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국영 (洪國榮ㆍ1748~1781ㆍ33세)"은 "정조"의 매부 (원빈 홍씨ㆍ13세ㆍ정조의 1번째 간택후궁)로, 외모가 준수하고, 말을 잘하고, 머리가 영리하고, 공부는 적당하며, 약간은 가볍고, 가끔은 무례한 인물이었다. "얼굴이 예쁘장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이며, 시문을 잘 짓고, "창" 부르기 좋아하였다고 한다. "한중록"에는 그가 "사관"으로 봉직할 당시, "영조"가 그를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한다. "명의록"등은 그가 "세손의 오른 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1. 홍국영 (洪國榮ㆍ1748~1781ㆍ향년 33세)
조선 영조ㆍ정조 때 세도 정치가ㆍ문관
• 출 생 : 조선 한성부 • 사 인 : 병사 (주군에게 버림받은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하루 술로 보내다 화병으로 사망)
• 사 망 : 조선 강원도 강릉 (홍국영 묘소의 흔적은 없다)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는 "홍국영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묘소가 있었다고 한다. 1977년, 발간된 <전국문화재 총람>에는 "강릉전 홍국영묘"라는 제목으로 홍국영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묘소가 설명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묘소의 넓이는 약 50평 정도로 추정했으며, 1972년 후손들이 발견하였으나 아무런 유물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강릉 종합 운동장"으로 개발되었으며, 지금은 홍국영 묘소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묘소 인근에는 홍국영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이 전하는데, 명확하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아직 없다.
• 호 : 덕로 (德老) • 별 칭 : 흑두 봉조하 (흑발의 봉조하)ㆍ봉조하 (奉朝賀): 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종2품"의 관원이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ㆍ종신토록 신분에 맞는 녹봉(祿俸)을 받으나, 실무는 보지 않는다.
• 부 모 : 홍낙춘 (洪樂春)ㆍ우봉 이씨 부인 • 처 : 덕수 이씨 부인 • 가 족 : 매제 : 정조(正祖)ㆍ누이 : 원빈 홍씨(1766~1779(13세)ㆍ정조 1번째 간택후궁ㆍ가례 후 1년 만에 급사) / 11촌 : 혜경궁 홍씨 (영조 차남 장조(莊祖ㆍ사도세자)의 비)
• 활 동 : 조선 승정원 도승지ㆍ훈련대장ㆍ숙위대장ㆍ약원부제조 • 경 력 : 1772- 정시(庭試: 별시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
2. 몰락 이유 : 각종 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정조"에게 토사구팽 당하는 원인 중 하나는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여, 여동생이 사망한 뒤, 무리할 정도로 예우를 갖추게 하고, 더 이상의 후궁을 들이는 것에 반대하고, 양조카를 들여서 "정조"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인데, 이는 자신의 권세를 연장하기 위해, "정조"를 모독한 행위였다.
"김종수의 탄핵상소"를 시작으로 하여, "홍국영의 탄핵"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한중록"은 "김종수의 상소 역시,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탄핵의 포문을 연 "김종수 상소"에서 언급된 공식적인 탄핵 사유는 "후궁 간택을 막았다"는 것이었다. 또한 권력에 집착했던 그는 더욱 무리수를 두게 되는데, "상계군(이후 완풍군ㆍ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아들)"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들인 것이다. "완풍군"을 "정조의 양자"로 들여, "동궁"으로 삼으려 했다는 "동궁사건 설"도 몇몇 군데에서 언급된다.
"문양해 반란사건(정조7)" 당시, "왕비의 목숨을 위협했다"라는 기록도 있고, "정종대왕 묘지문"에는 홍국영이 "은전군 이찬(정조의 이복 동생)을 죽게하여, 몰락했다고 정조가 원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속설에는 "완풍군"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았다거나, "효의왕후 김씨"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 발각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0C에 등장한 야사로 짐작된다.
그의 권력의 절정은 1778년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원빈(元嬪)"으로 삼았을 때였다. 여전히 "정조"는 후사를 보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라, 누이동생이 왕자만 출산하게 된다면, 그의 권력독점은 완벽해 질수 있었다. 그런데 홍국영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비극이 다가왔다. 누이동생인 "원빈 홍씨"가 입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 없이 죽게 된 것이었다. 권력이 최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시점에 일어난 어이없는 불행이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ㆍ1754~1801ㆍ47세ㆍ사도세자의 서장자)"의 아들 "담(湛)"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들여, 왕실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다가 이것마저 실패하였다.
결국 홍국영은 최후의 선택, 그러나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았다. "효의왕후(정조의 정비)"가 동생이었던 "원빈 홍씨"를 독살하였다고 판단,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는 극단적인 방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고, 대신들은 당연히 "홍국영"을 극형으로 다스릴 것을 주청 들였다. 하지만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자신조차 위험에 빠뜨렸던 "정순왕후"를 용서한 성군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 생사고락을 함께 한 그를 차마 사형시킬 수 없었다. 결국 "정조"는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그를 "강원도 횡성 전리(田里)"로 좌천시켰다가 다시 "강릉부(江陵府)"로 방출하였다. 이것은 실질적인 파면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말단 관직은 유지시켜 주었다. 그러나 세도가 없는 그는 날개를 잃은 새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1781년, 젊은 나이로 지병을 얻어 "강릉부"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서울 풍산 홍씨"의 비조격인 "홍이상"의 8대손으로,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6대손으로서, 역시 "영안위" 후손인 "혜경궁 홍씨(영조의 차남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와 11촌의 동문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시절 때부터 "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라는 책을 펴냈는데,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명의록"등은 이 시기 홍국영이 "세손의 오른 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정조"는 즉위하고 나서, 당론서인 "명의록"을 펴내,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신의 즉위과정을 도운 "1등 공신"(소위 동덕회원(同德會員))이자, 최측신 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정조" 초기의 가장 주요한 사업인 "규장각"의 제일 처음으로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된 관료였으며, 유명한 "규장각" 서얼 사검서관의 "서용" 역시 홍국영의 천거와 설득으로 이뤄졌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가 축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1779년 음력 09.26일, 홍국영은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조정의 실직(實職)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담은 "은퇴 상소"를 올렸으며, "정조"는 당일 이를 수락한다. 이때 정조는 불과 30세의 홍국영에게 "봉조하 직함"을 내려주는데, 일찍이 "백발의 봉조하"는 있어도,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있게 되었다고 하여, 그는 "흑두 봉조하"라고 불리게 된다.
"한중록ㆍ정종대왕 행장"등 사후적인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홍국영이 자진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난 것 자체가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어 정설로 통하나, 이와 같이 사퇴시킨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정조"는 홍국영을 퇴진시키는 동시에, 백부 "홍낙순(洪樂純)"을 정승에 임명했다. 따라서 한동안 그의 세력은 조정에 계속 건재했으나, 홍국영의 "당여"들이 "서명응"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다가, 반대로 조정에서 축출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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