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공산주의 (남로당ㆍ빨치산ㆍ연안파ㆍ소련파)

파- 빨치산 : 김일성 ② 논란ㆍ의혹ㆍ평가ㆍ비판ㆍ연보

by 당대 제일 2022. 11. 1.
반응형

 

"김일성 (金日成ㆍ김성주(金成柱)ㆍ1912~1994ㆍ82세)"의 "공식 사망 장소"는 "평양 주석 집무실"이지만, "묘향산 향산 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제기된 배경에는, "김일성"이 요양을 하려고, "향산 초대소"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김정일이 향산 초대소를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1. 논란ㆍ의혹

① 사망 장소ㆍ암살ㆍ사망방관 설 논란

그는 오전 6시~ 저녁 10시까지 (16시간 이상)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타고난 체력ㆍ정신력으로 장시간 "정무"를 강행하였으나, 70대 이후부터는 체력의 한계를 불러, "목 뒤의 물 혹ㆍ당뇨ㆍ감기ㆍ피부병" 등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고, 만년에는 간혹 "졸도"하기도 했다.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의 상황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김정일에 의한 암살"이나 "사망 방관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또한 "대남정책 문제"로 아들 "김정일"과 갈등이 빚어져서,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② 독립운동가 "김일성" 진위 논쟁

이력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이는 북한 측으로서는 그의 이력에 대한 "신격화"가 "주체사상의 수령론"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 중에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여럿이며, 결코 "김성주"가 최초가 아니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미군정"은 "김일성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ㆍ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인 김일성)"으로 가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 다른 주장은 "오영진의 "하나의 증언"ㆍ이명영의 "진위 김일성 열전"ㆍ허동찬의 "김일성 평전"ㆍ 임은의 "북조선왕조 성립 비사""등에 나타나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해방 직후, 집회현장에 나타난 "김성주"가 너무 젊어서, "평양"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며, "김일성 가짜설"의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숙청당한 "박금철"의 증언과 "남로당"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유포한 사람들은 "친일파ㆍ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ㆍ한민당과 같은 우익단체의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분단 상황에서, "이북의 김일성"이 식민지 말기에 "민족적 항일영웅"으로 존경을 받은 "김일성"이라면, 지극히 곤란한 위치에 처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한홍구(성공회대 교수)"에 의하면, "가짜 김일성 설의 고전적 문헌인 이북의 "김일성 위조사"나 오영진의 "하나의 증언"이 한국전쟁 시기에 제작ㆍ배포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그는 "가짜 김일성 설의 유포에 기여한 사람이 박정희"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가짜 김일성 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에 이미 널리 퍼졌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전파되었다.

"이승만"의 경우에는 "반민특위를 물리적으로 와해시키고, 수많은 친일파를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승만을 친일파로 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홍구는 "그러나 5ㆍ16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고,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이름을 가지고, 관동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은 박정희로서는 분단 상황에서 이북과의 정통성 경쟁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젠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평하였다.

"가짜 김일성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책에 "만주 국군"이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1937.11월, "김일성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조금 더 넘겨보면, "죽은 줄 알았던 김일성이 다시 나타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전에 목을 벤 사람은 김 씨 성을 가진 유격대 지도자일 뿐, 김일성은 건재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너무나 허점이 많기 때문에, 일일이 반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홍구"에 의하면, "문제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짜설이라는 것이다.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1945.10.0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이 34살로 너무나 젊었다는 데서 비롯되었고, 당시 평양 공설운동장에 모인 군중이 김일성이 백발을 휘날리는 노장군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가 아니었다."고 반박하였다.

반면 "김성주가 항일운동을 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서대숙" 등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1937.06.04일,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직후, "현상금이 1만 엔"으로 오른 일(항일단체의 위원장 급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다), 그밖에 항일 활동으로 "소련"으로부터 "적기(赤旗)훈장"을 받은 일 등을 근거로 부정한다. "그만한 활동이 있었기에, 그러한 처우를 받았다"는 근거로 보며," 소련 정부가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 김성주에게 훈장을 줄 정도면, 그것은 소련도 인정할 만큼 그의 활동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는 "김일성이 가짜였다면, 독촉(獨促)회의 당시 내각 구성을 숙의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어린 김일성을 군사위원장으로 천거할 수 있었겠느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반문했다.

③ 미화 논란

북한의 공식 기록에는 "김일성"이 비교적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항일 운동가"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자의 능력ㆍ생애를 과대평가하는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김일성의 항일 운동"이 조작되고, 과장되었고, 문인들은 "김일성 찬양"에 앞장섰다. "김일성"은 1946년 위대한 "태양"으로 예찬되었으며, "김일성"을 민족의 양심이고, 의지이며, 민족의 신념이며 희망으로서, 민족의 샛별로 묘사한 "조기천"의 약 3,000여 행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은 1947년 "북조선 예술축전"에서 1등상을 받고, 각 학교의 교과교재로 채택ㆍ사용되었다.

"신형기"는 "김일성"의 과거의 영웅적 풍모를 알리는 일화ㆍ기사ㆍ문학작품들은 특별한 기획이나 지도의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북한에서는 그의 "배움의 천리 길"을 기념하는데, 이는 그가 1921년 "만주 바다오거우"에서 "칠골"로 유학한 일이라는 설과 1925년 "칠골"에서 "만주"로 건너간 일이라는 설이 있다.

2. 긍정적 평가

① 항일 독립운동 공적

"항일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고 알려지는데, "보천보 전투(1937.06.04일,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에서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일제시기 동안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반공체제 하에서는 "김일성"은 "독립운동가"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1985ㆍ1986년 이후, 한국의 일부 역사학계ㆍ학생 운동권 등에서는 "김일성이 북한에서 독재를 한 것ㆍ한국전쟁의 주요 가담자"라는 것과는 별개로,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은 인정해야 된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② 경제 성장천리마 운동 (1956년)ㆍ산업시설 육성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ㆍ공업화"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정책들을 입안했다. 1956년, "남포 시"에 있는 "제철공장" 방문한 뒤, "천리마 운동"을 실시하였다. "천리마운동" 기간에는 공업 현대화가 진행되고 남포항과 평양역 같은 산업교통시설이 복원되었다. 지방 여러 곳에 "발전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1990년대에 들어서자,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달리, 발전된 "공업국가"에서 생활수준이 낙후된 농업국가가 되었다.

③ 외교 관계

북한은 "루마니아ㆍ짐바브웨" 등의 일부 "유럽ㆍ아프리카" 국가들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형성했다. 생전에 70여개 국가와 국제기구들로부터 180여개의 최고훈장과 메달ㆍ30여개 도시의 명예시민 칭호ㆍ20여개의 이름 있는 다른 나라 대학으로부터 명예교수 및 명예박사 칭호ㆍ169개 국가 및 당, 정부 수반들과 진보인사들로부터 16만 5,920여 점의 선물을 받았다. 특히 "김일성"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루마니아)ㆍ로버트 무가베(짐바브웨)" 등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이렇게 맺어진 "의형제"들 중에 "큰 형"이 되었다. "미국"과는 "한국전쟁" 이후 적대적이었으나, 1970년대부터는 "미국 지도자"들과도 회담을 하였고, 1992년부터는 "개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3.정적 평가

① 1950년 "6ㆍ25 한국 전쟁"의 최고 주범 (박헌영과 함께)

인권을 말살하는 "스탈린주의"를 엄격하게 고수했고,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에 기초해, 제시된 "주체사상"을 "통치 이데올로기 화"하면서, "독재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켰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상대로 끈질기게 남침을 허락해달라고 48회나 요구했고, "스탈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남침을 허락하고 만다. 이 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통제관으로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

② 정적 탄압ㆍ1당 독재화

"6ㆍ25 한국 전쟁" 이후, 권력 강화ㆍ집권을 위해, "연안파ㆍ조선 국내파ㆍ중국파ㆍ소련파"를 비롯한 다수의 "공산주의ㆍ사회주의자"들을 대량 숙청하는 등, 정치탄압을 가하였다. 그는 최초에는 명망 높은 "공산주의자"인 "최용건"을 앞세워서 "독재"를 실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6ㆍ25 한국 전쟁" 패전의 책임을 물어, "공산주의ㆍ사회주의자"들을 대량 숙청했다. 또한 "정치 지도원"을 적극 활용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감시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아, "공산주의"와는 동떨어진 "세습체제"를 구축하였다.

③ 공화국 정부수립 시, 친일파 중용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친일파를 강력하게 숙청하였음"을 공언하였으나, 실상은 상당수의 "친일파"를 "요직"에 등용했음으로, 해방 직후 "남한"에서보다 "북조선"에서 "친일파 청산이 훨씬 더 잘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김영주(김일성의 동생)"는 "독립 운동가"를 색출하던 "일제 관동군"에서 "통역"으로 복무하였다. "장헌근(사법부장)은 일제 중추원 참의ㆍ강량욱(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일제하 도의원, 리승엽 (남로당 2인자)는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ㆍ정국은(문화선전성 부부상)은 일제 밀정ㆍ김정제(민족보위성 부상)은 일제하 관료"였다. "조일명(문화선전성 부상)"은 친일사상 교양단체였던 "대화숙" 출신으로 학도병 지원 유세를 주도했다. "김정제(군사분야 담당ㆍ보위성 부상)"은 "양주 군수"를 지내는 동안, "일제"에 협력했다. "이활(초대 공군사령관)ㆍ허민국(인민군 9사단장)ㆍ강치우(인민군 기술부사단장)" 등은 "가미가제 폭격요원"을 양성하는 학교인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④ 경제 정책 실패, 파탄

"북한"은 1960년대까지 "한국의 2배 이상 경제력"을 유지해왔으나, 이는 "소련의 무상지원 13억 루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ㆍ중화인민공화국"의 막대한 지원 덕분이었다. 1970년대 이후, "소련ㆍ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이 어려워졌다. 국제환경의 변화도 "경제 건설의 집중도"를 떨어뜨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는 1950년대 중반 "중ㆍ소 분쟁" 이후, 1960년대 들어, "한 일 국교"가 수립되자 "미국 제국주의ㆍ소련 수정주의ㆍ중국 교조주의ㆍ일본 군국주의에 포위되었다."고 인식하면서, "자립경제노선"을 더욱 강조했다. 여기에, 줄곧 국민총생산 20~30% 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며 ,"4대 군사노선"을 강조했다.

1970년대, 그는 "주체사상"을 명기한 "사회주의 헌법"을 발표한다. "주체사상"이 사상변화를 추동할 여지를 극도로 좁히게 만들어, "민주화운동ㆍ시민의식"을 크게 저하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어 "생산력 저하 문제"를 극도로 심화시켰다. 이 시기 그는 "사상 사업"을 강조해, "국유화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시장ㆍ개인 영농ㆍ상공업의 자율성을 전면 부정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그가 사망할 무렵, 최악에 이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외국의 무상 식량지원" 없이는 버틸 수 없게 만든, "외세 의존적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그는 경제적으로 "공업"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 값이 폭등하고,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하여 "산림"을 파괴시켜, 그로 인해 "식량생산의 자급률"이 떨어지는 등 농업의 쇠퇴를 야기했다. 게다가 "경제개발"은 점점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오직 "자신의 우상화"에만 전력투구했기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거의 "국가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1980년대에는 "국채"를 대량 발행하고, 외국에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으며, 게다가 북한은 이 부채를 갚을 티끌만큼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은 이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많다.

 북한이 각국에 진 부채 :  총계 103 억 $ (단위 : $) 

• 중 국 : 69억 8천만      • 이 란 : 3억       오스트리아 : 2억 1천만       러시아 : 11       독 일 : 3       시리아 : 14천만       일 본 : 4       프랑스 : 28천만       스위스 : 1       스웨덴 : 33천만       태 국 : 26천만       대 만 : 86백만

4. 연 보

1912.04 : 출생 - 평남도 평양부 (, 평양 만경대)  →  1919 : "팔도구 소학교" 입학    1923.03 : 외척이 교사로 있는 "칠골의 창덕소학교전학    1925 : "만주 푸쑹소학교전학"길림성 유원중학교진학    1926.06 : 김형직(아버지사망

1926.10 : .(타도제국주의 동맹공산주의 소년단체)의 조직 가담    1929 : "유원 중" 3년 재학 중불순사상 혐의로 "중국 군벌"에 체포  수감 중 유원중학교에서 퇴학  "화성의숙" 입학    1930.05 : 출옥

1930.06 : "카룬회의"를 주관하고, "조선 혁명군" 조직    1931 : "화성의숙졸업"조선공산 청년회가입    1934 : "동북인민혁명군 제3"으로 배속되어, "3단 정치위원"에 임명    1936.03 : "동북항일연군 제2정치위원회 위원    05 : 항일 통합조직 "조국 광복회결성에 참여    06 : "동북항일연군"이 편제개편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배속ㆍ1로군 6사단장ㆍ"함경남도"에서 "보천보 전투"를 지휘(25)"일본군과 경찰관서" 습격

1940.03 : "허룽현 훙치허"에서 "훙치허 전투"를 지휘  일본인 100여 명을 사살30여 명 생포 / 탄약양곡을 전리품으로 획득    1940 :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 (소련인민군 육군 소위) "소련군 대위" "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간 복무

1945.08 : "동북항일연군"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 결성에 참여ㆍ"소련군 소좌(소령)으로 진급귀국    1945.09 : 평양 도착 (33)    1945.10 : "소련군 소좌(소령)"에서 예편 

1945.10 :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10.08~09)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협의ㆍ"38도선 이북"에도 "당 본부를 설치한다."는 주장에 "박헌영"이 거절  "분국" 형식으로 당을 조직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  조공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에 선출 (당수- 김용범)

1945.12 : 11월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장악  12월에 "김용범"을 몰아내고, "책임비서"로 선출  1946.02 :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민족주의민주전선 북조선지부" 위원장  1946.03 : "31 27주년 기념회(평양)" 주관 시에 "백의사 단원"이 던진 폭탄을 피해, 단상에서 뛰어 내림 이때 그를 감싼 "소련군 중위 노비첸코"는 오른 팔을 잃음"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북조선 공산당"으로 개명하고, "당수" 취임  "북조선 공산당"을 다시 "북조선 로동당"으로 당명 개명  1946.06 : "민주주의민족전선 북조선지부" 산하정당 소집"임시정부" 수립계획 논의  1948.02 : 조선인민군 창건최고인민회의 조직대의원에 선출

1948.03 : "김구"의 남북협상 제안 수용  04 : "1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주관 (평양직할시)  09 : "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주관 (황해남도 해주군)ㆍ"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초대 총리"에 선출  1949.06 : 통합 "조선 로동당" 위원장

1950.06 : "625 한국 전쟁" 발발  07 :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  1953.02 :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공화국 최초의 "조선인민군 원수"로 추대ㆍ"박헌영" 실각 "남로당" 출신자들 처형  1956.07 : "박헌영" 처형

1958.03 : "무력"으로 "최고인민회의" 장악,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을 강제 해임  실각 11 : "김원봉" 숙청 처형

1960.03 : "마산" "부정선거 시위"를 보고, "이승만 퇴진"을 예견  1970 : "조선로동당 전당대회(5)"에서,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 선출  1972 : "남북고위급 회담" "박정희"에게 제안  "사절단" 교환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05 :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평화민족 대단결) 발표 10 : "국가 주석" 취임, 동시에 "국방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선출 1980.10 : "조선로동당 전당대회(6)"에서,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

1983 : 국채 대량 발행  1989.01 : "신년사"에서 "남북 정치 협상" 제의 : 문익환(목사)백기완(민중/노동운동가)김수환(추기경)남한의 각 정당 당수사회단체 대표 등을 "평양"으로 초청

1989.03 : 문익환(목사) 방북 - 2차례 회담"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 발표(04.10)  06 : 임수경(한국외국어대 4년 재학 중) "일본 도쿄"를 거쳐 방북면담  1990.05 :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 선출ㆍ"국방위원회"로부터, "위원장"에 재 추대ㆍ"중앙인민위원회"로부터, "수위(首位)"에 추대

1992.04 : "조선인민군 대원수"로 진급  1993.02 : "김영삼 대통령"에게 방북 제의  1994.07 : "묘향산"으로 휴양, 07.08일 사망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