 뜻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는 "미국이 특별히 사악한 집단은 아니며 강대국이 약소국을 괴롭히는 것은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라고도 항변하기도 했다. "미국"을 옹호한다거나, "친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는 이러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경성"으로 돌아오면 그는 자신의 측근들에게만 "이것은 사실 모 방면에서 요구하는 것이니, 어느 정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후일 "박갑동"은 "박헌영이 아니고 다른 공산주의자가 그의 위치에 있었다면, 이남에서의 반미 투쟁은 더 극렬했을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⑤ "조선공산당" 재건 노력과 좌절

일제에 의한 5번에 걸친 "조선공산당" 탄압 이후, 당이 해체되면서, 1927.12월 이후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지도자이자, 한국인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공산당 재건" 운동을 추진했다. 1945.08월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소련ㆍ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웠다. 1945.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놓고, "김일성"이 "분국 설치 허용"을 요청하였으나, "박헌영"은 당의 본부는 수도에 둔다는 점과 1국1당주의 원칙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소련ㆍ중국" 측의 압력으로 허용하였다.

그 뒤 "김일성"은 "북조선분국"을 당수인 "박헌영"과 상의 없이, "북조선로동당"으로 승격시켰다. 그 뒤 1946년,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당 대 당의 통합"으로 합당을 요구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승복하여, "조선로동당"을 창건하면서, 그가 조직한 "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다.

⑥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1945.10.02일부터 "김일성"이 "조공 북조선분국"을 설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박헌영"은 당초 거절하였다. 광복 직후, 사상ㆍ이념ㆍ정치적 이해관계ㆍ노선을 달리 하는 수많은 정치세력이 난립하는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한 "박헌영의 재건공산당(조선공산당 재건준비 위원회)"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의 간판아래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945.09월 "소련 군정"의 강력한 후견을 받는 "김일성"이 입북해, 새로운 정치세력의 한 축을 형성함으로써, 기존 정치판도의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김일성"은 입북과 함께, 각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한편, "38선 이북지역 공산당 조직"을 지도할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주장하였다.

"소련 군정"의 의지를 반영한 "김일성"의 요구는 때 이른 반대에 부딪쳐 난항을 겪게 된다. "박헌영"을 따르는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 엄연히 당 중앙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북에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은 분파행동"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당사자인 "박헌영ㆍ김일성"의 직접 담판을 통해 해결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절충안으로서 "서울의 중앙당에 속하되, 북부지역 공산당 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중간기구로서, 북조선분국을 설치한다."는데 합의하게 되는데, 지루한 격론 끝에 나온 이 합의는 타협안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김일성ㆍ소련 군정"의 의도가 관철된 것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1945.10.10일부터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비공개로 열리고, 대회 마지막 날인 10.13일 당초의 합의대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북조선분국)"이 설립된다. 이로서 박헌영과 김일성의 관계는 "당원 대 당수"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로 서열이 조정되어 버리고 말았다.

"북조선분국의 허용"은 그의 정치적 실책의 하나였다는 견해와, "소련"이 "김일성"을 선택한 "사실상의 김일성의 승리"로 보는 시각이 양립한다. "북조선분국" 창립대회에서는 분국 지도기관을 선출, 책임비서에 "김용범"ㆍ제2비서에 국내파의 "오기섭"ㆍ연안파의 "김무정"을 각각 선임했다. 또 "집행위원회ㆍ각 집행부서장"도 선임했는데, "김일성"은 측근인 "안길"과 함께, "17인 집행위원회의 일원"에 포함되는데 그쳤다. "김일성"이 어렵사리 "분국 설치"를 성사시켜 놓고도, 정착 "책임비서"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지위가 확고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일성"이 "분국 책임비서"에 오른 것은 2달 뒤, 열린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이다. "김용범"이 책임비서로 추대된 것은 광복 전후, "평양"에서 기반을 닦아 "국내파"로 분류될 수 있지만 특정 정파에 기울지 않은 데다, "소련 군정"의 의중을 잘 읽고 처신해줄 인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나중에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된 뒤, "연안파"가 주축이 된 "조선신민당"과 통합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변신하며, "북로당"은 다시 "남한 내 좌파 3당"의 통합 정당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과 합당, "조선노동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북한이 내놓고 있는 공식 문헌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명칭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라는 용어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두고 "김일성"이 과거 "미제 고용간첩인 박헌영의 수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시각도 있다.

 

4. 생애

어머니 "이학규(李學圭1867~? )"의 직업은 "주막업(酒幕業)"이라 적혀 있고, 호주인 남편 "박현주(朴鉉柱1867~1934)"와의 관계는 "()"으로 되어 있고, "박헌영"과 호주의 관계는 "서자(庶子)"로 되어 있었다"박현주"에게는 이미 맏아들 "지영(芝永1891)"이 있었고, "박헌영" 뒤로 두 딸(19051912)이 있었다이미 맏아들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자식을 얻기 위해 소실을 맞이한 것 같지는 않다아버지는 쌀가게를 경영하면서 약간의 농지를 소유한 "중상의 재산가"였던 것으로 보아 궁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훗날 자신이 "봉건 양반 가정에서 출생했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는 아마 열등감의 표현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1922, "조선 호적령"이 실시되었으니까, "박헌영" 22살 때부터는 이 등본을 들고 다녔을 터인데 그때 그 감수성 많은 청년 수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이념의 여부를 떠나, 연민과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신의주 지방법원 검사국"이 작성한 "박헌영의 피의자 신문 조서(1925.12.12)"에는 "나에게는 부모님, 형님 내외분, 그리고 나와 아내, 이렇게 여섯 가족이 있고, 재산은 나에게 없으나 아버님께 약 1만원의 재산(동산부동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년 시절에 비만하고 키가 작았다. 그는 1910년 서당을 다녔고, 1912 "예산군 대흥면의 대흥(大興)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5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 전신)"에 합격했다재학 중에는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책을 읽는 것이 취미였다어머니아버지가 이혼하기 전이었으니, 학비는 아버지가 보내주었을 것이다그런데 1974년에 다시 편책한 "호적등본"에 따르면, 무슨 연유였던지 1932 "어머니 이학규" "박현주" 이혼했으며, 1934 "박헌영"은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호주를 상속했다1932년이면 이미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공산주의자로 활약하던 시기였다는 점으로 본다면 아마도 첩실(妾室)의 서출(庶出)로 기록되기보다는 일가 창립을 하는 것이 더 떳떳하다는 판단에 의해서 이혼했을 수도 있다어머니가 이혼하기 전에 작성된 호적에 직업이 "주막업"으로 된 것을 보면 이미 이혼 전에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주막을 경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우한 소년은 신양장터에서 주막집을 경영하면서 주정뱅이 사내들에게 시달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술 심부름을 하는 동안 가진 자에 대한 분노와 적의(敵意) 많이 느꼈을 것이다.

뒷날 박헌영이 인민 전선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그가 누구보다도 계급적 적의가 강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아무리 민족의 해방이나 통일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지주"를 용서할 수 없었는데 그 이면에는 강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일제강점기의 "토지 모순"에서 해방 정국에 대한 해법(解法)의 교훈을 얻으려 했다.

1919 "31운동"이 일어나자, 참가했으며, 휴교로 인해 개별적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YMCA 영어반승동교회 성경반"에서 영어 공부를 하며 미국 유학을 준비했으나 학자금을 마련해주겠다던 "윤돈구(尹暾求)"가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유학의 꿈도 사라졌다. 그것도 운명이었다"윤돈구"가 죽지 않고 "박헌영"이 미국 유학을 가서 "이승만"에 못지않은 명문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했더라면 그의 운명과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교육 환경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박헌영은 수재로서 일찍부터 정규적인 영재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 열정의 배후에는 학업을 통한 신분 상승의 욕구가 강렬했다.

실의에 빠진 그는 1920년 가을, 일본으로 밀항하여 "도쿄코하마"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갔다거기에서 상과대학에 입학할 준비로 "지나(支那)기독청년회 영어과"에 들어가 약 6개월간 공부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공산주의"에 입문했다. 그는 1921.04 "상하이상과대학"에 들어가 1922.06월까지 다녔다그는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평민 계급의 반역자로서 귀족의 노예이며, 제후와 영토를 옹호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변호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1920.11~ 1922.04 "상하이"에 머물렀다. 그 기간에 운명적으로 한 여인을 만났다노동당 강원도당 부위원장이었던 "강상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청년동맹(共靑)" 조직하여 책임비서로 있을 당시, 그곳에 망명해 있던 "현순(玄楯) 목사(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계열평남 출신)" 집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었다.

"현순 목사"에게는 훗날 "미국대사관 1등서기관(CIA의 한국 책임자) 노블(Harold J. Noble)"의 부하인 "아들 현()피터 (대위) 현 앨리스( Alice)" 있었는데, 그 여인이 "박헌영"을 연모했다.  박헌영보다 3살 아래였으니까 17~18세 전후였을 것이다. "현앨리스"의 평전을 쓴 "정병준 교수(이화여대)"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고,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정도"였다고 하며, 남로당원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여 "박헌영의 전기"를 쓴 "박갑동"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증언했다"현앨리스" 1922 "상하이"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곧 이혼하고,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이화여대"를 잠시 다녔다고 한다이 무렵은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여 정착하는 단계였다.

"레닌(Lenin)" "러시아 혁명"의 축제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었기에, "극동피압박민족대회(1922.01.21.~ 02.02)"라는 이름으로 극동의 공산주의자를 "모스크바"에 초치했다"조선공산당" 대표 가운데에는 "현순 목사"도 들어 있었다이때 "박헌영"도 좌익 지도자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레닌"을 만났다다른 지도자들이 다 그랬듯이 그도 "러시아 혁명"의 열기와 "레닌"의 지도력에 깊은 감화를 받은 듯하다귀국 후에는 주로 "화요회(火曜會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지은 이름)" 가입하여 활약했다"모스크바"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러시아 정부"의 후원 밑에 조직된 "김만겸(고려공산당 당원)"으로부터 100원의 여비를 받아 "조선"에 공산주의를 선전할 사명을 띠고 귀국길에 올랐다.

"상하이"에서 "안동"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으로 잠입을 기도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대정(大正) 8(1919) 제령 제7" 위반으로 징역 1 6월의 형을 받았다그는 1924.01.18일 출옥하여 서울로 돌아왔다그는 1925.04.18,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여 이끌어가던 중, 1925.11 "신의주"에서 술김에 친일 변호사 "박유정(朴有楨)"과 일행인 경관을 폭행한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이때 가택수색으로 조직이 폭로되어 체포되었으나, 광인(狂人)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미친 사람 행세가 어찌나 천연스러웠던지 수사관들도 속았다.

이때 운명의 2번째 여인인 "주세죽(朱世竹)"을 만났다그보다 2살 연상인 그녀는 "함흥 출신"으로서, "관북" 제일의 명문인 "함흥 영생고보"를 마치고, "상하이 안정씨(晏鼎氏)여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이들은 "허정숙"의 소개로 알게 된 사이였는데, 1925.02.19일자 "동아일보" 1면 하단에 광고로 게재된 "화요회 주최의 전조선민중지도자대회 준비회의" 명단에 "박헌영주세죽허정숙"이 함께 "경성" 대표로 등재되어 있고, 1926년 제2 "공산당 체포" 기록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그들은 이미 이념의 동지였던 것으로 보인다첫 아내 "주세죽(朱世竹)" "31운동"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주세죽" "31운동" 당시 "함흥"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1개월간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바 있다.

이후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등을 주도하며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일제는 그녀를 "여성 사회주의자 가운데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 감시했다1924.05월 서울에서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1 "경성 여자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했으며, 4월에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11 "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박헌영"이 일경에 붙잡힌 뒤, 그녀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박헌영주세죽"은 결국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비비안나)도 낳았다. 결혼 연도는 1921년이라고 했다가 1924년이라고 했다가 법정에서 한 말이 다르다. 호적등본에는 1926년에 신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1926.06, "주세죽"은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일경에 다시 붙잡혔으나 2개월 만에 풀려났다1927.05, "근우회(槿友會)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망명도피투옥 생활을 거치면서 그들은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어느 날 오랜만에 박헌영이 아내를 만났을 때 그의 배가 불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아이가 아니었다.

"박헌영" "김단야(金丹冶)"를 의심했고, "주세죽"도 그가 아기의 아버지라고 시인했다이것을 불륜이니 치정이니 따질 일은 아니다. 궁핍한 혁명가의 삶을 살면서 비좁고 불편한 주거 환경 속에서 벌어진 "접촉 사고"였을 뿐이다. 어쨌든 둘은 이 일로 헤어졌다"주세죽" "소련"으로 건너가 "한베라"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거기서 그는 1934 "김단야"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소련"에서도 "주세죽"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았다.

그녀는 1938 "일본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주거가 제한되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어 1946년 형기를 마친 뒤에도 그곳에서 살다가 1950년대 중엽에 죽었다한국의 좌파정권 시절인 2007년에 "주세죽" "독립유공자 애족장(7등급 가운데 5등급)"을 받았다좌익이라고 해서 서훈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적으로 볼 때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우익들은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그녀가 "박헌영의 아내였다"는 후광(?)이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 1924.04,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그해 7월까지 있다가 8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가 11월 중순에 퇴사했다"동아일보"를 퇴사한 것은 그가 "동맹파업"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이었고, "조선일보"를 퇴사한 것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조선 독립을 쟁취하자"는 글을 쓴 후 사회주의자를 내쫓으라는 일제의 강압 때문이었다

1929년 그는 "간도(間島)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떠난다그는 그곳에서 "동방노동자공산대학(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수학한 다음 1932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그는 1933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어 6년 형을 받고, 1939년에 출감했다그는 다시 광인 행세를 하면서 "경성 콤그룹(Com Group)"의 대표자로서 조직의 운영을 위해 암약했다이 무렵, "이득균"이 경영하는 "광주시 월산동"의 벽돌공장에서 "김성삼김추삼"이란 가명으로 직공 행세를 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이 되자, "박헌영"은 휘황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서울 종로"에서는 "지하에 숨어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리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는 전단이 나붙었다09.08일이 되어 "서울 계동"에서 개최된 "공산당 열성자대회"에 나타난 그는 "조선 인민공화국 만드느라고 동무들 만나기가 늦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에 착수했다이때 잊을 만하던 운명의 여인이 다시 찾아왔다"현 앨리스" "군정 요원"으로 자원하여 서울에 들어온 것이다. 물론 "박헌영"과 자주 접촉했다"군정청"은 영어한국어가 자유로운 그녀를 쓰면서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그녀는 끝내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그의 활약은 뜻과 같지 않았다. 그는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위조지폐사건(1946.05.15)으로 체포령이 내리자, 남한을 탈출하여 북한에 도착했다미군의 수색을 피해, 관 속에 숨은 채로 09.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하다가, "평양"에 도착했지만 "미 군정"보다도 더 가혹한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오늘날에는 "조선정판사 사건"은 조작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공산주의자 탄압을 위해, 사건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쓴 "임성옥의 박사학위 논문(한국외국어대학2015)"이 최근에 통과되었다"내가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글을 처음 발표했을 때 몇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그 주모자인 박락종(朴洛鍾)이 정치인 박지원(朴智源)의 할아버지인 것을 알고 썼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박락종이 박지원 의원의 할아버지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내가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에게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느냐"고 물었더니, "향토예비군 교육장에서 들었다"고 했다. 나는 박지원 의원도 싫지만 그런 식의 우익도 싫다헌영은 북한에서 재기할 꿈을 꾸며, 1947.12월 초에 그의 정치적 보루로서 혁명의 전위 계급을 양성하기 위해 강동(江東)정치학원을 창설하여 1948.01.01.일자로 개원했다이 학원이 적어도 남한에서 그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남쪽 출신 360명 가운데, 강동 정치학원생이 200명이 넘었다남한 출신 학생들은 사석에서 박헌영을 "조선의 레닌"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추종했다."

"박헌영(당시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소련 군부"가 북한의 지도자로 "박헌영김일성"을 택일하는 문제를 결정한 무렵인 1946.07월 말, 그가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 "스탈린"이 두 사람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낙점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스탈린" "박헌영"을 지명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이론적으로 준비된 인텔리였으나, 1928년 해체된 조선공산당원으로 종파 활동을 한 경험이 있으며,   일제하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며, 10여 년 동안 3차례 투옥 생활을 하면서도 살아남은 것으로 보아 그 과정에서 일본에 전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북한 대중에게는 박헌영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LA"에서 "박헌영" 관련 보도를 본 "현앨리스"는 우선 아들이 의사 생활을 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갔다가 거기에서 "헝가리~러시아~울란바토르~베이징"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여정이 20일 정도 걸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했을 것이다그녀기 평양에 들어간 것은 11월 말~ 12월 초 사이였다. "동토"를 통과하기가 몹시 추웠을 것이다"박헌영"이 장관으로 있는 "외무성의 타자수 겸 통역으로 채용되었다는 설(박갑동)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했다는 설(박헌영 기소장)박헌영의 비서였다는 설(피터현)"이 있다.  어느 쪽이든 "박헌영"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왜 그 먼 길을 찾아갔을까"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아닌 바에야 "이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그녀는 1953.02~ 03월경에 체포되어, 1956.08월 무렵에 처형되었으리라는 것이 "정병준 교수"의 추정이다.

"경향신문(2002.11.09)" "현앨리스"의 사진과 함께, "한국의 마타하리"라고 소개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가 과연 "이중간첩"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그러나 그녀의 행적이 박헌영에게 씌워진 간첩죄와 그를 통한 공화국 전복 음모의 빌미가 된 것은 사실이다"북한최고재판소" "박헌영 기소장"에 따르면, "서울에서 활약할 당시 접선한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자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보 기관의 언더우드(Underwood元漢慶)에게 고용된 간첩"으로, "인민군대의 진격으로 단절된 노블(Noble)과의 간첩 연락선을 다시 회복할 목적으로 미군이 밀파한 최익환박진목 등과 접선하였고, 1948.06월 하지(Hodge)의 지령을 받은 미국 간첩 현앨리스를 중앙통신사 및 외무성에 배치시켜 간첩 활동을 지원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1956.07월에 처형되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