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룡ㆍ이주하"는 "남로당 핵심당원"으로서, "공산당"이 불법단체로 그 활동이 인정되지 않자, "지하당"으로 비합법적으로 활동하였다. "김삼룡"은 체포되기 전까지, 3년 동안 서울에 잔류하며, "남조선노동당 남한총책"으로 "북한"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남한"에서의 "남로당 지하활동"을 지휘하였다. "이주하"는 "남로당 정치국원"으로서 "1급 정치참모"로 활약하던 중, "북로당ㆍ남로당"의 합당에 즈음 월북하였다가, "김삼룡의 고문" 격으로 다시 남하하였다. 이들은 남한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남한 단독총선거 저지" 활동을 수행하였다.
1. 김삼룡 (金三龍ㆍ1908~1950.06.28ㆍ향년 42세ㆍ가난한 소작인의 아들)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ㆍ미군정기 남로당 주요 간부 (남로당 총책)ㆍ공산주의자ㆍ노동운동가ㆍ일제시대부터 6ㆍ25전쟁 직전 체포ㆍ처형되기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인물ㆍ세칭 "7개의 얼굴"이라 불릴 정도로 변장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 출 생 : 충북 중원군 엄정면 • 사 망 : 서울 서대문 형무소 • 사 인 : 처형
• 체 포 : 1950.03.28일 서울 아현동 • 별 칭 : 7개의 얼굴(7개의 색안경) • 학 력 : 시골의 보통학교 졸업
• 처 : 이순금(李順今)- 이관술의 누이동생 • 경 력 :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ㆍ남조선노동당 서울지도부 책임자
"충북 중원군 엄정면"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아래, 6형제가 혹독한 가난 속에서 불우하게 보냈다고 한다. 어려서 시골의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나, 진학할 형편이 못 되던 그는 담임선생의 소개로 "서울 동대문" 밖의 고학생 자활단체인 "고학당"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으면서, "사회주의"에 접하게 된다. 이후 "고려공청"의 지도를 받아, "독서회"를 조직하다가, 1930.11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년형 마치고 출옥한 그는 "이현상ㆍ이재유"과 같이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하여 노동운동 활동을 한다.
1934년, "조선공산당의 일본총국" 간부였던 "이재유"를 중심으로 한, "이관술(李觀述)ㆍ이순금(李順今ㆍ김삼룡 처ㆍ이관술 누이동생)ㆍ이현상(李鉉相)"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하여,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다가, 1937년 "이재유"가 검거되자, 고향인 "충주"에 은신하였다. 1939년, "이관술ㆍ이순금 남매"가 조직책임자로 초치하자 상경하여, "경성 콤 그룹"을 조직하고, "조직부ㆍ노동부"의 책임을 맡았다. 1939년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의 지도로, "경성전기ㆍ대창직물ㆍ경성방직ㆍ용산철도공작소ㆍ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 조직"을 확장하는 활동을 보였으나, 1940.12월 "조직선"이 드러나 일제에 잡혔다.
1945.08.15일 광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출감하여,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서 "김형선"과 함께 조직책임을 맡아, 먼저 출범한 "장안파 공산당"을 약화시키고, 09.11일 "재건 조선공산당"의 조직국책을 맡았으며, 1946.02.15일 좌익단체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당 조직에 몰두하였다. 1946.09월, "박헌영ㆍ이강국(李康國)" 등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였다. 1946.11월, "조선공산당ㆍ조선인민당ㆍ남조선신민당"의 3당이 합동하여 출범한 "남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후보"로 조직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이승엽(李承燁)" 등과 함께 "남로당 지하운동"을 조직ㆍ지도하였으며,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에는 불법화된 "남조선노동당의 서울지도부"의 책임자로 활약하는 등 "이주하(李舟河)"와 함께 지하조직에 몰두하다가, 1950.03.27일 경찰에 체포되어,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2. 이주하 (李舟河ㆍ1905~1950.06.28ㆍ향년 45세ㆍ가난한 화전민 가정 출신)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ㆍ미군정기 남로당 주요 간부ㆍ공산주의자ㆍ노동운동가ㆍ일제시대부터 6ㆍ25전쟁 직전 체포ㆍ처형되기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인물
• 출 생 : 함경남도 북청 • 사 망 : 서울 서대문 형무소 • 사 인 : 처형
• 별 칭 : 이주화(李舟花) • 체 포 : 1950.03.27일 서울 예지동 (안영달(安永達)의 밀고)
• 학 력 : 휘문고등 보통학교 → 동맹휴학 주도ㆍ퇴학 →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 → 자퇴(학비 부담)
• 경 력 : 조선공산당 서기국원ㆍ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함경남도 북청"의 가난한 화전민 가정 출신이다. 1909년 아버지가 "의병활동을 하였다"고 의심을 받아, 가족 모두 "원산"으로 이사했다. 생활이 어려워,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다가, 1914년 "원산 광성학교"에 입학하고, 1917년 "보광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보광학교 3학년" 재학 중에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교사의 유인물 제작을 도왔다가 이 사실이 탄로나 형이 있던 "갑산"으로 피신했다. 그 후 "원산"에서 "객주 집 심부름꾼ㆍ일본인 상점 점원ㆍ우편국 배달부" 등을 전전했다.
생계를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경성부"로 올라와, 1921년 "휘문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3년 3학년 때에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가 퇴학당하여, 졸업은 하지 못했다. 1924년 경,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에서 수학했다. 이 무렵,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였고, "지바(千葉)"에서 "공산청년동맹"에 참여했다. 같은 해, 학비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자퇴한 뒤, 귀국했다.
1928년부터, "일본"에서 귀국 후, "원산부두"에서 "화물운반 날품팔이"로 일하면서, "원산노동연합회" 재건에 힘썼고, 1929년 "조선공산당 재조직 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1931년, "정달헌" 등과 "평양노동연맹 좌익위원회"를 조직하고, "태평양노동조합 함경남도 책임위원"을 맡았다가, 소위 "제1차 태로 사건(태평양노동조합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고 1936년까지 복역했다. 출옥한 뒤, "원산"으로 돌아와, "적색노동조합운동"에 착수했다. 1937년, "최용달" 등과 "원산 공산주의자그룹"을 결성했으나, 조직이 노출되어, "흥남ㆍ원산ㆍ평양ㆍ진남포" 등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1945.08월 해방 직후, "원산"에서 "조선공산당 함경남도지구위원회ㆍ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 "조선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2월 당 요청에 따라 월남해, 1946.11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1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8.08월 이후,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을 지도했고,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03.27.일, 서울 예지동에서 "안영달(安永達)"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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