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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산주의 (남로당ㆍ빨치산ㆍ연안파ㆍ소련파)

파- 빨치산 : 김일성 ⑤ 팽덕회 (펑더화이)ㆍ한국전쟁 중공군 총사령관

by 당대 제일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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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 (펑더화이ㆍ彭德怀ㆍ1898~1974ㆍ76세)"는 중국 10대 원수 중의 한 사람ㆍ한국 전쟁 때 중공군 총사령관이었다. 1966.05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들었던 그는 "마오쩌둥"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홍위병"의 공격대상이 되어 박해를 받았고, 폭행ㆍ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1. 팽덕회 (펑더화이彭德怀1898~1974향년 76)

중화인민공화국 군인정치가중국 10대 원수 중의 한 사람한국 전쟁 때 중공군 총사령관ㆍ1976, "4인방"을 몰아내고 집권한 "덩샤오핑", 1978, "마오쩌둥" 사후, "중국 공산당 제11차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그의 사건이 재조사되어, 사면이 이루어졌고, 모든 명예가 회복되었다.

출 생 : 청나라 후난 성 샹탄 (호남성 상담현)ㆍ모택동과 동향     사 인 : 병사 (폐렴ㆍ혈전증)

 사 망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감방 (인생 마지막 부분인 8년의 세월을 죄수로서 살다가 마감)

 지 휘 : 팔로군중국 인민해방군중국인민지원군      복 무 : 1916~1959 (최종 계급 : 국방부 장관)       근 무 : 국민혁명군팔로군중국 인민해방군중국인민지원군       참 전 : 북벌중일전쟁백단대전태평양 전쟁국공 내전한국 전쟁선더볼트 작전중공군 춘계공세

팽덕회1

2. 한국전쟁 시, "팽덕회 (중공군 총사령관)"이 "김일성"의 뺨을 때린 이유

"구소련의 기밀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군사적 능력은 매우 형편없었다."고 기록했다특히 "김일성"이 실제 지휘해서 승리한 전투는 "대일본 전투의 보천보 전투" "한국전쟁 당시 오산 전투"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보천보 전투오산 전투" 당시에는 "김일성이 지휘하는 병력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참전이후, "김일성""팽덕회(중공군 총사령관)"에게 "중공군의 인명피해가 있더라도 자신이 요구한 작전은 꼭 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이에 승산이 없는 전쟁에, 자신의 군사를 투입해야 하는 "팽덕회""김일성"에게, "당신은 요행을 믿고, 이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비난했다고 한다하지만 후퇴를 거듭하던 "UN국군"이 전력을 재정비하였고" 결국 반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중공군북한군"은 전세가 밀리기 시작하였고, "김일성""북한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 상의도 없이 멋대로 "북한군" 병력만 먼저 후퇴시켰다결국 "김일성"의 주도 하에 "북한군"은 후퇴를 하였고, "중공군""UN"의 기습 공격을 받고, 막대한 인명피해와 손실을 입었다.

이 사건 이후, "팽덕회""김일성"에게 공개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이 내용은 홍콩의 언론지인 "명보"에서도 다룬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명보"에 따르면, 당시 분노한 "팽덕회""김일성"을 만나러 간 그 자리에서 "김일성의 뺨을 한 차례 때렸다"고 한다또한 분노한 "팽덕회"에게 어떨결에 뺨을 맞은 "김일성"은 상한 자존감 때문에 1주일 동안 제대로 식사를 못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이 저지른 무자비한 약탈을 포함하여, 수많은 "전쟁 범죄"를 보고, "중국 수뇌부"는 나중에 "김일성"을 불신하게 된다결과적으로 "중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오쩌둥"도 어리석은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마오쩌둥" 역시 나중에 "김일성"이 지난 1960년대 초반과 1975년 남한 사회의 정치 상황이 혼란할 때, "2차 한국전쟁"을 제안을 하였으나, 아예 무시했다이 정도로 "중공""한국전쟁" 이후, "북한 김일성"을 정치력이나 군사적 통솔력에서 매우 무능한 인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팽덕회2

3. 1950년 한국전쟁1960년대 초반- 1975"2차 한국전쟁" 발발하지 않은 원인

1950,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09.15UN군이 참전해, "인천상륙 작전"으로 반격에 나서, 10.1"38"을 넘을 때, "북한소련"의 지원요청 하에, "마오쩌둥""30만 중공군"으로 한반도 출병을 결정하였다이때, "린뱌오(임표)" 병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사령관"을 못 맡게 되자, 10.08일 그가 "마오쩌둥" 명령을 받고, "사령관"에 임명되어 참전하였다그 뒤, "중국인민지원군""UN"에 대한 군사행동에 나서, "청천강" 이남으로 "UN"을 후퇴시켰다.

"UN"의 정면 공습 진공을 피했다가, 역습에 나서는 군사전략으로 작전이 성공을 계속하자, "마오쩌둥" "지원군"의 피해상황과 물자 빈곤을 알리며, 전쟁을 계속하기 어렵다는 "펑더화이"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한반도 남부까지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전선은 반격에 나선 ""UN"에 의해 "38선 근처"에서 교착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펑더화이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행정" 일을 담당하던 "마오안잉(毛岸英오쩌둥의 장남ㆍ1922~1950ㆍ28세)"1950.11.25"미군"의 공습을 받고 숨졌다"김일성""펑더화이"에게 "중공군"의 큰 희생을 치르는 인명피해가 발생되는 말도 안 되는 작전을 내세우며, 억지를 부렸고, "펑더화이"는 불같이 화를 냈다"당신은 요행(행운)을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 라고 비난하였다

"UN"총공세가 시작되자, "김일성""북한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의 상의도 없이 멋대로 "북한군"을 후퇴시켜, 결국 "중공군""UN" 기습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 손실을 받았다분노한 "펑더화이""김일성"을 찾아가, 북한군 간부들이 보는 눈 앞에서 "김일성"의 두 뺨을 때렸다욕설을 퍼붓고, 비난을 하였고, 이 사건 이후, "펑더화이"전선이 교착상태에 있던 1952년 귀국하였고, 공개적으로 "김일성"을 엄청난 비난을 하였다그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분노했고, 그 후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 일로 인해, 1975"김일성""마오쩌둥"에게 찾아가, 다시 "한국전쟁"을 일으키려했지만, "오쩌둥"은 거절하였다이유는 "마오쩌둥""중국"을 방문한 "닉슨 대통령"에게 고백을 했고, "김일성은 매우 무례하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 놈"이라고 했으며, "북한에 군대를 파병 보내, 김일성과 북한을 도운 것을 후회하고, 한국이 통일되게 놔 뒀어야했다"고 말했다그러한 이유로 "2차 한국전쟁" 이 일어나지 않은 원인이 된다.

4. "모택동 공산당군"에 합류1950년 한국전쟁, 중공군 총사령관

어려서 양친을 잃고, 9세 때부터 노동에 종사하여, 어린 시절을 광부, 막노동으로 전전하였다16세에 "탕셩즈 군벌"의 사병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후난 군관강무당(군사학교)"에 입학하여, "국민당"의 장교가 되었고, 이후 "국민당군""북벌"에 참가하고, 1928.02"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국공합작" 결렬이후, 휘하 부대를 이끌고, "후난 성 핑장"에서 궐기하였다가, 나중에 "마오쩌둥" "주더"의 해방구에 합류했다그러나 "공산주의"를 접한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결국 "모택동 군"에 합류하게 된다그는 "모택동"과 같은 "호남성 상담현"이 고향이므로, 자연히 "모택동"의 신임을 얻었고, 권력 투쟁 때 그를 열심히 지지하여, "모택동""중국 공산운동의 맹주"가 되게 하였다.

그는 "모택동의 군대"가 항일전쟁을 거쳐 성장하는 사이, 군부 내에서 총 사령원 "주덕"의 다음 가는 2인자가 되었다"모택동"의 신임이 두터웠기도 했지만, "강소성 정강산" 시절을 거쳐, "대장정" 그리고 "항일전" 등에서 큰 활약을 했던 전공의 영향도 컸다그의 전공은 후배 "임표"와 군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툴 정도였다그러나 일본이 패배하고, "장개석"이 패퇴하자, "팽덕회"의 전공은 "임표"에 비해 다소 퇴색하였다"임표""만주 지방"을 삼키고, "북경"으로 진격하며, "장개석 군"의 붕괴를 유도하자, "임표"는 자연 "최고의 무장"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팽덕회"는 전쟁이 끝난 후, "군사 행정가"로 변신하여, "서북지방" 개발에 몰두했지만, 그가 전공을 세울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1950, "북한"의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09.15UN군이 참전해, "인천상륙 작전"으로 반격에 나서, 10.1"38"을 넘을 때, "북한소련"의 지원요청 하에, "마오쩌둥""30만 중공군"으로 한반도 출병을 결정하였다이때, "린뱌오(임표)" 병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사령관"을 못 맡게 되자, 10.08일 그가 "마오쩌둥" 명령을 받고, "사령관"에 임명되어 참전하였다"중공군 전사"에서는 "팽덕회"의 화려한 군공은 "5차 전역"으로 나눈다.

1차 전역 : "북한"으로 침투한 초기, "중공군"은 맹진해오는 "한국군 6사단 7연대""초산"에서 매복 공격해서 패배시키고, "운산"에서 "1기갑사단"1개 대대를 섬멸하여, "팽덕회"는 그의 무명(武名)을 드높게 올렸고, 중국인들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2차 전역 : 1달 뒤, "미군"이 정보판단 미스로 잘못 시작한 총공세에 대항하여, "팽덕회""중공군""덕천"에서 국군을, "군우리"에서 "미군터키군"을 격파하여, 북진한 "UN"을 총 퇴각하게 만들었다.       ③ 3차 전역 : "중공군"이 후퇴하는 "미군"을 추격해서 남하하자, "모택동""팽덕회"에게 서울을 점령하도록 지시하였고, "팽덕회"는 계속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했다.       ④ 4차 전역 : 2월에는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한국군 8사단11사단"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⑤ 5차 전역 : 1951년 봄이 되자, "팽덕회"는 본국에서 충원을 받은 병력을 망라한 50만 대군으로 대 공세를 취했다. "춘계 공세" 초기에 "중공군""영국군한국군 6사단"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대반격에 대패하고, 북으로 패주했다.

"연천 북방"에 총지휘소를 두고, "5차 공세"의 최종 목표인 "대전- 제천 선"까지 진격을 꿈꾸던 "팽덕회" 사령부가 위협 받게 되자, "평안남도 성천"까지 정신없이 도망쳐서, 숨을 돌렸다한때는 "UN"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욕심까지도 품어 보았지만, "대공세 실패""모택동팽덕회"는 현 전선을 유지하다가, "휴전"을 하기로 합의하였다1953.07.27"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식""공산군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해, "휴전협정서"에 조인하고, 전쟁을 끝낸다. 1954,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장"을 맡았다.

1955, 군에 계급제도가 도입되자,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계급"을 부여받았다"마오쩌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대약진운동"이 대실패로 끝나자, "펑더화이"1959.07~ 08월에 걸쳐 열린 "루산 회의"에서 그의 운명이 결정되었다이 회의를 앞두고 고향인 "후난 성"의 농촌 시찰을 실시한 "펑더화이""대약진 운동""인민공사화" 의한 경제 피폐를 목격하고, 회의 기간 중에 "마오쩌둥"에게 서신 형식으로 이 정책의 문제점을 전달하고 정책 전환을 요구했다.

당시 "모택동"은 몽상에 빠져, 인민들의 경제활동을 집단화하는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집단화"는 되지도 않을, 급속한 공업화의 목표까지 같이 동반하고 있었다"인민공사"와 일도 같이하고, 밥도 같이 먹고, 소득도 공평히 나누는 "공산주의 유토피아" 같은 운동을 거국적으로 개시했는데, 개인의 욕구와 차이를 무시한 이 몽상이 현실에서는 "중국 경제"를 거덜 내는 쪽으로 옮겨가게 하고 있었다그러나 이런 현실의 실정을 "모택동"에게 보고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소리는 감히 아무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1959, "중국"의 경치 좋은 "여산"에서 "모택동"과 중국 정권 간부들 이 모여서 회의를 열었다.

낮에는 그룹으로 토론하고, 밤에는 여흥을 즐기는 회의였다그런데 "그룹 토론" , "대약진 운동"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평소 "대약진 운동"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팽덕회"는 자기가 총대를 메고 이 문제를 "모택동"에게 직소하기로 마음먹었다"모택동"의 숙소를 찾아간 그는 "모택동"이 이미 잠이 들어서 만날 수가 없다는 답을 듣자, 무슨 생각에서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이의 개선점을 건의하는 "건의문"을 작성하여 남겨두고, 돌아왔다그는 "모택동"의 고향 사람으로 이미 그를 30년간 형님처럼 모셔온 처지에, 그 정도의 직소는 받아 줄 것으로 확신했었다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무인의 생각"이었을 뿐이었고, "건의문" 형식의 편지는 "팽덕회"를 내리막으로 밀어버린 단서가 되었다.

그는 "국방부장"을 하면서, "중국군"이 공산주의 정신 교육이나 유격전술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실적으로 "소련군과 같이 신형장비로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서, "모택동"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그의 주장은 군에서 실시하던 모택동 우상화 교육을 그만 두자는 간접적인 주장을 담고 있었다.) 아침에 그 "건의문"을 본 "모택동"은 격노하여, 그 사본들을 회의 참가 간부들에게 배포하고, 이를 비판하도록 지시했다. 그가 단순하게 생각했었던 편지가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전날까지 "팽덕회"와 같이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모택동"에게 직소할 것을 말하던 간부들은 태도가 돌변하여, 그를 맹비난하기 시작했다이 서신에서는 "마오쩌둥"의 지도권을 존중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었지만, "쩌둥" 이것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 들였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배반적인 행동에 "펑더화이"도 회의석상에서 반박했지만, 결국 "펑더화이""반당분자"로서 ""에서 쫓겨나고, "국방부장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의 지위에서 해임된다그리고 "북경" 인근 촌락으로 "유배"되었다이 해임은 후임 "국방부장"이 된 "린뱌오"의 지위를 높여, "문화대혁명"의 단서가 되었다자기의 잘못을 지적한 "팽덕회"를 숙청한 "모택동"은 아사자가 수 천만 명씩 속출하는 등,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이 폭발하자, 할 수 없이 "주석 직"을 이미 넘겨준 "유소기"에게 수습을 맡기고, "당 의장직"만 가지고, 2선으로 후퇴하였다"팽덕회"가 나서지 말고 조금만 참았더라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었다.

린뱌오(임표林彪1907~1971향년 64) 중화인민공화국 군인정치가팽덕회보다 9살 아래 : 홍위병 책임자1968~ 1971년까지, 부총리 겸 총리 권한대행국방부 부장과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역임ㆍ"임표"는 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지명한 "모택동"에 속아, 철저하게 이용당한 것이었는데, 그는 "모택동"에게 아부하기 위해, 선배 "팽덕회"를 매장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홍위병 난동"이 끝난 뒤, 필요 없게 된 "임표""모택동"에게 버림을 받게 되자,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소련"으로 도주 중, "내몽골"에서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

류사오치 (유소기劉少奇1898~ 1969향년 71) 중화인민공화국 정치가중국공산당 지도자 : 1949~1954년까지, 중국본토의 임시 부수반을, 1954~ 195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부주석을 역임ㆍ1959.04~1968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가주석"을 역임ㆍ1959, "마오쩌둥""대약진 운동"의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2대 국가주석 겸 당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으나,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려던 "마오쩌둥"과 수시로 갈등한 끝에, "문화대혁명"으로 1968년 실각했다실용파인 "유소기""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수습하며, 그의 권력 기반을 서서히 넓혀갔다. "유소기""모택동"의 눈치를 보다가, 농촌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팽덕회"를 사면하고 다시 불러들였고, 복권된 "팽덕회""남서지방"의 국방산업을 증진하는 임무를 띠고, "사천성"으로 파견되었다그에게 이제 고생 끝의 말년 인생이 보장된 듯 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결국 죽어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던 끔직한 수모와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소기 일파"에게 점점 소외되던 "모택동"은 드디어, 권력 외곽의 젊은이들을 "유소기 타도"의 도구로 쓰는 "문화혁명"에 발동을 걸었고, 거리는 "홍위병의 광란"으로 넘쳐흘렀다소위 "문화혁명"으로 불리던 이 광란은 "중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유소기"는 갖은 수모를 당하고, 권좌에서 쫓겨났다가, 몇 년 뒤 죽고 말았다"등소평"도 이때 실각하고, 농촌으로 쫓겨났다.

"문화혁명" 주도하는 세력은 "4인방"으로 불린 "강청(모택동의 4번째 부인)왕홍문장춘교원문" 4명이었다. "강청(모택동의 4번째 부인)""팽덕회"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인간이었다"4인방""문화혁명"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홍위병"을 시켜, "팽덕회""사천성 성도"에서 체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하게 하였다"팽덕회"는 이 때부터 "홍위병"들에 의해, 구금상태에 들어갔다.

그는 수도 없이 "군중대회"에 끌려나와, 고깔모자를 쓰고 묶인 채, 아들딸 같은 어린 아이들에게 "모택동공산당에 지은 죄를 고백하라"는 다그침을 받았다뿐만 아니라, 툭하면 심문당하고, 구타도 당했는데, 그가 구타당한 것만도 130여회나 된다고 한다"팽덕회"가 당한 수모 중, 최대의 굴욕은 수 만 명의 "중국군"이 운집한 대형 운동장에서, 무공 라이벌이지만 후배인 "임표(팽덕회보다 9살 아래)"에게 공식적으로 매도당한 것이었을 것이다.

"임표"는 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지명한 "모택동"에 속아, 철저하게 이용당한 것이었는데, 그는 "모택동"에게 아부하기 위해, 선배 "팽덕회"를 매장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끝내 "팽덕회""홍위병"들이 말하는 그의 "죄상"을 자백하지 않고, 목숨을 이어갔다1970, 그는 "홍위병"들이 장악한 "중국 정부"에 의해서, 정식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는 교도소에서 병약한 목숨을 이어가다가, 1974년 구타의 후유증인 폐렴과 혈전증으로 죽었다인생 마지막 부분인 8년의 세월을 "죄수"로서 살다가, 전장 아닌 감방에서 비참한 인생을 마감하였다그가 죽고 2년 뒤, "모택동"도 죽었다1976, "4인방"을 몰아내고, 집권한 "등소평""팽덕회"를 재평가하고, 복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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