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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산주의 (남로당ㆍ빨치산ㆍ연안파ㆍ소련파)

파- 빨치산 : 성시백 (1905)ㆍ원조 남파 간첩ㆍ북조선 영웅 1호

by 당대 제일 202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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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백 (成始伯ㆍ1905~1950ㆍ45세)"은 원조격인 남파 간첩으로, 북조선공화국 영웅 1호이다. "김일성"이 회고하기로, 스파이 능력이 얼마나 출충했는지,  노인 변장을 해서 "성시백"인 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조선인인 것조차 주변 중국인들에게 완벽하게 기만, 숨겼다고 전한다.  "조선중앙일보ㆍ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 종이나 되는 신문들을 경영하여, 선전공작에 이용하였다.

 

1. 성시백 (成始伯1905~195045)

대표적인 남파 간첩대남 공작원공산주의 운동가정치가 (중국공산당조선공산당)ㆍ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화국 영웅 1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 최고 책임자ㆍ22세 때, "상해"로 건너가, "중국 공산당" 가입공산주의 운동 (20년 동안 "김일성"은 경쟁자인 "박헌영"이 장악하고 있던 "남로당"을 껄쩍지근하게 여겼고, 독자적인 정보망 구축을 위해서 당시 남한 우익인사들과 친분이 있던 "성시백"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던 것이었다.

•  출 생 :  황해도 평산      •  사 망 : 평양시 신미리 애국열사능 (가묘 시체는 "한국전쟁" 이후 발견되지 않았기에, "가묘"만 존재하며, "묘비"에는 "성시백 동지"란 이름 아래에 "남조선 혁명가"라고 쓰여져 있다.

•  사 인 : 총살 (1950.06, 군사재판에서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음 날인 27일 처형당했다)

•  별 칭 : 정향명(丁向明)명동백작    •  학 력 : 서울중동학교    •  가 족 : 막내아들 "성자립"2004"김일성대학 총장"이 됐다.

성시백

북한은 "성시백""남조선 혁명가통일혁명렬사"로 칭송하고 있다사후 "성시백""공화국 영웅 1" 칭호를 부여하고, "혁명렬사릉"에 안치(가묘)됐다1990년대 초반, "성시백"에 대한 영화인 "붉은 단풍잎"이란 7부작 영화를 제작하여 방영하기도 했다1997.05.26일자, "노동신문"에서는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라는 제목으로 "성시백"의 남한 내 공작행위를 칭송했다.

1949년 즈음부터, "남한 경찰여러 군 수사기관"에서는 "김일성"으로부터 특수지원자금을 받아, 남한의 주요 기관에 "비밀공작원"을 잠입시켜 기밀을 빼내는 등의 여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수사 기관들은 이러한 것들을 적발해 오던 중,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가 바로 핵심 기관이라는 점을 파악하게 되었다1950.02월경부터 남한의 정보당국은 본격적인 내사를 시작하여, 02.10일에 "남반부정치위원회"의 본거지를 파악하고, 최고 부책임자인 "김명용(金明用)"을 체포하고, 조직 문건의 일부와 각종 기밀정보, 관계서류 등을 확보하였다.

"서울지방검찰청"02.12일 비밀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수사총지휘자로 "오제도 부장"을 임명, 수사반을 편성하고 수사를 개시하였다. 1950.05.15, 오전 3,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의 최고책임자였던 "성시백""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체포되었다.

 "김구ㆍ엄항섭(김구의 심복)ㆍ이범석(초대 국무총리)"과도 친분이 있었고, "김홍일(장군)"과는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였다. 사실 "공산당 소속"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독립운동가"였다.

2. 1919년, 3ㆍ1운동에 참가

소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있는 "중동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중등학교" 재학 중에는 "31운동"에 참가하였다20살인 1925년부터 1926년까지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1928, "상하이"로 망명하여 1932"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후종난(胡宗南) 연대장"의 막료로 "정향명(丁向明)"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국민당" 통치하의 "서안지구 공산당 정보기관의 총책임자"활동하는 등 지하활동에 종사하였다.

이 일로 "중국 수상"을 지낸 "저우언라이(주은래周恩來)"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심지어 그가 조선인인 것조차 주변 중국인들에게 완벽하게 기만, 숨겼다고 전한다이런 간첩으로서의 인상적인 활약상으로 "저우언라이"와 깊은 인연을 맺었고 이후 "김일성"에게 좋은(?) 인재로 천거하기에 이른다. ("김일성"이 먼저 그 명성을 먼저 알고 소개를 요청했다는 설도 존재하나 구체적인 사료로서는 아직 정확하게 확인된 바 없다.)

"상하이"에서 "중국혁명호제회(中國革命互濟會)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난징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35"중경(重慶)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였다"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옌안"으로 갔다가 다시 "충칭(중경)"으로 이동하였다"팔로군 중경판사처(辦事處)"를 근거지로 삼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상으로 통일전선 활동에 종사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폭넓은 교류 관계를 유지하였다.

3. 광복 후, 남한 내 공작활동

1946.02, "부산서울"을 거쳐 "평양"에 들어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사회부(이후 통일전선부로 명칭 변경) 부부장"을 지냈다1946.03월부터 "김일성"의 직계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대한 연락 업무남한 정세파악좌우합작3당 합동 사업의 최선두에서 활동하였다1946.12, "김일성의 특사"로 자임하고, "서울"로 와서 지하운동에 종사하며, 남한 내 우익중간 정당단체들미군정청경찰첩보대군부심지어 재외대표부에까지 산하조직들을 만들었다.

그는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 데 이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 종이나 되는 신문들을 경영하여 선전공작에 이용하였다1947.05, "근로인민당" 결성을 지원하였고, 같은 해 겨울 "김일성"을 만나 "공산주의자민족주의자들의 합작"에 대해 논의하였다1948.04, "남북연석회의"에서 실무역할을 담당했고, 8"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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