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朴文秀ㆍ1691~1756ㆍ65세)"는 암행어사로 역사에 이름을 날렸는데, 조선시대 수많은 암행어사가 있었지만, 그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암행어사"의 전형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그와는 달리 실제로 임금으로부터 "암행어사"로 임명된 적은 없으며, "별견어사(別遣御史)"로만 4번 파견됐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지방관" 시절 행적이 결합되어, "암행어사 박문수" 이야기가 생겨났다는 것인데, 실제 "암행어사"로 활동한 시기는 1년간(1727~1728)에 불과하며, 그나마 그 1년도 "영남 첩보" 목적으로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암행어사ㆍ관찰사"로 활약한 지역은 "영남 지역" 뿐이지만, "영남 지방"을 제외한 지방에도 "박문수가 왔다 갔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로 일반 백성들한테 명성을 떨쳤다.
1. 박문수 (朴文秀ㆍ1691~1756ㆍ향년 65세ㆍ호 : 기은(耆隱))
조선후기 영조 때, 호조참판ㆍ병조판서ㆍ함경도관찰사ㆍ문신ㆍ시인ㆍ정직하고 청렴한 벼슬아치로 늘 아랫사람을 자상하게 돌봐 주었으며, 일상생활에서는 유머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그는 엄숙하고 근엄한 선비의 풍모가 아니라 서민의 벗이었다. 칭송받는 점은 양반도 군포를 내라고 주장하는 등 백성의 편에서 입바른 말을 잘했었기에 어사직을 단기간 수행하면서도 암행어사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관찰사" 등 지방관으로서 군정ㆍ세정에 밝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 부 모 : 박항한 (朴恒漢ㆍ1666~1698ㆍ32세) • 처 : 본처 : 청풍 김씨ㆍ후처 : 전주 이씨 • 자 녀 : 박순규 (양자)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그는 큰아버지 "박태한(朴泰漢)"의 손자들 가운데서 1명(박순규)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그러나 고집이 센 성격으로 끝내 영의정에 오르지 못했다. "소론"이면서도 당론의 폐해를 비판하고, 당색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시니컬한 조크를 잘 날린다는 평만큼이나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하는 성격이었다. 농담을 즐기는 유쾌한 선비로, 수령들은 떨고 백성들은 환호하고, 현명한 재판관이었다. "영조"와 자주 독대를 했다고 한다. 군신 관계를 떠나서 거의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거기다가 고개까지 빳빳이 들고 서있었는데, 다른 대신들이 머리를 숙이라고 하자, "아첨하는 무리일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지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자 "영조"는 "박문수"처럼 얼굴을 들고 왕과 마주볼 수 있도록 개선하기도 했다.
"박문수"가 죽었을 때,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임금의 돌봄이 날로 높아져 벼슬자리가 정승의 반열에 이르렀다. 나라 일을 돌봄에는 마음을 다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병조ㆍ호조의 판서를 지낼 적에는 바로잡아 고친 것이 많았다. 여러 번 병권을 잡아서는 사졸들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경연의 자리에서는 때때로 우스개 말을 늘어놓아 조잡한 병통이 있었다." (영조실록 권 87ㆍ32.05월 초)
2. "영조"와의 관계
촉한의 "유비"는 수석참모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 "영조"는 "자고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뜻이 잘 맞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나와 영성(靈城ㆍ박문수의 군호)만 하겠는가?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영성이고,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나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박문수를 아꼈다.
박문수는 "영조"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허리만 약간 굽혔을 뿐, 큰 절을 하지 않았고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고 한다. 다른 벼슬아치들이 이를 나무라면 "영조"는 "임금과 신하가 너무 딱딱하게 지내면 서로 흉허물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이르고, "부복(고개를 숙이고 엎드림)하지 말고 얼굴을 들어 바라보라"고 했다.
1737년 (영조13) 윤 09.05일, "영조"는 막 모친상을 탈상한 "박문수"를 불러들였다. "경을 아는 자는 경이 나라를 위한다고 하고, 경을 모르는 자는 경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내 오랫동안 경의 광당(狂戇ㆍ미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뜻이 크고 곧은)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나는 경의 말을 취해 택할 것이다. 다만, 경의 자질과 품성에 비할 때 학문이 부족하다. 학문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자 박문수가 대답했다. "자신도 학문이 좋은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학문은 한갓 겉치레로 귀결되고 있으니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신은 비록 학문이 없지만, 옛 사람에 견주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조"는 크게 웃는다. "그래. 경이 옛사람과 우연히 일치되긴 한다."
임금이 학문에 힘쓰라고 훈계했는데, 신하가 그럴 필요 없다, 자신은 이대로 충분하다고 대답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영조가 크게 웃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날 두 사람의 대화에는 격의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편안한 사이, "영조ㆍ박문수"는 그런 관계였다. "박문수"가 죽자, "영조"는 이렇게 회고한다. "자고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뜻이 잘 맞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나와 영성(靈城ㆍ박문수의 군호)만 하겠는가?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영성이고,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나였다."(영조32년04.24) 서로에게 "지기(知己)였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박문수는 거침없는 말ㆍ행동ㆍ예의를 갖추지 않는 태도로 인해 자주 탄핵을 받았다. 그때마다 "영조"는 "경솔해서 그런 것뿐"이라며 용서해주었고 (영조3년02.20일 등 다수) "경은 지혜는 있으나, 혈기를 다스리지 못한다." (영조4년 11.01일) "경의 고집은 내가 실로 병통으로 생각한다." (영조6년 09.14일)라고 질책하면서도 항상 너그럽게 그를 대했다. 그가 출사하지 않으면, 따로 불러 "매우 간곡하게 위로하고 타이르며 달랬고"(영조18년 07.26일), 그를 모함하는 사람이 있으면 엄벌을 내렸다 (영조9년 04.22일ㆍ31년 05.27일). "정조"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영조"는 "잠잘 때 외에는 언제나 경을 생각한다"고 말했다고도 한다. (홍재전서 21권)
3. 왜 "영조"는 박문수를 총애했던 것일까?
① 왕세제였던 "영조"와 인연 시작
1724.04월(경종4), "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왕세제였던 "영조"와 인연을 맺은 이래, "박문수"는 충심으로 "영조"를 보좌했다. 소속 당파인 "소론"이 "영조"에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자 "삼종(三宗- 효종ㆍ현종ㆍ숙종)의 혈맥은 오로지 경종과 전하뿐이니, 신민으로서 마땅히 한마음으로 우러러 추대했어야 한다"라고 비판한다(영조 원년 03.15일).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이 벌어졌을 때에는 "토벌군의 종사관"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공로로 2등 공신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영조 4년).
② 박문수는 탁월한 업무능력을 발휘했다.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던 "군역제도"의 폐단을 조목조목 거론하며, "균역법(均役法)" 개혁의 불을 댕겼으며 (영조6 년 12.08), 오랜 기간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하며 바로잡고 개혁한 일이 많았다" (영조 32년 04.24). 특히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만든 "탁지정례(度支定例ㆍ국가 재정 운영체계)"는 "정조"가 "물샐틈없이 완벽하다"고 극찬할 정도다(홍재전서 172권).
③ 박문수는 "백성 구제 업무"에 두각을 나타냈다.
1727년(영조3), "경상도"에 처음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된 이래, 각 지역의 어사를 두루 역임하며 민심 수습ㆍ구휼을 책임졌다. 그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면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지 않았고 중앙조정과 충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중앙에서 근무할 때나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도 항상 민간의 농사 작황과 백성들의 생활 실태를 확인해 임금에게 보고했다(영조 7년 07.08). 이러한 "박문수"의 헌신에 대해 "영조"는 "깊이 생각하고 널리 염려하여 일을 맡으면 반드시 효과를 거두니,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가 있음을 알게 하는 사람은 경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라고 치하한다.
④ 박문수는 동료 신하들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조정의 관리들은 "문제점만 운운하며 대책을 실행해 보지도 않는다"고 힐난했고(영조 9년 01.27), "코를 골며 양처럼 잠만 잘 뿐 끝내 백성을 구하려 하지 않고ㆍ권세가들에게 아첨하며 섬기기를 노예와 같이 한다"라고 비난했다(영조 8년 12.18).
당쟁에 대해서도 "이것은 노론과 소론의 나라이지, 전하의 나라가 아닙니다"라며 직격탄을 날린다(영조 9년 12.19). 신하들이 벌떼와 같이 공격했지만, "영조"는 "당직(戇直ㆍ어리석어 보일만큼 성격이 곧다)한 발언"이라며 그를 옹호했다. 신하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조"로서는 박문수의 말에 속이 시원했을 것이다.
박문수는 "영조"에게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는데, "전하께서 직언을 들으려 하지 않으시니, 신하들은 전하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1, 2년이 지나게 되면 장차 나라가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라고 하는 등(영조 6년 12.08일), 독선적인 태도를 고치라고 간언했다. 그는 "일전에 전하께서 몹시 진노하셨을 때 신은 두려워 떨며 한마디도 진언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 죄는 실로 만 번 죽어도 속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임금이 화를 내고 있다 하여 직언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은 "본래 어리석고 광포하여 걸핏하면 제멋대로 행동하였는데, 다행히도 전하께서 포용해주신 덕분에 목숨을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에 품은 것은 반드시 전달하는 것으로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것이다(영조 9년 11.28일). 이런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영조"는 박문수가 아무리 극간을 하더라도 별다른 화를 내지 않았다. 대부분, 절실한 말이니 유념하겠다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하들을 위압적으로 대한 "영조"로서는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4. "영조"와의 만남ㆍ집안
"박문수" 집안은 대대로 명문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장원(朴長遠)"으로 "효종ㆍ현종" 연간에 벼슬아치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박장원"은 서인 계열이었는데 때로는 남인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거나 귀양살이도 했지만, 지방의 관찰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판서를 지내기도 했으며, 마지막에는 "개성부유수"로 봉직하다가 세상을 떴다. 그는 벼슬살이하면서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고 민정을 밝게 살폈다는 명망을 얻었다.
아버지 "박항한(朴恒漢)"과 할아버지 "박선(朴銑)"은 높은 벼슬자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학자ㆍ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들은 초야에 묻혀 당쟁으로 편할 날이 없는 조정을 멀리하고 수양ㆍ학문연구에 몰두하며 몸을 깨끗이 했던 것이다. "박문수"는 할아버지ㆍ아버지의 덕을 깊이 입었다.
9세 무렵, 아버지가 죽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서당에 다니면서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하는 장난꾸러기로 말썽을 부리기 일쑤였다. 또한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재치 있는 소년이었다. 몇 번 과거시험에 낙방을 하다가 3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그는 세제(世弟)이면서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영조"를 모셨다. 따라서 그는 누구보다 영조의 착잡한 심정을 잘 헤아리고 있었다. 그는 "영조"의 말벗이 되어, "영조"의 신변을 보호했다.
강경파 "소론"은 틈만 나면 "영조"를 해치려고 했다. 현실이 이러하니 청년 "박문수"의 앞날도 점치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가 떠받들고 따르던 "이광좌(李光佐ㆍ소론의 영수)"도 정치적 시련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우스갯소리를 잘해서 "영조"와 그 주변 사람들을 웃겼는데, 때로는 점잖은 벼슬아치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끝내 병에 시달리던 "경종"이 아들 없이 죽어, "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이제 그의 출세길도 탄탄할 법했다. 그런데도 그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영조"를 떠받들던 "노론"이 집권하자, 비록 온건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소론" 계열로 꼽히는 그도 벼슬자리를 빼앗기고 쫓겨났던 것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울적한 마음을 달래며 아버지ㆍ할아버지와 같이 학문에 열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이 또 한번 바뀌었다. 1727년(영조3), "정미환국(丁未換局)"이 일어난 것이다. "영조"가 왕위에 오를 당시, "노론"이 큰 공을 세웠다. 그들은 정권을 움켜쥐고 조정을 그들 인사들로 채웠으며 사사건건 임금의 비위를 거스리며 제멋대로 일을 처리했다. 이들에게 싫증이 난 "영조"는 "노론"을 몰아내고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등장시켰다. 그렇게 온건 소론이 집권하면서 "이광좌"는 "박문수"를 불렀다. "박문수"는 3년 만에 조정에 나와 다시 "영조"의 주변에 있게 되었다. "영조"는 이때도 그를 남달리 아껴 주었다.
5. 일화
① "경상도 관찰사" 시절, 홍수로 피해 구휼
"경상도 관찰사" 시절, 경상도 지방 바닷가를 돌아보는데, 마침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는 일이 있었다. 바다에 집채가 떠내려 오고, 그릇ㆍ목재 따위가 밀려와 바닷가에 가득 쌓였다. 이 물건들이 북쪽에서 떠 내려온 것을 본 그는 "강원도나 함경도 "지방에 큰 홍수가 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곳 "제민창(濟民倉)"의 곡식 3,000석을 북쪽으로 실어 나르도록 결정하고, 그 사실을 뒤에 조정에 보고했다. 이런 처리는 나중에 큰 문책이 따를 수 있는 위험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이 조치를 적극 말렸다.
"조정의 명령도 없이 곡식을 다른 도로 옮기면 뒷날 문책이 따를 것입니다." "북도 백성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경상도의 곡식을 옮겨 주는 길밖에 없소!" "내가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문제이나, 백성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그는 서슴없이 곡식을 배에 싣고, 북쪽으로 가게 했다. 그때 "함흥"에 있는 "함경감사"는 큰 수해를 당했으니, "경상도"의 곡식으로 구제해 달라는 글을 조정에 올린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바다를 바라보니 깃발을 꽂은 많은 배들이 곡식을 가득 싣고 포구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조정에 곡식을 요구하는 글을 보낸 지 며칠도 되지 않아 곡식이 도착한 것이다.
곡식은 적시에 각 고을에 보내져 이곳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살려냈다. 그곳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아 "함흥"의 "만세교 다리" 앞에 그를 기리는 송덕비를 커다랗게 세웠다. 골골마다 송덕비가 있지만 대개 부정한 관리가 자기의 청렴을 드러내기 위해 강제로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송덕비만은 예외였다. 함흥사람들은 이 비석을 소중하게 돌보았다고 전한다.(국조인물지) 그 뒤 그는 "충청도"에 어사로 나가기도 하고, "함경도 어사ㆍ경상도 균세사(均稅使ㆍ조세를 감독하고 공평하는 하는 소임)"로 나가기도 하면서 굶주린 백성의 구제ㆍ세금징수의 공평을 위해 정열을 바쳤다.
② 미역장수
한번은 암행어사로 다니면서, "종 돌쇠"를 데리고, "전라도 완주지방"을 지나고 있었다. 길가에서 한 미역 장수를 만났는데, 미역 팔 생각은 하지 않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미역 장수는 미역을 팔러 나간 형이 돌아오지 않아 찾는다고 했다. 그와 돌쇠는 장수와 함께 돌아오지 않는 미역 장수의 형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 어느 산골에 있는 수상한 큰 집을 발견했다. 박문수가 그 장수의 미역을 몽땅 사 짊어지고, 그 큰 집 앞에 가서 "미역 사려"를 연달아 외쳤다.
어느 여인네가 통곡을 하며 나오더니, 자기 남편이 죽었는데, 염습을 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새끼줄을 주는 것이었다. 새끼줄은 썩어 있었다. 박문수는 돌쇠에게 단단한 새끼줄을 몰래 가져오게 하여 시체를 묶었다. 그 여인네는 자기 집안은 시체를 절벽에 떨어뜨린다며, 시체를 지고 절벽으로 가 달라고 했다. 박문수는 시키는 대로 절벽으로 갔는데, 그때 묶여 있던 사람이 죽은 자가 아니라서 새끼줄을 끊으려 했지만 썩은 새끼줄이 아니었기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부부는 이런 식으로 장수들을 속이고, 유인해 절벽에서 죽이고 그 물건을 차지하는 수법을 써 왔던 것이다. 미역 장수의 형도 그 수법에 걸려 죽은 것이다. 박문수는 이들 부부를 잡아 관가에 넘겼다.
③ 영험한 스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느 영험한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불 붙은 장작 위에서도 순간이동으로 위기를 빠져나오며 그 법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다고 했다. 이에 박문수는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어 그 스님이 불 속에서도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는 무대로 가서 관중들 틈에 끼어 지켜보기로 하는데, 그날은 법력이 모자랐는지 갑자기 몸에 불이 붙어 뜨거움을 호소하다가 결국 극락세계로 가게 되었다. 그러자 박문수가 "이 스님은 사기꾼입니다"라고 폭로하고 왜 멀쩡했는지 밝혀냈다.
그 수법인즉슨 장작더미 밑에 암자 뒤로 통하는 굴을 파 놓고, 장작더미에 불이 붙으면 그 굴로 들어가는 거였는데 누군가 입구를 막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 지금으로 치면 마술사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걸 갖고 병을 고치네 마네하며 약장수 비슷한 짓을 했던 것이다. 그 뒤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밝혀냈고 관속들 몰래 함께 빠져나가고 왜 살해했는지 물어봤더니 그 범인도 사실 사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범인은 이 지방에서 꽤 잘사는 좌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지방 유지인 사람으로, 자식이라고는 데리고 왔던 딸 하나 뿐인데 그 딸은 어릴 때부터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으나 오늘 죽은 문제의 승려를 만나 병이 나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그 뒤로부터 승려는 이를 빌미삼아 재물을 요구하고 그때마다 재산을 바쳤지만 하필이면 최근 명문가에 준하는 가문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게 되자 재산의 반을 내놓으라 강요하고 안 내놓으면 그 딸의 병력을 폭로하겠다고 계속해서 협박하는 바람에 참다 못해 승려가 술법을 쓰기 시작할 때, 트릭을 위해 파 놓은 굴의 입구를 막아 승려를 태워 죽여버린 것이고, 굴에 들어갈 때 입은 흙 묻고 그을린 옷은 딸이 가져온 여분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범인은 닷새 뒤가 딸의 결혼식이니 딸의 혼례식 이후에 벌을 내려달라고 하지만 사기꾼 승려의 사악한 본모습과 사건의 원인이 된 범인의 사연을 들은 박문수는 그의 사정을 알고 범인을 용서하는 선처를 내린 뒤, 이튿날 다시 여정을 떠난다.
④ "무주 구천동"의 설화
한번은 길을 가던 중, 밤중에 "덕유산"에서 헤매다가 어느 마을에 당도하였는데 다들 불을 끄고 잠이 든 가운데 유독 어느 한 집만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괴이하게 여긴 박문수가 몰래 들어가서 문틈으로 엿보았더니, 젊은이가 아버지로 보이는 늙은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고 그 늙은이가 울면서 칼로 젊은이를 살해하려 하는 것이었는데, 곁에는 며느리로 보이는 여성을 시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칼로 찌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급히 말리고는 사연을 들어 보았는데,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이 마을에 사는 어느 힘 깨나 쓰는 포악한 "천씨 부자"가 느닷없이 달려와 이유없이 누명을 씌우고는 그 부자의 아내와 며느리를 같은 날 같은 시각 자신과 자신의 아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결혼식을 강제로 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천씨 부자" 중 "천씨 노인"은 자기 며느리가 달아났으면 아들만 새로 결혼시키면 되는데 자기까지 새로 결혼하려고 한 이유를 보면 홀아비처럼 보이지만 본처가 있었다.
본처가 있음에도 자기가 괴롭히는 부자 중에서 아버지 쪽의 아내를 노리는 이유는 그 부인이 미인이었기 때문이며, 며느리도 그 아들의 아내에게서 빼앗아서 아들을 새장가 보내려고 한 것도 며느리도 미인이었기 때문에 자기 아들도 그 집의 며느리를 탐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천씨 부자"가 다른 성을 쓴다는 이유로 죄도 없는 다른 부자를 집요하게 괴롭힌 것도 그 집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미모가 탁월해서 빼앗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동반 자살을 시도했던 것인데 자식이 차마 부모를 죽일수가 없어 아들과 며느리가 각각 시부모에게 죽여달라고 울며 청한 것이었다.
끔찍한 사연을 듣게 된 박문수는 자신이 해결할테니 걱정말라며 두 부자를 안심시키고 바로 "무주 고을"로 가서 광대들을 소집하고는 그중 힘 좋고 재주 잘 넘는 젊은 광대들을 골라 뽑아 오방색 깃발과 장군복을 준비해서 같이 그 장소로 다시 갔다. 마침 날이 밝아서 과연 그 천씨 부자가 결혼식장을 차려놓고 결혼 준비를 자신들이 괴롭히는 두 부자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강제로 치장시켜 놓았고, 어느새 구경꾼들이 운집해 있었다. 예의 그 부자와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지나가던 나그네의 말을 듣지 말고 자결할 걸 그랬다며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경꾼들이 두 무리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박문수가 황색 깃발을 든 황룡 신장(神將) 복장을 하면서 다가와 차려져 있던 혼례상을 벼락같이 내리치고는 큰 소리로 4명의 사신 신장을 차례로 부르니 또 사방에서 신장 복장을 한 광대 4명이 1명씩 벼락같이 날아와 "황청백주현(황룡ㆍ 청룡ㆍ백호ㆍ주작ㆍ현무) 오방신장"이 한 자리에 십자 모양으로 선 형상이 되었다. 그러자 박문수가 다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어 이 자리에 왔노라. 어느 날 어느시에 무주 구천동에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른 사악한 신랑 두 놈을 잡아오라 하셨으니, 사방 신장은 협력하여 즉시 사모관대한 두 놈을 끌고 가도록 하라."
이 말에 광대들이 2인 1조로 "천씨 부자"를 끌고 나갔고, "구천동" 밖 삼십리쯤에 있는 어느 산골에 다다랐을 때 박문수는 그간 "천씨 부자"가 저지른 죄들을 낱낱이 논한 후, 광대들을 시켜 "천씨 부자"를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그 시체를 묻고 광대들에게 사례한 후 "구천동"을 떠났다. 광대들이 "천씨 부자"를 처형할 수 있었던 것은 광대들은 신분이 천민인데, 광대들은 처형장에서 "망나니"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박문수가 대동한 광대들이 "천씨 부자"를 처형한 것은 고증에도 맞다. 10년 후, 다시 "구천동"에 갔더니 생전 처음 보는 큰 기왓집이 있었다.
10년 전 괴롭힘 당하던 부자의 집이었다. 노인이 된 그 부자 중 아버지는 박문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박문수 역시 시치미를 뗀 채 그간의 일을 물어보자 그 일이 있은 뒤로 "하늘이 그 덕을 아는 집"이라 하여 "구천동"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가세가 번창하게 되었으며, "구천동"의 주민들도 그 부자의 집의 덕을 본받자며 선행을 하여 "구천동"이 존경을 받는 고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박문수는 그저 웃으며 모두 하늘의 덕을 받았노라고 말하고 다시 "구천동"을 떠났다고 한다. 나중에 "영조"가 이 사실을 알고는 왜 자신이 한 거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하니 박문수는 그러면 그 노인은 더 이상 착하게 살지 않을 것이며, "구천동" 사람들은 다시 악행을 저지를 것이라고 했다. "영조"는 박문수의 지혜에 감탄했다.
⑤ 길을 잃고, 낡은 집에 머물게 되었을 때, 생긴 일
박문수가 길을 가다가 길을 잃고 어느 낡은 집에 머물게 되었을 때 일이다. 홀어머니와 같이 살고있는 집주인 청년은 집에 있는 쌀로 저녁을 대접한 뒤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한다. 남은 가족으로는 홀어머니 한 명뿐으로 아버지는 이 산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두 형은 "이인좌ㆍ정희량"의 반란 당시 억울하게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이 되자, 포졸들이 청년을 잡아가려고 하는 것을 본 박문수는 청년에게 아침상을 받으며 청년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데, 청년은 예전에 매파가 "좌수 집안"의 외동딸과의 혼인을 주선한 일로 "좌수"가 노해서 청년에게 툭하면 곤장질을 일삼는 등 엄청나게 시달린다고 하소연한다.
알고 보니 근처 "남원 고을의 좌수인 이성오"란 사람은 고을 이방으로 꽤 자산가이다 보니 무척 오만한 성격이라고 한다. 게다가 몇가지 죄도 있었던 모양. 다만 딸은 아버지와는 달리 얌전하고 정숙한 규수로 유명한 듯 했다. 이에 박문수는 착한 청년을 도와주기로 했으며, 자신이 삼촌을 자처하여 암행어사 마패를 들이밀고 좌수의 딸과 혼인시키고, 재산의 절반을 총각에게 넘겨주게 해서 서로 잘 살았다는 일화가 있다.
⑥ 박문수가 고개를 넘다가 그만 배고픔에 지쳐 쓰러져버렸다.
그 때 어느 한 여인이 쓰러진 박문수를 발견했는데, 주위에 먹을 것도 없던 터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가슴을 내밀고 박문수에게 모유를 먹였다. 모유를 먹일 수 있었던 것은 이 여인이 출산한 지 얼마되지 않아 아이에게 줄 젖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진 게 없는 차에 죽어가던 박문수를 보고 경황없이 자신의 모유라도 먹여 구하고자 한 것.
이 때 그 광경을 본 나물 캐는 아낙네들은 경악했으며, 그 사실을 그 여인 남편에게 일러바쳤다. 화가 난 남편은 박문수와 아내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박문수가 마패를 내밀었다. 그러자 남편은 얼굴이 사색으로 변하면서 박문수에게 용서를 빌었다. 박문수는 그 남편에게 따끔하게 호령을 한 다음 다시 갈 길을 갔다. 그 뒤 남편은 나라에서 파견한 어사를 폭행했으니 무사하지 못했을 터, 결국 관아에서 원님의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일 때 박문수가 남편을 용서하고 자신을 살려준 아내에게 상을 내려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사에게서 논밭 50마지기를 상으로 받았으며, 그 후 마패를 가진 사람들이 가서는 안 될 고개라는 뜻인 "금패령(禁牌嶺)"의 유래가 되었다. 박문수가 상을 내릴 때, 논밭 50마지기를 남편이 아닌 자신을 구한 아내의 재산으로 상을 내렸는데, 이는 그 남편이 아내를 핍박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⑦ 하루는 박문수가 "박좌수"라는 부자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조카가 그 유명한 "박문수"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밤에 몰래 마패를 보이고 "박좌수"를 추궁하자 자신의 정체를 밝히길 "박좌수"는 원래 "백정" 출신이었다. 당연히 "백정"은 조선 시대에 사람 취급도 안했는데, "좌수 증명서"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박문수가 물어보니, 그는 원래 백정 일로 많은 돈을 벌긴 했지만, 백정이다 보니 길가는 어린아이에게도 천시를 당해야 했고 이 억울함을 알고 지내던 그 고을 이방에게 호소했는데, 이방이 꾀를 내어 마침 새로 온 수령에게 박씨를 "좌수"로 추천했다.
물론 그 동네 양반들이 당연히 들고 일어나서 "좌수" 자리는 취소되었지만, "좌수 직첩" 자체는 뺏기지 않고 갖고 있게 되었고, 이 직첩을 가지고 다른 곳에 이사해서 살면서 "좌수"를 지냈던 양반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 양반들이 의심을 하기 시작하자 유명한 박문수를 자기 조카라고 속인 것이었다. 박문수가 이 이야기를 듣고 "박좌수"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주는 것도 모자라 마을에 머무는 동안 진짜 조카 노릇을 해주자 그 고을의 양반들도 "박좌수"가 박문수의 숙부라고 믿어 그동안 의심한 것에 설설기며 용서를 빌었고 "박좌수"도 이를 고마워해서 나중에 박문수 몰래 그의 집을 새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박문수의 동생이 "박좌수"의 존재를 알고 감히 백정 따위가 양반을 농락한다며 그의 집으로 가서 큰소리를 쳤지만, 오히려 "박좌수" 집 하인들에게 매를 맞고 "이놈이 제 조카인데 미친 병에 걸려서 헛소리를 내뱉는답니다."라는 말을 듣고 쫒겨나 버렸다. 이후 박문수의 동생이 박문수에게 이 일을 호소하자 ,박문수는 껄껄 웃으면서 "박좌수가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인데, 너같이 어린 녀석이 함부로 상대할 인물이 아니라"며 오히려 동생에게 한소리 했다고 한다.
⑧ 어느 지역에서 "의적" 얘기를 듣게 되었다.
부잣집도 간단히 털어버려서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어사의 신분상 이런 인물을 내버려두는 것도 좋은 건 아니기에 당연히 잡아야 했다. 문제는 하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인물이라 잡기 어려웠다는 것인데 고민 끝에 자신을 한양에서 도적 잡으러 온 사람이라 속이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도적 쪽에 흘리기 위함이었는데 도적은 이를 알게 되자 박문수에게 편지를 보내 헛수고만 할 거라며 비웃었고, 그게 허풍은 아니었는지 첫날에는 도적이 박문수의 봇짐을 털어 망신을 줬다. 하지만 2번째 날에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박문수에게 꼬리를 잡혔다.
문제는 도망치던 도중 막다른 길에 이르자 도적이 담을 넘어버려 놓치고 말았다는 것인데, 담 너머에는 두 집이 있었고 두 집에 사는 사람은 각기 다른 특징이 있었다. 1번째 집사람은 장님이었고, 2번째 집사람은 귀머거리였는데, 박문수는 2명 중에서 귀머거리가 귀를 촛농으로 막아놓은 것을 알고 잡았다.
⑨ 흔치 않게 굴욕을 겪은 일이다.
어사 활동을 하던 도중 산길에서 한 사람이 다급하게 다른 사람에게 살려달라며 애원하기에 숨겨주었고,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 칼을 들며 아까 전 숨겨준 사람이 어디 있는지 대라고 말했는데, 겁먹은 박문수는 결국 위치를 알려주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멀어져 가는 칼 든 사람을 보며 박문수는 내 목숨 위태롭다고 남을 팔았다며 한탄했고 자신이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던 방법이 없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마을에 이르렀을 때,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았는데 한 아이가 사또 역할을 하고 나머지 아이들이 사또 역할을 맡은 아이에게 무언가를 청하고 있었는데, 내용인즉 키우던 새 2마리가 산으로 날아갔다며 찾아다 달라는 것. 넓은 산을 뒤져 새를 찾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곤란한 일이었지만 사또 역할을 맡은 아이는 새가 산으로 도망쳤다면 산을 끌고 오라며 산을 끌고 오면 내가 산을 추궁해 새를 되찾아주겠다고 말한다.
이에 박문수는 저 아이라면 혹시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던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다가갔는데, 아이들은 송사를 진행하는 놀이를 하고 있던지라, 사또 역할을 맡은 아이는 대체 누가 동헌에 함부로 오는 거냐며 놀이가 다 끝날 때까지 박문수를 묶어놓았다.
그러고 놀이가 다 끝난 다음에야, 묶어놔서 죄송하다고 사과한다. 풀려난 박문수는 사또 역할을 맡았던 아이에게 아까 전 있었던 일을 말하며 이럴 때는 어떻게 했다면 좋았을 거냐고 물어보았는데, 이에 아이는 장님 행세를 하는 게 좋았다며, 아무리 그래도 장님에게 물어볼 사람은 없었을 거라고(앞을 못 보니까) 답한다. 이에 박문수는 아이의 지혜에 감탄하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속으로 탄식했다.
⑩ 과년한 두 딸을 시집보낸 한 남자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최근에 두 딸을 시집보내게 될 때, 큰 딸은 뼈대 있는 양반 가문에 보냈지만, 문제는 시가(媤家)가 워낙 가난해서 밥보자기를 두를 정도였고, 작은 딸은 밥이나 먹고 사는 잘사는 집에 보냈지만, 그 집은 평민의 집이라 양반들에게 재산이 있단 이유로 늘 볼기를 맞고 재산은 재산대로 빼앗기기 일쑤였다고 한다.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한 박문수는 작은 딸이 시집간 그 집으로 가서 자신이 그 집의 친척으로 행세할 것이니, 큰 딸네 시가 식구들에게 재산을 반 정도 나눠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은 박문수 말대로 했고 박문수가 그 집의 친척 행세를 하자 얼마 안가 마을 양반들이 설설 기는 정도가 되었으며, 강제로 빼앗아간 재산도 알아서 다시 갖다 바쳤다. 둘째네 시가에게 재산을 받은 큰댁도 얼마 안가 제법 융성해졌다.
⑪ "도깨비 불" 사건
박문수가 밤늦게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을이 폐허가 되어 있으며 남아있는 마을 사람들도 짐을 싸들고 떠나는 흉흉한 광경을 보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된건지 영문을 모르는 박문수는 떠나는 마을 사람들을 잡고 물어보나 다들 아무 대답도 안하자 할 수 없이 홀로 이 마을을 둘러본다. 그러던 도중 마을을 순찰하던 순찰 대장과 마주치게 되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 난데없이 맞게 되며 못 이기다 못해, 자신의 호패ㆍ마패를 보여주어 정체를 밝히게 된다. 결국 기겁한 순찰대장은 박문수에게 죄송하다고 사죄를 하며, 박문수도 순찰대장의 호쾌함에 도리어 웃으면서 넘어간다. 그 뒤 순찰대장으로부터 이 마을의 사정을 듣게 된다.
본디 강을 경계로 AㆍB 두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A 마을에서 "도깨비불이 떠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처음에는 단순 소문으로 여겨졌으나 그 "도깨비불을 봤다"는 목격담이 들려왔고, 심지어 그 불로 인해 죽은 사람도 생기자, B 마을 사람들은 A 마을을 가길 꺼려하며, A 마을은 사람들이 떠나 빈 마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들은 박문수는 얼른 이 사태를 수습해야겠다고 싶어 주막에 있던 주모에게 "도깨비불"이 나타난 후 득을 본 사람이 없었냐며 묻고, B 마을의 무당 부부와 A 마을의 꼽추 노인이라는 걸 듣게 된다. 그 뒤 순찰대장에게 의논하여, "내가 불이 날 장소에 숨어 있을테니, 몰래 매복해 있다가 내 신호를 들으면 포졸들을 이끌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가 비어있던 집에서 불을 내려 기름을 부었으며, 그걸 본 박문수는 신호를 보내어 그들을 잡는다.
문초해본 결과, 이 무리는 "무당 남편ㆍ꼽추 노인"이었으며, "도깨비불의 소동"도 바로 이들이 범인이었다. 알고 보니 무당이 돈을 벌기 위해, "도깨비불이 나타난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그 일을 해결 해준다는 핑계로 돈을 뜯어내고 있었으며, "도깨비불"의 소문을 믿기 위해 "무당 남편"이 "꼽추 노인"과 짜고, 방화를 저지르는 천인공노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해 돈을 뜯어낸 것은 물론 아무 죄 없는 사람들도 죽게 한 그들의 뻔뻔한 행동에 노한 박문수는 "무당 부부ㆍ꼽추 노인"을 잡아 극형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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