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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산주의 (남로당ㆍ빨치산ㆍ연안파ㆍ소련파)

파- 빨치산 : 김일성 ③ 극동군 제88국제여단ㆍ동북항일연군교도려

by 당대 제일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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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국제여단 (제8641 보병 특별여단)ㆍ동북항일연군교도려 (東北抗日聯軍教導旅)"의  "88여단" 명칭은 "김정일"이 태어난 집 주소 "라즈돌노예 88번지"에서 따 왔다는 설이 있다. "88여단"을 중국인 대원들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 (東北抗日聯軍教導旅)"라 불렀다.

 

1. 88국제여단 (8641 보병 특별여단)동북항일연군교도려 (東北抗日聯軍教導旅)

"김일성"을 비롯한, "혁명 1세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태로, "남야영"에서 "김정일"이 태어났다. "88여단" 명칭은 "김정일"이 태어난 집 주소 "라즈돌노예 88번지"에서 따 왔다는 설이 있다. "88여단"을 중국인 대원들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 (東北抗日聯軍教導旅)"라 불렀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대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망명한 "동북항일연군" 잔존세력들을 수용하기 위해, 1942.07월 창설한 부대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1937.06.04.~05)"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ㆍ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도피하였다. 1940~1941년 초까지,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남야영(南野營)ㆍ북야영(北野營)" 2곳에 분산 수용된다. ("남야영ㆍ북야영"은 각각 "B 캠프ㆍA 캠프"로도 불렸다.)

•  활 동 : 1942.07~ 1945.09     • 종 류 : 보병 여단     •  소 속 : 비에트 연방 극동전선군 (소련 육군)       • 명령 체계 : 극동전선군 정찰국     •  참 가 : 약 60여 명의 조선인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55인)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55인의 평균 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나머지 5인은 "중학교 중퇴자"이다.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ㆍ대위 김책ㆍ대위 안길ㆍ상조 임춘추ㆍ중위 서철"의 5인이다. (강건ㆍ최용건ㆍ최현ㆍ류경수도 참여)

• 지 휘 : 여단장- 주보중(周保中ㆍ중국인ㆍ1902~1964)이었으나, 소련군에 배속되어, 지휘감독을 받았다. 극동군 사령관- 아파나센코 대장(1890~1943)ㆍ후임자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 (1894-1953)  /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소장(1899~1980)ㆍ부국장- 안쿠지노프 대좌(1905~1974)

• 창설 이유 :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1942.07월 "뱌츠코예의 북야영"에 "남ㆍ북야영 동북항일연군" 인원들을 수용하는 "88여단"을 창설하였다.

88

① 김일성과의 관계 (1942.07~1945.09까지 활동) : 대위ㆍ1대대 대대장 (營長)

1940.10.23일, "김일성"은 "소련"으로 불법 월경하여 들어갔다가 투옥되었는데, 중국인 상관 "주보중 (周保中1902~1964)"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 "남야영"에 들어간다. 1941.02.16일, "남야영"에서 "김정일"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라즈돌노예 마을길 88번지(빨간 벽돌 2층집)"으로 "기차역" 부근이며, 지금도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다. "라즈돌노예 기차역"은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 한인들"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 나르던 출발지로, "고려인"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동북항일연군"의 편제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88여단" 창설로, 1942.07월에 "라즈돌노예의 남야영"에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하여, "대위" 계급으로 "1대대 대대장(營長)"이 되어, "8ㆍ15 해방" 때까지, 교육ㆍ훈련을 받는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60여 명은 "88여단"에서 1942.07~ 1945.09월(해방)까지 약 3년간 복무했으며, "소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 남야영(南野營)ㆍB 캠프: 보로쉴로프(현, 우수리스크) 근처 (Ворошилов)→ B 캠프 :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 마을이다.

북야영(北野營)ㆍA 캠프: 뱌츠코예 마을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 A 캠프

2. 동북항일연군 (東北抗日聯軍ㆍ1936~1942) → 제88국제여단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투쟁을 주도한 군사조직이다. "조선인ㆍ중국인" 등의 "민족통일전선" 성격을 띠었다.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ㆍ중국인"의 유격부대를 "공산당" 주도로 통합한 군사조직이다.

당시 "만주"에 있던 수많은 항일계열 군사조직 중에 제일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1939년 "일본 관동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의해, 1942년 소멸되고, 잔존 세력은 "소련"으로 도피하였다. "김일성ㆍ김책ㆍ강건ㆍ최용건ㆍ최현ㆍ류경수" 등 항일연군에 참여했다 "소련"으로 도피했던 "조선인"들은 국내에 아무 정치적 기반이 없었지만, 1945.08월, 북한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였다.

① 창설 배경ㆍ편성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의 각 지방에 존재한 "중국 공산당" 지도하의 "반일 유격대"를 기반으로 창설되었다.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의 결성이 호소되자, "중국공산당"도 8월 모든 항일운동을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정리해, "통일전선"을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1936년부터, "만주" 각지의 "동북 인민혁명군"의 재편성이 시작되어, "동북항일연군"이 성립했다.

•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제1~ 11군"까지 존재했다. (전성기에는 참여인원이 10,000명 이상) : 남 만주 : 1ㆍ2군 → 제1로군 (김일성ㆍ최현) 조선과 국경지대  /  동 만주 : 4ㆍ5ㆍ7ㆍ8ㆍ10군 → 제2로군   / 북 만주 : 3ㆍ6ㆍ9ㆍ11군 → 제3로군 으로 재편성되었다.

② 활 동

"제1로군"이 활동하고 있던 "남만주"는 "조선"과 국경지대였고, 전투가 잦았기 때문에, "제1로군"의 활동은 "조선"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보천보 전투" 이전부터 "제1군"의 "김일성"이나 "최현"(제1로군 제4사의 단장ㆍ나중의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이름은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 등을 통해,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 "일본"은 "김일성ㆍ최현"에 현상금을 걸었다. 이들 신문에서는 그들을 "도적떼"로 비난해, 피해를 받은 주민에게 동정하는 논조가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의 언론은 "일본 정부"에 의하여 검열을 받았으므로,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 후에도 "만주국ㆍ일본군 관동군"을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일본"은 이를 "식민지 지배ㆍ만주국 통치"를 가로막는 장해물로 간주하여, 철저한 탄압을 하였다. "일본"은 "만주국"의 경찰ㆍ군대ㆍ관동군 등을 동원해, "게릴라"의 거점이나 협력하는 촌락 등을 섬멸하고, 이것과 병행하여 집단 부락을 건설하여, 그들의 활동을 고립시키고, 귀순 공작 등의 수법을 이용해 "동북항일연군"을 탄압했다. 특히 "집단 부락의 건설"로 "동북항일연군"은 물자의 공급이 곤란해져, 두메산골에서의 "게릴라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소련ㆍ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제한적 물자의 보급을 받았고, 그 외에 "만주국" 내부에서도 "동북항일연군"에 비밀리에 협력하였고, 무기를 공여하는 사람이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무기를 밀매하는 사람이 있었다. 인원 보급과 혁명과업인 "전국 해방"을 위해서, "만주" 농가 및 특히 "조선인 부대"로 알려진 "조선인민혁명군"은 "북부 조선"을 중심으로 한 사상교육과 조직화에 힘썼다. 물자ㆍ인원의 보급 수단으로 볼 때에는 "비합법 게릴라"와 큰 차이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1937년, "제1로군 제2군 제6사(사장- 김일성)"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함경남도(현재 양강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은 언론에 보도가 되어, 한국 내에도 알려졌다.

③ 1939년부터, "관동군ㆍ만주 국군의 마지막 특설대" 등에 의한, 탄압

"동북항일연군"의 전성기에는 참여인원이 10,000명이 넘어, "일본 제국"의 만주ㆍ중국 침략에 커다란 장애였다. "동북항일연군"은 한반도 내로 "진공작전"을 펼치기도 하여,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도 위협으로 작용했다. 1939년부터, "관동군ㆍ만주 국군의 마지막 특설대" 등에 의한, 대규모 소탕 작전을 전개하여, "동북항일연군"은 "양정우ㆍ리홍광ㆍ허형식" 등 많은 전사자를 내었고, "전광" 등이 일본에 귀순하였다. 1940년, "일제"는 "관동군"을 76만 명으로 늘려, "항일연군" 토벌을 강화했다.

"주보중ㆍ김일성ㆍ최용건ㆍ김책" 등 남은 사람들도 물자가 부족하여, 활동의 지속하기 어려워져, "소련" 영토로 이동해서, "소련"의 지원 하에 군사 활동을 계속했다. "항일연군 1~ 3로군"의 지도부와 잔여 병력들의 상당수는 1941년까지 "소련" 영내로 이동했다. 1942년까지, 전사ㆍ귀순하고 있지 않는 구성원은 "소련"에 탈출하였으므로, "동북항일연군"은 소멸했다.

④ 소련 망명 이후

"소련"에 망명한 구성원은,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에 편입되었다. "여단장"은 "주보중"으로, "러시아 인"도 참가하고 있는 것 이외는, 구성원이나 직책 등, 대체로 "동북항일연군"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련 망명" 후에도 그들은 수시로 "만주 영토ㆍ북부 조선"에 잠입하여, 정찰ㆍ기습ㆍ민중조직화 등 작전을 수행하였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자, 그들은 "조선"에 귀환하여 "북한"의 당이나, 군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 후 "남로당ㆍ연안파ㆍ갑산파(보천보의 싸움 등에서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싸우다가 조선으로 잠복한 사람)ㆍ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으로부터 파견된 사람)"를 숙청하여, "북조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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