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05.17일, "박헌영 (朴憲永ㆍ1900~1956ㆍ54세ㆍ김일성과 12살 차이ㆍ서자 출신)"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북한 당(黨)ㆍ정(政) 간부와 인민군 주요 지휘관 연석회의에서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해방된 지역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박헌영의 남로당 20만 봉기 설"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구 소련 문서"에 나타나듯, "김일성"은 "스탈린ㆍ모택동"의 지원을 믿었을 뿐이다.
1. 박헌영 (朴憲永ㆍ1900~1956ㆍ향년 54세ㆍ김일성과 12살 차이ㆍ서자 출신ㆍ161cm)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ㆍ마르크스-레닌주의자ㆍ반기독교 운동가ㆍ노동운동가ㆍ혁명가ㆍ언론인
• 출 생 : 충남 예산군→ 서자(庶子)로 출생 (몰락한 양반 가문) • 사 망 : 평양 변방 야산기슭 (구체적인 처형시점ㆍ처형장소도 확인된 바 없다) • 사 인 : 숙청 (한국전쟁을 패전으로 몰고 간 미국제의 간첩 스파이ㆍ반당종파분자) • 처형 연도 : 1955년 설ㆍ1956년 설ㆍ1958년 설 등 • 처형 시점 : 07.19일ㆍ12.15일ㆍ12.19일ㆍ07.19일 (박헌영 처형 시, 방학세 일행과 같이 타고 간 박길룡 증언)
• 호 : 이정 (而丁ㆍ而靜ㆍ인민의 고무래)ㆍ이춘(而春) • 별 칭 : 조선의 레닌ㆍ암흑 속의 별ㆍ비운의 혁명가
• 가 명 : 이두수ㆍ이 춘ㆍ왕양옥ㆍ박건일ㆍ김성삼 • 학 력 : 경성고등 보통학교 (현, 경기고등학교)
• 처 : 주세죽(1처ㆍ1921~1933ㆍ1901~1953ㆍ박헌영이 죽은 줄 알고, 김단야와 재혼(1933~1937)→ 정순년(2처)→ 이순금(내연녀ㆍ이재유(저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의 처ㆍ오빠 이관술)→ 윤레나(3처)
• 자 녀 : 박 비비안나 (박영ㆍ1928~ ㆍ발레리나ㆍ대학교수) / 박병삼 (승려ㆍ법명- 원경) / 박 나타샤 (생사 불명)ㆍ박 세르게이 (생사 불명)
• 수 상 : 1950.05.27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
2. 김일성과의 갈등
1950.09월, "미군" 폭격으로 사망한 "강건(총 참모장)"의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박헌영"은 "김일성"과 직접 "강건의 장례식"을 주관하고, 직접 "관"을 메고, 시신을 운구하였다. 1950.09.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김일성"과 갈등이 불거졌다. 둘의 갈등은 주로 "전쟁을 수행하는 작전"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온다"는 소식이 들리던 1950.10.08일 "평양 모란봉 김일성 지하 집무실"을 방문한 "예지량(중국대사)"의 목격담에 따르면, 박헌영은 "즉각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일성은 "남조선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UN군은 10.19일 "평양"을 점령했다.
1950.10.0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모택동"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한 편지가 발송되었다. 편지는 공동 명의였으며, "김일성ㆍ박헌영"이 나란히 서명했다. "김일성ㆍ박헌영"의 갈등은 1950.11.07일 전화(戰禍)를 피해, "압록강 연안 만포진"에 설치되어 있던 "소련 임시 대사관"에서 열린 "볼셰비키혁명 기념행사"에서 폭발했다."김일성"은 전쟁이 열세로 몰리게 된 것에 대한 책임 공방을 벌이다가, "박헌영"에게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 병을 집어던졌다. 두 사람 모두 취한 상태였고, 서로 막말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전 동독 주재 북한대사이고, 당시 외무성 부상이던 "박길용"의 증언이다. 먼저 "김일성"이 소리쳤다. "당신이 들고 일어난다고 했던 빨치산들은 다 어디 간 거야?" 박헌영이 "아니 어째서 낙동강에 군대를 죄다 내려 보냈나?"라고 반박하자, 김일성은 흥분해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출신 배경이 너무 달랐던 "김일성ㆍ박헌영"은 1948.09월, 북한 정권을 구성할 때부터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박헌영"은 "8ㆍ15광복" 당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다.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일제 말기까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했던 "박헌영"이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반면 "소련군" 장교 출신인 "김일성"은 정체에 대한 시비가 분분했지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박헌영"을 제치고 "북한 권력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
나이가 "김일성"보다 12살 많은 "박헌영"은 "김일성"이 193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 10년 전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했는데, "공산주의 활동 경력"에서 대선배였던 "박헌영"에게 "김일성"은 "소련"을 배경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풋내기로 비쳤을 것이다. "신복룡 교수"는 "김일성ㆍ박헌영"의 대립은 노선 차이보다는 주도권 다툼의 성격이 강했다고 설명한다.
3. 투옥ㆍ수감ㆍ재판ㆍ고문ㆍ처형
① 투옥ㆍ수감ㆍ재판
1952.08.03일, "리승엽"을 비롯한 13명이 "북조선 정권 전복 음모ㆍ반국가적 간첩테러ㆍ선전ㆍ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피체되었다. 1952.09.04일, "소련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서 "소련의 스탈린" 주재로 "팽덕화(펑더화이ㆍ중공 인민지원군 총사령관)ㆍ김일성(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긴급회의를 열었다."소련 공산당 수뇌부(몰로토프ㆍ말렌코프ㆍ미코얀ㆍ불가닌 등)"이 모두 배석했고, "중공"에서는 "저우언라이(周恩來ㆍ외교부장)"이, 북한에서는 "박헌영(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배석하였다.
1952.10월, 귀국 직후, "박헌영"도 그들 반란에 대한 후원자로 몰리면서, 가택 연금 당하였다. 1953.03월, "미제의 스파이ㆍ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1953.03.31일, "김일성"은 "평양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박헌영"과 추종자들이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하고, 정보를 "미국"에 빼돌렸으며, "한국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포 직후, "박헌영"은 자신에게 뒤집어 씌워진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그는 자기비판을 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에만 답변하였다고 한다. 그는 체포당하면서 "당"에서 제명당하고, "부총리 겸 외무상"의 직위에서도 해임 당하였다. 이후 "정치수용소(평안북도 철산군)"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55.12.15일, "북조선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5시간 동안 진행되어, 밤 10시에 끝났다.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자,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인 "박헌영"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재판명은 "피소자 박헌영의 북한정권 전복음모ㆍ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ㆍ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이었다. "북한 최고 재판소"에서는 "박헌영"을 일방적으로 "미제의 간첩"이라고 몰아 붙였고, "박헌영"은 안경을 벗어 시멘트 바닥으로 내집어던지면서 "그래, 네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 라며 강하게 격노한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 "박헌영"의 동거녀였던 "이순금"의 진술 역시, "박헌영"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순금"은 그가 남한에 있을 때, "실제로 미국을 도왔다"라는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 북한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남파되어 장기수로 복역했던 "김중종"은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중종"에 의하면, 문제가 된 것은 "박헌영"의 집 지하실에 있던 무전기로, 이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직접 접촉했던 증거라고 증언하였다. 당시 "최고재판소 재판장"에 이었던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선고와 "전 재산 몰수 형"을 선고했다. 재판이 끝난 직후, 증인으로 있던 "이강국ㆍ권오직" 등 "남로당 계열" 출신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정치적으로 그를 지지했던 "림화(시인ㆍ작가)" 역시 "반당 종파분자"로 몰려, 사형 당한다.
형문 과정에서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고, "그렇겠지"라고, 대답했다 한다.
재판장에서 "박헌영"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마지막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 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살아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중략)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 때,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미국 사람들과 교분이 있었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 통일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중략) 그대들 말대로 내가 미국의 스파이였다고 하자. 모든 것은 내가 주도했을 뿐 남로당 간부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과 통일, 사회주의 혁명과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나에게 떨어진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이든 간에 달게 받겠으니, 죄 없는 남로당 간부들을 용서해 달라. 거듭 부탁한다."
이 마지막 공식적 발언은 박헌영이 책임감이 강한 공산주의자였음을 짐작케 할 수 있었던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친북적인 증언자들은 "박헌영이 비굴하게 살려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평가한다. 재판이 끝난 뒤, "김일성 계열"의 "갑산파 계열"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만족한 모습을 지었으나, "소련파ㆍ연안파" 계열 간부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다물고, 침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재판정에서 퇴장했다고 한다. 한편 그를 따르던 이들 중, "박영발" 등은 "자신이 미제 간첩 박헌영의 주선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것을 반성한다."는 내용의 자기비판을 한 뒤, "지구당 부위원장 직"을 사임했다.
② 처형
1956.12.15일, 평양 변방 야산기슭에서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처형 시점은 12.15일과 12.19일로 불확실하다. 또한 07.19일에 처형당했다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박헌영" 처형 당시, "방학세" 일행과 같이 타고 간 "박길룡"의 증언이다. 처형년도도 1955년 설ㆍ1956년 설ㆍ1958년 설 등이 있어, 구체적인 처형시점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처형지점도 확인된 바 없다. "함북 화성 16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인민무력부장"을 지내다 숙청된 "김창봉", "남로당 박헌영"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화성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헌영 재판"이 끝난 후, "남로당" 계열 인사들은 즉결 처형당했으나, "박헌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북한"이 그를 "미제 간첩"으로 확정판결을 하고, 국제적으로 발표까지 했음에도, 그가 정확히 어떤 간첩행위를 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소련ㆍ중국"에서 "박헌영을 살리기 위한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소련"은 수차례 "대사 이바노프"를 시켜, "김일성"을 방문하게 하여,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소련으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중국 "마오쩌둥"은 "박헌영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망명"시킬 방도를 찾아보려고 강구했었다. 1953.03.05일 "스탈린" 사후, 사회주의권의 최고지도자로 급부상한 "마오쩌둥"이 "박헌영을 구하라고 지시했다"는 소식은 곧 "북한의 연안파 세력들"을 고무시켰다. "남로당계열 대숙청" 이후, 나날이 강화되는 "김일성 독재체제"에 밀려, 언제 숙청될까 불안해하던 "연안파 세력들"은 "김일성을 축출하기"로 모의했다. 이들은 1956.02월,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으로 촉발된 "연안파" 등의 "반(反)김일성 축출기도"를 시도했으나 "김일성 계의 반격"으로 무산되고, 모의가 실패하자마자, "연안파" 등은 중국으로 달아나거나 숙청되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이 "연안파 세력"과 손을 잡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귀국하자마자, "김일성"은 "방학세(법조인ㆍ북한의 중앙재판소 소장)"를 찾아가, "그 이론가 어떻게 됐어? 증거는 찾았어?"라고 물었고, 나중에는 "증거고 뭐고 필요 없다! 오늘 밤 이내로 즉시 목을 따버려!"라면서, 그의 수하 "방학세ㆍ김영철"을 시켜, "그를 처형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이 서둘러 처형을 지시한 까닭은 아마도 "8월 종파"와 "박헌영 세력"의 제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중공"의 "마오쩌둥ㆍ저우언라이"가 그를 구원하려고 보낸 사람의 존재가 발각되면서, 처형을 앞당기게 했다.
③ 1956.09.18일, "베이징"에서 중공 "마오쩌둥"과 소련 부수상 "미코얀"가 만난다.
"연안파ㆍ소련파"가 "반 김일성 연합"을 만들어, "김일성"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궁정쿠데타인 "8월 종파사건"으로 주모자들이 철저하게 숙청당한 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 마오쩌둥 : 김일성에게 어떤 이유로든 박헌영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박헌영이 남로당의 영수임을 고려해야 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 "베리야"(러시아의 정치가 겸 비밀경찰국장)가 아니며, 일개 문인일 뿐이다.
• 미코얀 : 박헌영은 지식인이며, 사람을 위협한 적이 없고, 조선로동당 창시자 중 한 명이다. 처형을 반대하는 소련공산당의 의견을 평양 주재 KGB 고문을 통해 건의 형식으로 전달했는데 잘못됐다. 소련공산당 중앙위 명의로 정식 통보를 했어야 했다. ("마오쩌둥"은 "미코얀"을 만난 1시간 20분 뒤, "중국공산당 제8차 대회" 축하사절로 와 있던 "북한 부총리 최용건" 등 "조선로동당 대표단"도 만났고,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대표단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 마오쩌둥 : 최근 당신들은 최창익ㆍ박창옥 부수상과 여러 명의 중앙위원을 제명 처분했다. 윤공흠ㆍ서휘ㆍ리필규ㆍ김강이 중국으로 도피해왔고, 소련대사 리상조와 교통부장도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인민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남조선 인민의 지도자로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박헌영도 죽였다. 당신들은 그가 미국의 간첩이라고 하는데, 미국은 그가 간첩인지도 모르고 있다. 마구잡이로 살인을 하면 이로울 게 없다.
④ "박헌영" 재판의 의미 : 수령 무 오류론의 희생양
전쟁 직후,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김일성의 정치적 승리"를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광복" 직후부터 시작된 "김일성ㆍ박헌영"간의 알력ㆍ경쟁은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권력투쟁으로 비화되었다. 재판에서 "박헌영"은 "사형"을 언도 받았으며, 판결문은 "미 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ㆍ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 공판문헌"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공판 문헌"은 "박헌영"이 일찍이 1919년 경,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의 친교를 통하여, "숭미 사상"을 품게 되었고, 1925.02월 초순, 일제경찰에 체포되자 변절하여, 일제의 주구로서 "조선혁명운동 탄압"에 복무하였으며, 1939.10월 "언더우드"와 결탁하여,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화를 반대하는 반역의 길에 들어섰다고 질타하고 있다. 또한 전쟁기간인 1951.09월 초순, 당과 정부를 전복할 "무장 폭동"을 단행할 것을 토의하고, 1952.09월에는 "무장 폭동"으로 당과 정부를 정복할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장집"은 "박헌영"의 숙청을 "북조선의 김일성 독재 체제가 확립된 시점"으로 간주했다. "최장집(정치학자)"는 "박헌영"을 "정치적 희생양(북조선 수령 무오류 론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김일성 유일 체제" 하에서 독자적인 "한국형 사회주의 체제"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1952.12월 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박헌영ㆍ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의 제거를 통하여, 휴전이후 제기 될 수밖에 없는 "전쟁 책임"을 물어, 가장 강력한 "남로당 세력"을 최종적으로 숙청함으로써, "김일성 리더십"의 불가오류를 확인하고, 유일 체제를 강화하는 길로 나갔다.
"박헌영"의 최후가 사실상 "김일성이 북조선에 독재정권을 건립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1955.12.15일, "박헌영"은 "반당(反黨)ㆍ종파분자ㆍ간첩방조ㆍ정부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는 북한에서 "마르크스- 레닌 주의"에 입각한 "정통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고, "광신적 개인숭배"에 입각한 "사이비 공산주의"가 승리함으로써, "봉건세습 전체주의"가 권력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 계기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최장집"에 의하면, 그와 다른 독립 운동가들의 갈등은 "혁명 세력의 통합성을 저해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반면, 민족해방투쟁세력의 고립ㆍ분산적 활동은 해방 후, 특히 남한에서 혁명지도부의 통합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예컨대, 남한에서 "좌익세력 - 중경 임시정부세력" 사이의 대립, 1946년 신전술 전후의 "여운형" 세력과 "박헌영" 세력의 분열 등은 이를 보여준다.
한편 지주ㆍ일부 한인 자본가 등의 "지배계급"과 친일 경찰ㆍ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은 해방 후에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에 직면하여, "반 혁명세력"이 되었고, 이들은 "미군정"이라는 외세의 지원과 일제가 남겨 놓은 강력한 "관료 체제"를 이용하여, 민중들의 도전을 물리적으로 진압하게 된다. "최장집"은 "김일성ㆍ박헌영이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시각이 편협하였다"고, 지적했다. 국제 정치와 전후 국가체계의 성격을 이해하는 "시야의 편협함"이라는 면에서 "김일성ㆍ박헌영"은 약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세계정치의 주변지역에서 투쟁하던 "민족해방운동"에서 벗어나자마자, 국제정치적 변화에 대응하는 학습기간이 주어지지도 않는 상태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과 세계정치의 중심에서 직접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나 한민족 전체에게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⑤ "박헌영"은 미국 간첩이었나? 아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체사상"을 창시하면서, 한국 전쟁의 패배 원인을 전부 "박헌영"에게 떠넘겼다. "한국 전쟁"의 패배로 "김일성"은 궁지에 몰렸으며, 그 책임을 부총리인 "박헌영"에게 전가시켰던 것이다.
소련파였던 "박영빈"은 "박헌영"으로부터 미국의 간첩임을 시인하는 증언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소련의 KGB요원을 지낸 이노겐치 김은 "박헌영 사건이 터지자 북한에 들어가 진상을 조사하였고, 박헌영의 미국 간첩 혐의의 증거가 불충분하여 처형을 막았다"고 증언하였다.
백학순(북한 전문가ㆍ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해방 후 65년에 걸친, 북한권력을 집중 분석한 책, "북한 권력의 역사"에서 공개한 "8월 종파사건" 이후, 미코얀과 마오쩌둥의 대화, 마오쩌둥과 북한 부총리 최용건의 대화에 의하면, 마오쩌둥도 "그가 미국간첩은 아니다"라고 인식했다 한다.
이병주(소설가)는 "미국 간첩 설"을 비판하면서, "김일성 일당은 박헌영 일당을 미국의 스파이라고 몰아 처단했다. 박헌영 일당이 미국의 스파이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남로당과 남로당의 지휘를 받은 빨치산은 스파이에 의해 놀아난 집단이 된다. 박헌영 일당이 아무리 허울 좋은 주장을 내건다 해도 미국의 스파이인 공산주의자를 민족이 용납할 까닭이 없다. 그런데 김일성이 박헌영 일당의 죄를 그렇게 조작했다면 이것 역시 용납할 수 없다. 그런 가공한 짓을 예사로 하는 김일성 일당은 분명 범죄 집단이다."라며 비판하였다.
친북조선 성향의 학자들과 논객들은 "박헌영을 미국의 스파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6ㆍ25 남침"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박헌영의 남로당 무장봉기 실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은 잘못이 없으며, "박헌영"의 배신과 함께, "박헌영과 미국의 밀약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인민군 패전"의 책임 모두를 "박헌영"의 책임이라고 하여, 미국의 스파이ㆍ반당 종파분자 등으로 처형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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