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선사 (草衣ㆍ법명 : 의순 (意恂)ㆍ1786~1866ㆍ80세)"는 승려로, "한국의 다승"으로 한국의 "다도(茶道)ㆍ차 의식(茶儀式)"을 정립했다. "남종화"의 거두인 "소치 허련 (許鍊ㆍ1808~1893ㆍ85세)"을 길러 내기도 했다. "정약용"에게서 "유학ㆍ시문(詩文)"을 배웠으며, "김정희ㆍ신위"등과 사귀면서, "해남 두륜산(頭輪山)"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년간 "지관(止觀)"을 닦았다.
1. 초의 선사 (草衣ㆍ법명 : 의순 (意恂)ㆍ1786~1866ㆍ향년 80세)
조선 후기의 승려ㆍ"시(詩)ㆍ서(書)ㆍ화(畵)ㆍ다(茶)"에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불렸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불화ㆍ인물화" 등 "대흥사"에 있는 그림은 거의 대부분 "초의 선사"가 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자신의 저서 "선문사변만어"를 통해, "긍선(亘璇)"의 "선문수경"의 주장을 반박하여, "여래선" 이외에 "의리선"이 따로 있을 수 없으니, 2가지 선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 저 서 : 초의집(草衣集)ㆍ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ㆍ이선내의(二禪來義)
15세에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에서 승려가 되어, "금담(金潭)에게서 "선(禪)"을 닦고, "윤우(倫佑)"의 법을 이어받았다. "산스크리트어" 및 "신상(神像: 신령의 화상이나 초상)"에 능했다.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화엄경"을 새길 때, "증사(證師)"가 되었고, "달마산(達摩山) 무량회(無量會)"가 창립되자, 강석(講席)을 주재하였다.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선사"로서, "선"의 법맥을 이어갔다.
2. 다승(茶僧)ㆍ시승(詩僧)
"한국의 다승"으로 한국의 "다도(茶道)ㆍ차 의식(茶儀式)"을 정립했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직접 "차"를 기르고, 좋은 종자를 개발하는 데도 힘써, 그 지역을 "차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한 "동다송(東茶頌)ㆍ다신전(茶神傳)"을 비롯해 수많은 "다시(茶詩)"를 지어, "다도"의 이론적 확립을 모색했다.
스님의 "선(禪)사상" 역시 "다선삼매(茶禪三昧)"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였으니, 스님에게 있어 "차"는 "불가의 오랜 음다풍(飮茶風)을 넘어서서, 예술과 선 수행의 경지로까지 승화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뛰어난 "시승(詩僧)"이기도 했다. 그의 시는 "맑고 심오하고, 소순기를 벗었으며, 담백하면서도 높은 뜻과 격조를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서 "선사의 시풍이 맑고, 깨끗하며, 그윽하다"는 것은 "불가(佛家) 한시"의 주류적 시풍, 즉 "언외지지(言外之旨)"를 강조한 "직관주의 시학"의 전통과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두릉시사(杜陵詩社)"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두릉시사"의 구성원은 "정학연(유산 丁學淵)ㆍ정학유(운포 丁學游)ㆍ박종림(진재 朴鍾林)ㆍ박종유(광산 朴鍾儒)" 등이다. 이외에도 "초의시고"에는 "연사(蓮社)ㆍ청량사(淸凉寺)모임" 등등 많은 "모임명"이 나오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문사"들의 수를 세어 보면, 전체적으로 37명에 달한다.
40여 년을 국토의 최남단 "해남" 땅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서 주석한 것에 비해 많은 인물들과의 잦은 만남이라 여겨지는데, 이 역시 스님의 인품과 빼어난 문학적 재능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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