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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산주의 (남로당ㆍ빨치산ㆍ연안파ㆍ소련파)

파- 빨치산 : 김일성 ① (1912)ㆍ박헌영 12살 아래ㆍ반일인민유격대

by 당대 제일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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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金日成ㆍ김성주(金成柱)ㆍ1912~1994ㆍ82세)"는 1930년대부터, "만주"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결성하며,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항일연군"을 이끌며 일본군과의 여러 차례의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했다. 광복 후  반제국ㆍ봉건주의 개혁을 추진했고, 북한 권력을 장악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한 "유일지도체계"를 확립했다. 1950년 내각수상ㆍ군사위원회 위원장ㆍ인민군 총사령관으로 "625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켰다.

 

1. 김일성 (金日成ㆍ김성주(金成柱)ㆍ1912~1994ㆍ향년 82세ㆍ박헌영과 12살 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자조선로동당의 위원장외가 : 3대째 개신교 장로교 목사집안ㆍ반일 인민유격대원(보천보전투)군인(소련군 소좌(소령)소비에트연방 붉은 군대 극동군 제88국제여단)ㆍ제법 고학력인 "중졸"이었지만, 무식했으며, 능력이 부족했다"625 한국전쟁" 당시. "스탈린"은 무려 48번씩이나 거절한 끝에, 전쟁을 허락하고 말았다"김일성 집안" "개신교 집안"이었고, 어머니 "강반석" "강돈욱(장로회 장로)" 딸이었다본인도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밝힌 바 있다.

•  출 생 : 평남 평양부 고순화면 남동 칠곡 (, 평양 만경대외가생가)     •  사 망 : 평남도 평양부 평양 집무실 (평북 향산군 묘향산 향산 초대소)     •   치 : 금수산 기념궁전 유리관 (금수산 의사당)     •  사 인 : 심근경색(새벽 2) 목 뒤의 물 혹당뇨감기피부병     •  : 177cm         취 미 : 독서서예/노래 짓기     •  본 관 : 전주     

•  아 명 : 김성주(金成柱金聖柱): 기둥이 되라는 뜻      •  정 당 : 조선노동당

•  종 교 : 개신교 (장로교 가계 (부모목사집안의 외가 출신)) 양친- 장로교 신자강돈욱(외조부)-강진석(외삼촌)-강량욱(외삼 종조부) 모두 장로교 목사)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추정

내 연 : 한성희 (한영애ㆍ? ~ ?) : 1930년대, "하얼빈"에서 살림을 차렸으나, 난리 통에 이별 → 최희숙 (? ~ ?) : 살림을 차렸으나, 일본인에게 살해

: 김정숙 (金正淑1917~194932) : 최희숙 친구김정일 생모키도 작고 얼굴도 못난 여자 211933"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 반일활동, 1935"항일유격대"활동.  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산(死産)하고, 심한 하혈에 의한 쇼크로 사망 → 1950.01, 홍영숙 (洪永淑홍애연(洪愛姸)1921~ ?)과 결혼했으나 일찍 사망하였는데, 부수상 홍명희(洪命熹1888~196879)의 딸이라고 한다. 홍명희의 쌍둥이 딸인 "홍주경(洪姝瓊1921~ ?장녀)홍무경(洪茂瓊1921~ ?차녀)1명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일성

 김성애 (金聖愛ㆍ1929~2014ㆍ85세ㆍ초명 : 김성팔) :2남 1녀ㆍ김정일과 14살 차ㆍ"한국전쟁" 중, 김일성 집무실 타자 비서출신      : 제갈 씨 (주석궁의 안마사)ㆍ김송죽 (본명 : 조승희)ㆍ김순희

자 녀 : 53녀 -  (김정숙) 1: 김정일(金正日1941~2011) 국방위원장/ - 홍일천성혜림김영숙고영희김옥   /  1: 김경희(1946~ )ㆍ사위- 장성택(1946~2013)   /  2: 김만일(金萬日1944~1947) 평양시 "김일성 관저" 연못에서 김정일과 함께 놀다가 익사       /   (홍영숙) 아이없음

(김성애)  2: 김경진(1952~ )ㆍ사위- 김광섭  /   3: 김평일 (金平日1954~ ) 김정일이 상당히 경계  /   4: 김영일(1955~2000)

(제갈 씨) 5: 김 현(1971~2001) 김정일에 의해 처형     (김송죽ㆍ본명- 조승희)  3녀 : 김백연

기쁨조 (음 팔이) : "가무조행복조 (안마)만족조(성적으로 만족을 주는 조)"로 구성ㆍ1975년 경, "김정일" "김일성"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처음에는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부 모 : : 김형직 (1894~1926ㆍ향년 32) 3형제 중 장남지주집안 묘지기독립운동가 / : 강반석 (1892~1932ㆍ향년 40)

가 족 : 외가 : 외종조부 "강량욱"외조부 "강돈욱"외삼촌 "강진석"- 모두 개신교 장로교 목사ㆍ외조부 : 강돈욱(康敦煜, 1871~1943) 교육자목사 / 외숙부 : 강진석(康晋錫) 목사 

동 생 : 김철주 (金哲柱, 1916~1935)ㆍ동 생 : 김영주 (金英柱, 1920~ ) 일본제국 육군 관동군의 통역관"헌병 보조원" 출신ㆍ사촌 형제 : 김창주 (金昌柱) 정무원 부총리 역임ㆍ고종 사촌 : 김정숙 (허담(정무원 총리)의 처)김신숙 (양형섭(최고인민회의 위원)의 처)

경 력 : 만주 항일 투쟁"625한국전쟁" 참전소비에트 연방 붉은군대 극동군 제88국제여단  1942~1945.10 : 소비에트연방 붉은 군대 육군 대위  1950~1994.07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원수 1948~197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총리)  : 김일(1972~1976)박성철(1976~1977)종옥(1977~1984)강성산(1984~1986)리근모(1986~1988)연형묵(1988~1992)강성산(1992~1998)

상 훈 : 1953.07.28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국기훈장 제1급ㆍ"공화국 영웅" 칭호 3번 수상공화국 3중 영웅

저 서 : 김일성 선집(1953, /)김일성 저작집(1962, 3)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1971)ㆍ김일성 저작선집(1971)세기와 더불어(1994, 8)김일성 전집(2012, 100)

김일성

2. 영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1948.09~ 1972.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12.15~ 1994.07.08일까지 "국가주석"을 지냈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 또는 金聖柱)"였으나, "항일 무장투쟁"을 하면서 "일성"으로 개명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나,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김일성 가짜 설"이 계속 제기되고 있어, 김일성 실체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검증이 필요한 사항이다

일제강점기 때, "반일 인민유격대"에 가입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북조선로동당""소비에트연방 대리자"로 활동하였고, "남북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되었다1948.02, "조선인민군" 창건 뒤, 4월 제1"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김구김규식" 등의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기망했고, 6"2차 회의""해주"에서 개최하였다.

1948.08,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9"내각 총리"가 되었다1950, "소련 스탈린"을 설득해, 그의 승인으로 "625한국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국군UN"에게 패배하여, 현재와 같이 "남과 북"으로 한반도를 나누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 후, "노동력 총동원(천리마 운동)"으로 "북조선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952년에는 "소련파(허가이)" 숙청, 1953년 국내파 공산주의자들(박헌영리승엽)을 숙청했고, 1956.08, "종파사건"으로 "연안파(최창익윤공흠)", 1958년에는 "중국파(김원봉 계열)",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숙청했다. 1960년 이후, "주체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했다.

1972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 "국가주석 직"을 신설하여,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1972,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1993,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이 세습했다1994,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8년에 개정된 "김일성 헌법"에서 정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으나, "영국 인명사전"에는 "세계 10대 독재자"로 선정되었다.  한편, 625한국전쟁 범죄625한국전쟁 장본인 의혹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인권 탄압 등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3. 정적 숙청

"김일성" 생전에, "만약 내가 죽는다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그의 유언과는 달리, "주검"은 방부처리가 되어, "금수산 기념궁전"에 있는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다.

① 1950.10월, 조만식(민족주의자) 처형 : 1945년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북한체제" 협력을 거부하던 "조만식"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한 뒤, 1950.10월에 처형하였다.

② 1951년, 허헌 (최고인민회의 의장) 죽음 : "대동강"에서 익사했는데, 김일성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의혹

③ 1952년, 무정 제거 : "연안파"제거

④ 1958.11월, 김원봉(약산ㆍ최고인민회의 상임부위원장ㆍ노동상ㆍ검열상) 숙청ㆍ처형 : 최대의 경쟁자중 1

⑤ 1953년, 허가이 제거 : 같은 "소련파의 라이벌"제거

⑥ 1955~1956년, 남조선로동당 계열 제거 : 박헌영(외무상ㆍ부총리)ㆍ임화ㆍ이강국 제거ㆍ한국전쟁 패전 누명과 미국 간첩들과 교신했다는 누명

"박헌영(부총리 겸 외무성상)""김일성"의 최대의 경쟁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625한국전쟁"의 실패로 그는 궁지에 몰렸으나, 전쟁 실패 책임을 부총리인 "박헌영"에게 전가시켰다 "한국전쟁 패전책임"을 정적들에게 돌림으로써, "조선" 내에서 자신의 확고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1950.11.07 : 625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박헌영(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⑦ 1958년, 김두봉(연안파 거두ㆍ한글학자) 숙청 : 1956 "8월 종파사건(연안파 간부들이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해 불만 토로)" 주동혐의로 "반혁명 종파분자"로 공격

1953.02.08,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김일성은 "공화국 최초의 조선인민군 원수"가 되어, 칭호는 "김일성 장군"에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되었고, 1953.07.28"공화국 영웅 칭호국기훈장 제일급"을 수여받았다그때부터 "남로당파(박헌영)연안파(김두봉)소련파(허가이)"를 제거하여, 정권을 안정시켰다1953년부터, "박헌영""남조선로동당" 계열에게 "한국전쟁 패전 누명과 미국 간첩들과 교신했다" 누명을 씌워, "임화이강국" 등을 살해하고, "남로당계"를 체포심문고문하였다.

1955.03. "박헌영"을 체포반당 종파행위 등의 누명을 씌워, 외무상부총리 등 공직에서 해임시킨 뒤 , 1955년에서 1956년 사이에 처형하였다"박헌영남로당 계열"의 숙청의 발판을 마련한 "조선로동당 제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모든 정치세력이 공식적으로 "김일성""수령"으로 부르게 되었다

1953, "한국전쟁" 휴전 이후, "연안파""전쟁 책임론"을 주장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김일성""남로당 계열"을 숙청한 뒤, "연안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1955년 이후, "연안파"에 대한 숙청은 서서히 진행되어, 1956"주영하이필규(내무성부상)정률(문화선전부부상)" 등이 처형되었다.

"중국계"였던 "최창익""김일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를 "8월 종파사건"이라 한다"김일성""소련"을 방문할 무렵인 1956.08.30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최창익소련파 박창옥" 등이 "김일성 독재화 반대"를 주장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귀국 후, "김일성"1957"최창익""반당종파 행위"로 숙청하였고, "김일성 권력집중화 일당 독재" 비판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 1964년 숙청했다"이종석""결국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비상상황 속에서, 1인 권력집중이 가속화되면서, 당내에서 일성에 대한 수령 호칭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그러나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강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중화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을 견제감시했다"마오쩌둥"의 지원을 받는 "친중파"친소파 그룹스탈린 사후 스탈린에 비판적이었던 "소련"이 김일성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하면서, "김일성"과 다른 정파 사이에 긴장감견제가 지속되었다.

4. 외모성격종교

① 목 뒤에는 "야구공"과 비슷한 크기의 "혹"이 있었다.

북한의 외과 의사들은 "김일성의 혹"을 제거하지 못하였는데, 그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전 6시~ 저녁 10시까지 (16시간 이상)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타고난 체력ㆍ정신력으로 장시간 "정무"를 강행하였으나, 70대 이후부터는 체력의 한계를 불러, "목 뒤의 물 혹ㆍ당뇨ㆍ감기ㆍ피부병" 등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고, 만년에는 간혹 "졸도"하기도 했다.

② 종교

초기에 "부모"와 "목사 집안"이었던 "외가"의 영향으로 "개신교 장로교 예배당"에 다녔다. 양친이 "장로교 신자"였고, "강돈욱(외조부)ㆍ강진석(외삼촌)ㆍ강량욱(외삼 종조부)"은 모두 "장로교 목사"였으며, 유년기에 "장로교 신자 생활"을 했다는 의견이 있으나, "청년기"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무신론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김일성"이 "신앙활동"을 했다거나, "신앙적이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③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김일성" 좋아했던 책은 "역사ㆍ문학" 책이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고 한다. 1989년, "한국"의 "황석영(소설가)"가 "문익환(목사)" 일행과 방북했을 때, "김일성"은 "황석영"이 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④ "시ㆍ노래"를 좋아하여, 그가 지은 "시ㆍ노래"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때, "동북 인민혁명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에 "보천보 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ㆍ자장가"이다. "사향가"의 내용은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곡이었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인 "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북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시"의 내용은 "국제친선 전람관" 내부에 전시되기도 했다. "김정일의 50돌"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 광명성 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한문"으로 지어졌고, "량강도 삼지연군"에 "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⑤ "서예 활동"에 대해, 적극 참여하였다.

북한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일성 친필 비"는 "황해북도 개성 시"에 있으며,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 려관ㆍ김형직 사범대학", 종합대학 중의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5. 사망 시, 일화추모 행사

"김일성 사망"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김일성 생일날김정일 생일날동상초상화" 앞에 "꽃다발"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다이 시기를 이용해, 한시적으로 "꽃 장사"에 나서는 주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김일성 장례" 당시, 전 인민들을 총동원하여, 매일 "생화"를 들고 동상을 찾게 하여, "북한"에 꽃이란 꽃은 전부 절판되는 진풍경을 보이기도 했다평소 "북한 돈 5" 밖에 하지 않던 "생화 1송이""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50"까지 뛰어 올랐다그것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 그러자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김일성 동상" 앞에 놓여 지기도 했다.

그가 사망한 뒤, "평양"에서는 대규모 추모 행사가 벌어진다추모 행사는 5년과 10년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1997년에 "평양 모란봉 구역""대형 추모탑" 세워놓고, 지방 도시에 1개씩을 세웠다김일성이 태어난 날을 "태양절"이라고 부르도록 했다"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강령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이 탄생한 1912.04.15일부터 "주체연호"를 사용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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