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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사건- 50.03 : 김삼룡 (남로당 총책)ㆍ이주하 사건 (김삼룡 고문)

by 당대 제일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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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08.15일 해방이후,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남한정부 전복을 기도하던 "남로당"의 핵심간부 "김삼룡 (金三龍ㆍ1908~1950.06.28ㆍ42세ㆍ가난한 소작인의 아들)ㆍ이주하 (李舟河ㆍ1905~1950.06.28ㆍ45세ㆍ가난한 화전민 가정 출신김삼룡의 고문 격)"이 1950.03.27~28일 체포되기까지의 사건이다.

 

1. 김삼룡이주하 사건 (金三龍李舟河 事件)

"북한"은 북쪽에 억류된 "조만식"과 "김삼룡ㆍ이주하"의 교환을 위한 "남북협상" 일정을 06.23일로 정하는 등 교환을 요구한 바도 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06.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수감되어 있던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06.28일 즉결 처형되었다.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실패로 끝나고, "미국"에 의해 "한국문제 UN 이관"이 선언되자, 이에 반대하였던 "남한의 공산주의계열"은 1948년 이른바 "2ㆍ27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선언한다.

"김삼룡ㆍ이주하"는 "남로당 핵심당원"으로서, "공산당"이 불법단체로 그 활동이 인정되지 않자, "지하당"으로 비합법적으로 활동하였다. "김삼룡"은 체포되기 전까지, 3년 동안 서울에 잔류하며, "남조선노동당 남한총책"으로 "북한"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남한"에서의 "남로당 지하활동"을 지휘하였다. "이주하"는 "남로당 정치국원"으로서 "1급 정치참모"로 활약하던 중, "북로당ㆍ남로당"의 합당에 즈음 월북하였다가, "김삼룡의 고문" 격으로 다시 남하하였다. 이들은 남한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남한 단독총선거 저지" 활동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남로당원들"의 활동에 대해 "선우종원ㆍ정희택" 등이 주축이 된 수사진은 이들을 3년여 동안 추적한 끝에, 1950.03.27일 서울 예지동에서 "이주하"를, 03.28일 서울 아현동에서 "김삼룡"을 체포하였다. "김삼룡"은 체포될 당시, "엿장수"로 가장하고 7개의 색안경을 갖고 있었다. 세칭 "7개의 얼굴"이라 불릴 정도로 변장에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삼룡ㆍ이주하"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1950.06.26일에 집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김삼룡ㆍ이주하"는 남침을 준비 중이던 "북한 공산집단"에 의해서 "위장평화공세"에 이용되었다.  즉, 1950.06.10일, 북한은 강제 억류중인 "조만식(曺晩植) 부자"와 교환하자고 제의해 왔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06.16일 그 제의를 수락하였지만, 북한은 06.20일로 교환일자를 일방적으로 연기하는 등의 지연술을 펼치다가, 06.25일 남침을 감행하였다.

북한은 감금중인 "고당 조만식 (古堂 曺晩植ㆍ1883~1950ㆍ67세)" 선생을 "김삼룡ㆍ이주하"와 맞교환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더니 "6.25" 발발 보름 전인 1950.06.11일 "북한"은 "이인규(李寅奎)ㆍ김재창(金在昌)ㆍ김태홍(金泰弘)"에게 "평화호소문"을 소지한 특사를 파견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조만식 선생을 먼저 보내주면, 김삼룡ㆍ이주하를 보내주겠다"는 회신을 06.23일 방송으로 보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06.25일 새벽, 38선을 넘어 남침을 했다. "김삼룡ㆍ이주하"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6ㆍ25전쟁 개시 직후인 06.28일 오후 3시 "남산 숲속"에서 총살당했다.

김삼룡

2. 김삼룡ㆍ이주하 검거 일화

① "김삼룡 (남로당 총책)"의 정체

1950.03월. "서울 종로6가 6통 6반" 어느 골목에는 "이성희"라는 문패가 붙어있었다. 기와집인데, 허구헌 날 대문은 닫혀있었다. 대문이 열린 것은 봤다는 주민이 없었다. 대문 옆 문간방에는 야채와 술을 파는 아기자기한 잡화상이 있었다.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주인인 그는 "이세범(李世範ㆍ26)"이라고 불렸다. 잡화상 손님이 가끔씩 늘 굳게 닫혀있는 집주인을 물으면, 그도 "집주인에 대해 잘모르겠다고" 말했다. "글쎄요. 저도 셋방살이 신세라서 자세히 모릅니다.  듣기로는 이북에서 온 전재민이라는 얘기가 돌기는 합디다만" 그는 집주인과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하루에 몇 차례씩 "이세범"은 40세 안팎으로 보이는 "이성희"라는 남자와 집안에서 만나 수군 대곤했다. 너댓 평쯤 돼 보이는 집 안마당에는 정성을 들여 가꾼 꽃밭이며, 기르는 토끼도 몇마리가 뛰어 다녔다. 주민들은 "이성희"라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저 집 남자는 외출도 않고, 빈둥빈둥 놀고 먹으니, 얼마나 좋을 까. 상팔자다. 상팔자야.  언제 우리도 저 사람처럼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할 수 있지?"

"관할 등기부등본"에 기재된 내용에는 "온돌방(3칸)ㆍ사랑방(1칸)ㆍ부엌ㆍ마루(2칸)"로 되어있다. 동거인은 5명. "주인 부부ㆍ딸 2명ㆍ하녀 1명" 정도였다. 그리고 약 3년 전에 이사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의문의 남자는 밤에만 외출을 하고, 낮에는 일체 눈에 띠지 않았다. 갈수록 소문이 나빠지자, 그는 극우 보수단체인 "대한 청년단"에 찬조금을 내고, 특별회원으로 등록되었다. 그 뒤 동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뭐라고? 그 집주인이 남로당 총책이라고? 그 절름발이는 남로당 핵심당원이구? 세상이 놀랍네.  담을 두고 사는 사이에 금쪽 같이 속아서 살았네." 주민들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면서, "이세범ㆍ이성희"라는 사람의 신변이 위태로워졌다. "같은 동네에 3년이나 함께 살면서 온갖 흉계를 다 꾸며온 남로당 총책이라니?" 일찍이 대문밖에 외출 1번 안한 그가 바로 남로당 총책 "김삼룡"이었다.

그리고 잡화상을 하던 "이세범(李世範ㆍ26)"은 바로 "김삼룡"의 심복이자, 연락원이었다. 지난날 "은행원"으로, "남로당 세포"로, "김삼룡"에게 충성을 다해왔다. 그의 임무는 외부와의 연락을 전담하는 자였다 "김삼룡"은 일찍이 사진이라는 것은 찍어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고작 당원들 뿐이다. 그는 변장술에 뛰어났다. 하루에도 몇 사람의 얼굴로 변신, 행세해도 모를 지경이었다. 엿장수로 가장한 그가 "서울 서대문 아현동"에서 체포되었을 때, 몸수색을 해보니 선글라스가 7개 나왔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잡화상을 하고, 한편에서는 새ㆍ토끼를 길렀으며, "극우단체 대한청년단"에 찬조하는 수십개의 얼굴로 살았다.

② "선우종원ㆍ오제도" 검사 지휘

당시 "서울지검 선우종원(鮮于宗源ㆍ1918~2014) 검사"가 "김삼룡"을 체포했다. 훗날 "선우종원"이 쓴 "나의 법조회고록 (2003.04.4.일ㆍ법률신문 게재)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선우" 검사는 1918년 "평남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아들 "선우중호"는 평화의 댐 건설에 참여하였으며, "서울대 총장ㆍ광주과학기술원 총장"을 지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1.12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8ㆍ15 광복" 후부터 "6ㆍ25 전쟁" 때까지, "오제도 검사" 등과 함께 활동했다. 이후에는 "이승만 정부"와 거리를 두고, "장면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1960년, "한국조폐공사 사장"에 이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 1966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1971~1976년까지 "국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특히, "사무총장" 때, "여의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신축에 관여했고, 1981~1997년까지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낸 뒤, 변호사로 활동했다.

"선우종원"이 쓴 "남로당 총책 김삼룡ㆍ정치고문 이주하 체포"에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나(선우종원)는 일본 출장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로당 총책인 김삼룡과 정치고문인 이주 하의 행방을 찾던 중, 1950년 3월 초 당시 김삼룡의 비서인 "김형륙"을 체포했다. 주 1회 접선하기로 되어있는 서울 필동 "가두연락선"에서 잡혀, 우리 손으로 넘어온 "김형륙"은 "모든 일이 끝났다"는 듯 알고 있던 비밀을 하나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김형륙"의 진술로 드러난 "김삼룡"의 아지트는 수사진의 습격을 받았던 "효제동 반찬가게"를 비롯해서 "이태원ㆍ공덕동" 등 7군데나 됐다. 수사진은 낮에는 "농림 모에 수염을 붙이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는 "김삼룡"의 생활을 보고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지트를 지키고 있는 주인은 모두 여인으로, 다시 말해 "김삼룡"의 소실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매일 밤, 지하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여인의 품속에서 즐기는 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효제동 아지트" 관리자인 여인이 "대한부인회 효제동 분회"의 부회장이었다. 그러니 그 누가 "남로당"의 총수인 "김삼룡"이 그곳에 숨어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침내 1950.03.24일을 거사일로 잡고, 신중하게 체포작전을 폈다. 나는 잠복해 있던 형사로부터 "김삼룡"이 자전거를 끌고, 효제동 아지트에 들어간 사실을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검찰ㆍ서울시경 수뇌부"는 "김삼룡"을 체포하기 위해 재빨리 병력배치를 하고, 03.15일 자정을 기하여 출동명령을 내렸다. "효제동 아지트" 근처 요소마다 형사들을 배치하고, "오제도 검사ㆍ홍민표 경위"에게 진두지휘를 맡겼다. 또 집 주위 뒷담은 동원된 "경찰학교 학생들"에게 맡겼다."

이렇게 철통같은 태세를 갖추고 출동한 수사대가 "효제동 집"을 덮치고 보니 "김삼룡"의 행방이 묘연했다. 방이라곤 2개 밖에 없고, 블록으로 쌓은 뒷담은 높이가 1길 반에, 위에는 철조망까지 둘러 있어 어디도 도망갈 곳이라곤 없는 상황이었다.  뒤꼍으로 달려간 수사대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로 망칠 수 없는 곳처럼 보였던 뒷담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요란한 대문 소리에 놀란 "김삼룡"은 잠옷 바람에 뒷담을 힘껏 발로 차고 뚫어진 구멍으로 빠져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뒷담 경비를 맡았던 "경찰학교 학생들"은 담이 무너지는 줄 알고 놀라서 모두 도망쳐버렸으니 더욱 기막힌 노릇이었다.

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골목길을 자세히 살펴보니 핏자국이 보였다. 용기를 얻은 수사진은 핏자국을 따라 추격에 박차를 가했지만, "동숭동" 뒷산인 "낙산"에서 핏자국은 이미 빗물에 씻겨 흔적도 찾기 힘들었다.

③ 검ㆍ경, "김삼룡" 수배작전 중에, "이주하(남로당 거물)"도 체포

수사진은 "서울시경 사찰과 분실"로 연행한 "김삼룡 처ㆍ절름발이 청년(가명, 이세범)"에게 "김삼룡"의 행방을 채근했다. 그 절름발이 청년은 "김삼룡"이 자주 간다는 "예지동 집"을 알려줬고, 수사진은 지체없이 그 집을 덮쳤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거물을 잡게 됐다. 바로 "이주하"를 잡은 것이었다.

"이주하"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지식인으로, "남로당"에서는 드물게 보는 인텔리였다. 이렇게 "이주하"를 체포해, "사찰과 분실"로 연행하는 도중, 차 안에서의 그의 행동이 수상했다.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비틀었다. 수사관들은 육감적으로 "아차, 독(毒)을 먹었구나"는 생각과 함께,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한 뒤, 즉각 의사를 불러 강제로 "위(胃) 세척"을 했다. 순간 이물질이 쏟아져 나왔다. "차라리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이주하"의 독백이었다.

④ "김삼룡 (남로당 총책)" 체포

이런 소란 속에서도 수사진의 초점은 "김삼룡"의 행방을 쫒는데 집중됐다. 당시 "치안국 수사진"에는 "큰박이"란 별명을 가진 "송영달"이란 전향자가 있었는데, "이제 부상당한 김상룡이 갈만한 곳은 북아현동 모 의사집 밖에 없다."고 추리했다. 그의 추리는 그대로 들어 맞았다. "치안국 수사대"는 03.15일, 마침내 "이한영 경감" 지휘 아래, "북아현동 모 의사집"을 덮쳐 "남로당 당수" 격인 "김삼룡"을 체포했다.

체포된 "김삼룡"은 190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1939년 "박헌영ㆍ이현상ㆍ이관술" 등과 비밀 공산주의운동단체인 "경성콤그룹"을 조직, 조직부장 겸 노동부장으로 활동했다. 그 단체는 "제1차 조선공산당"의 노선을 계승하여, 공장ㆍ지방ㆍ학생층에도 조직을 구성하였다. 1940년 일제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됐으나, 8ㆍ15 해방 다음날 출감했다.

당시 "광주"에 피신해 있던 "박헌영"은 "이순금(李順今ㆍ뒤에 김삼룡과 결혼함)"을 "전주"로 보내 연락한 뒤, 18일 "전주"에서 "김삼룡"을 만나, 19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08.21일, 옛 "경성콤그룹" 동지들을 모아,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5.09.11.일, "재건준비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박헌영"을 총비서로 하여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이영ㆍ정백ㆍ최창익" 등의 "연안파"를 흡수하였고, "김삼룡"은 "이현상ㆍ김형선" 등과 함께 핵심적인 조직국 간부를 맡았다.

1946.02월,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민족주의민족전선 대의원"을 지냈으며, 그해 11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6.09월,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박헌영"이 월북하자, "남조선노동당"을 책임지도하다가 1950.0 3.27일 "서울 아현동" 은신처에서 체포된 것이다. 조직원들이 거의 체포된 상태에서 끝까지 전향하지 않은 그의 체포는 사실상 남한에 산재해 있던 "남로당"의 붕괴를 의미했다.

체포 당시, "김삼룡"의 웃저고리에서 약봉지가 나왔다. 이상하게 여긴 "오제도 검사"가 "무슨 약이냐?, 왜 가지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삼룡이 답한다. "당의 생명이란 대중이 지지하는 토대 위에서 설 수 있는 조직이라야 강력한 조직으로서 유지되는 것인데, 이제 어쩔수 없게 되었소. 강력한 조직을 가졌을 때는 나도 내로라하고 맘놓고 대로를 확보했던 것이지만 이제 때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당의 조직을 통하여 우리를 쫓는 수사망에 대한 정보 같은 것은 밤낮을 통하여 보고되어 왔소.  위급할 때는 당의 조직을 통한 아지트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호신(護身)이 되었습니다"

"허나 그동안 동지들이 체포되는 동안에 국민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생기고, 또 차츰차츰 이에 따라 조직으로부터 일반 대중이 이탈하기 시작하니, 당 조직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나는 그리하여 길잃은 나그네처럼 되어버리니 신세라는 것을 알고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소. 이미 손발이 잘려나간 병신이나 다름 없으니, 움질 수 없게 된 것이오.  모든 정보의 손발이 그 조직의 와해와 함께 맞아들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낸들 어떻게 하겠소. 그래서 이런 만일의 경우, 체포에 대비해 음독이라도 하여 자살로써 최후를 마칠까하여 갖고 다녔소."

"오 검사"가 "잡힐 줄 알면서 이북으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다시 물었다. "도망? 탈출? 그것은 안될 말씀입니다. 당이 송두리째 뿌리가 뽑히도록 제처두고 나서 나만이 무슨 면목으로 월북할 수 있겠소. 가명 도리어 욕을 보게 되어, 더욱 박헌영 선생이 지금 이북에서 얼마나 설움을 받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 검사"가 "당신은 조직만들기의 권위자라는데, 그 자신있는 조직이 파괴됐다는 것이냐"고 묻는다. "낸들 알수 없소. 지금의 심경을 말하자면, 패전지장이라 날 수 있소이다.  패전지장이 자위 변호를 해 본들 이제 뭤하겠소"

"오 검사"는 "당신이 본 대한민국을 말해 보라"고 물었다. "글쎄요. 다른 것은 그만두고, 우리를 일망타진하는 당국의 솜씨가 놀랍구려.  전향포섭에도 퍽 신경쓰시는 모양인데 탄복을 금치 못하겠소. 아까 검사님이 조직의 권위자라는데 나는 패배한 셈이요. 사실 나로선 처음에 상당히 자신을 갖고 일했소.  그러나 갈수록 조직의 이구석 저구석이 자꾸 무너지고, 허물어질 때마다 거점을 상실하고 말 았소. 우리들의 조직은 강하고 교묘하여 감히 허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를 쫒는 수사망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소  그 산 증거로는 무엇보다도 내 스스로가 이렇게 체포되었다는 사실이오."

⑤. "김삼룡"은 끝끝내 "묵비권", "이주하"는 쉽게 "진술"

"김삼룡"은 곧바로 "서울 남창동"에 있는 "치안국사찰과 중앙분실"로 연행됐다. 거기서 옛 동지인 "홍민표 경위(전 남로당 서울시당 부책임자)"와 대면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미안합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홍 경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조선 전복을 위해 힘을 합쳤던 동지가 이젠 정반대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었으니 그들의 심정은 착잡하였을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김삼룡"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홍경위가 입을 열었다. "이젠 서로 입장이 다르게 되었으니, 여러 가지로 이해해 줘야 하겠습니다" "알겠소" 이 말은 "김삼룡"이 체포된 후, 말한 첫마디이자 유일한 말이었다. 잡혀 온 직후부터 "김삼룡"은 수사관의 어떠한 물음에도 그저 "픽"하고 웃을 뿐, 철저하게 "묵비권"을 행사했다. 취조의 방향은 "대남유격대ㆍ남로당의 비상연락선"을 알아 내는데 있었다.

그러나 "김삼룡"의 굳게 닫힌 입은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수사진은 마지막 방법으로 "효제동"에 있는 3살 난 아들과 처를 시켜, 전향해서 함께 살도록 권유도 했으나, 그의 입을 여는데는 허사였다. 이에 비해, "김삼룡" 체포단계에서 우연히 잡히게 된 "이주하(남로당 정치고문)"는 검거된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순순히 털어놓았다.

"이주하"는 "함남 북청(北靑)" 출생으로, "조선공산당 서기국원ㆍ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낸 좌익세력의 중심 인물이다. 1913년, "원산 광성학교"에 입학하고, 3년 뒤 "보광학교"로 옮겨 3학년 때인 1919년에 "3ㆍ1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갑산(甲山)"으로 피신했다. 이후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정치학과"를 다니면서, "지방공산청년동맹"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1928년, "원산 총파업사건" 이후 노동운동 조직을 재건하고, 1931년 "정재헌"등과 함께 "평양노동연맹 좌익화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 원산시 당 책임자ㆍ태평양노동조합 함남 책임위원"을 지내던 중, 1932년 "일경"에 체포되어, 5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1937년 "원산철도국 사건"에 연루되어, "진남포"로 피신하여 숨어지내다가, 1945년 "8ㆍ15광복" 이후 활동을 재개, "조선공산당 함남지구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월남하여, "박헌영ㆍ이강국" 등과 함께 "재건조선공산당정치국"에서 활동하면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냈다. 1946.12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에 뽑혔다. "박헌영"이 월북한 뒤, 총책을 맡은 "김삼룡"을 보좌하여 활동하던 중, 1950.03월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이주하" 역시 자기 사진을 남긴 적이 없기에, 수사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검사가 "이주하"에게 "당신이 신봉하는 공산주의는 무엇이기에 신봉하나"라고 물었다. "이주하"는 "계급이 없는 사회, 평등한 사회, 자유로운 사회가 왜 좋지 않소?  우리들이 참으로 노동자. 농민을 토대로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싸우고 있소" 

검사가 "그렇게 평등하고 자유로운데, 매일 수백명씩 남하하고 있소. 진실 민주주의를 실시한데는데 왜 노동자와 농민이 남하한단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이주하"는 "그것은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의 소행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렇게 친일파 민족자가 많단 말이냐"고 물었다.

검사의 말에 화를 벌컥 낸 "이주하"는 엉뚱한 답변을 한다. "당신과 같은 검사는 반동 검사니까, 그렇게만 해석하는 거요" 검사와의 문답은 계속된다. "당신들은 걸핏하면 인민을 위한다고 상투적인 선전을 하는데, 그토록 인민을 위한다면 양민들이 무수히 죽는 이유가 뭔가. 아무 죄없는 양민들을 죽인다는 말인가?" "이주하"는 고개를 여러번 흔들더니, "난 그런 것 모르오. 그것은 반동진영에서 위조한 것이겠지요" 검사는 "여보시오. 이혁(李革)가족 살해사건도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라고 추궁했다. "이주하"는 계속해서 모른다고 잡아뗐다.

⑥ "이주하"의 전향움직임ㆍ북한의 "조만식"과 맞교환 제의

1달 쯤 지나서, "오제도 검사"가 "이주하"를 만났다.  이 : 오 선생, 안녕하십니까?. 잠깐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 무슨 말이오    이 : 나는 여러가지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 그게 무슨 뜻입니까?     : 난 공산주의에 대해여 일종에 환멸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 :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지지하겠다는 겁니까?     : 글쎄요, 아니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 : 그렇다면 이제부터 공산당을 어떻게 하겠소?     : 그야 쳐 부셔야 합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주하"의 이 같은 생각은 기적에 가까운 "사상전향 의사"였다. "김삼룡ㆍ이주하"가 체포됐다는 소식은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들은 "김삼룡ㆍ이주하"의 체포는 곧 남한 내 있어서 공산주의 활동의 완전 차단됐음을 의미한다. "김삼룡ㆍ이주하"가 "특경대"에 붙잡힌 것은 1950.03.27.일이었고, 곧 "정태식"까지 붙잡혀 "남로당 지도부"가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평양 근교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는 "남로당" 핵심 가운데 단 두 사람 이름만 있다고 한다.

1950.05.17일, "특별군사재판 법정"에서 하였다는 "김삼룡" 마지막 말은 딱 한마디였다. "아무런 할 말이 없으니, 나를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죽여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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