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宋時烈ㆍ1607~1689ㆍ82세)"은 국가의 스승ㆍ주자학의 대가ㆍ서인의 영수ㆍ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다. 조선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조광조ㆍ율곡 이이"의 학풍을 계승한 "김장생"의 제자로,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 배출했으며, "봉림대군(17대 효종ㆍ인조의 2남)ㆍ현종(18대)"의 사부 (고산 윤선도도 사부임)였고, "송준길(송이창 아들)"과는 동문수학한 친구로, 후에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이 있었다.
1. 송시열 (宋時烈ㆍ1607~1689ㆍ향년 82세)
조선 효종 때의 문신(의정부 우의정)ㆍ성리학자ㆍ철학자ㆍ시인ㆍ"효종(1649~1659)"이 갑자기 승하할 때까지, 절대적인 신임 속에 북벌계획을 추진하는 핵심적인 인물ㆍ"현종(1659~1674)" 때, 조정에서 부단한 관직의 제수가 있었지만 사양하고, 야인의 신분으로 자문.
• 출 생 :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里)의 외갓집ㆍ출생 며칠 전, 마을 앞의 강물이 이유 없이 바싹 말랐다가, 태어나자 다시 물이 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밝은 달과 같은 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얻고 잉태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송시열이 나기 전날 밤에, 마침 "종가"에 제사를 모시러 "청산" 땅에 머물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홀연히 "공자"가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그 중의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아이를 그대에게 보내니 잘 가르치시오."라고 말한 뒤, 사라지는 꿈을 꿨다고 한다. "송갑조"는 송시열이 태어난 이후, 꿈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보았다 하여 "이 아이는 성인이 주신 아들이다."라고 하여, "성인이 왔다"는 뜻의 "성뢰(聖賚)ㆍ성래(聖來)"라는 이름의 아명을 지어줬고, 후에 "시열(時烈)"로 고쳤다.)
• 사 망 : 전북 정읍군 태인(객지)→ 시신은 "대전 회덕"으로 운구 • 사 인 : 사형 (서울로 압송 도중, 숙종의 명으로 사사(賜死)로, 사형 집행) • 별 칭 : 대로(大老)ㆍ송자(宋子)ㆍ송부자(宋夫子)
• 호 : 우암(尤庵)ㆍ우재(尤齋)ㆍ교산노부(橋山老夫)ㆍ남간노수(南澗老叟)ㆍ화양동주(華陽洞主)ㆍ화양부자(華陽夫子) • 부 모 : 부- 은진(恩津) 송갑조(宋甲祚)ㆍ사옹원 주부))ㆍ모- 선산 곽씨(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
• 처 : 한산 이씨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고려시대 목은 이색의 후손) • 자 녀 : 4남 2녀 • 가 족 : 사돈- 윤선거ㆍ권시ㆍ윤증ㆍ윤휴 / 후손- 송병선(유학자),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순종 황제에게 유언 상소를 올리고 자결
• 스 승 : 송이창(송준길 부친)→ 송갑조→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김장생 아들)
• 친 구 : 송준길(송이창 아들):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 / "김장생"의 문하생(절친 관계)- 송준길ㆍ윤선거ㆍ윤휴ㆍ유계ㆍ이유태 / 윤선거→ 병자호란을 계기로 관계악화, 윤휴ㆍ윤선도→ 예송 논쟁 이후→ 정적으로 돌변ㆍ "윤휴"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는 "윤선도ㆍ허목"을 편들면서, 원수로 돌변
• 제 자 : 효종ㆍ현종ㆍ명재 윤증ㆍ권상하ㆍ김기하ㆍ김만기ㆍ김만중ㆍ김수항ㆍ김익훈ㆍ김창협ㆍ민시중ㆍ민유중ㆍ민정중ㆍ민진원ㆍ송규렴ㆍ송상기ㆍ송상민ㆍ이경화ㆍ이기홍ㆍ이단하ㆍ정호 등의 900여 명의 문하생 배출
• 명재 윤증 : 수제자로 손꼽혔으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 (회니시비 논쟁)ㆍ자신의 친구이자, 인척인 "윤선거"가 혼자 살겠다고 "강화도"에서 피신한 것을 비겁하게 생각했는데, 이 때문에 제자이자, 인척인 "윤증"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 권상하 : 수제자였던 명재 윤증이 등을 돌린 뒤, 송시열의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 경 력 : 1633년(인조11)- 생원시 장원→ 1635년(인조13) "대군사부(師傅)"가 된다.
• 저 서 : 송자대전(宋子大全)- 송시열 저서 모음집, 사후 편찬 • 우암집(尤庵集)ㆍ우암선생후집(尤菴先生後集)ㆍ우암유고(尤菴遺稿)ㆍ주자대전잡억ㆍ송서습유(宋書拾遺)ㆍ송서속습유(宋書續拾遺)ㆍ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ㆍ정서분류(程書分類)ㆍ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ㆍ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ㆍ심경석의(心經釋義)ㆍ삼방촬요(三方撮要)ㆍ삼학사전(三學士傳) • 작 품 : 장릉지문(長陵誌文)ㆍ영릉지문(寧陵誌文)ㆍ송준길묘지명ㆍ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宋子)ㆍ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조선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년(정조11), "정조"가 송시열의 유고를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을 간행하여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송자"는 동양철학의 본류인 "유학"의 시조인 "공자"와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주자"를 계승하여 조선유학을 집대성했음은 물론, 심오한 동양철학의 체계를 최종적으로 정립한 역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 3,000회 이상 등장한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대학자"로 "임진왜란ㆍ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이 이를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를 여는데 이론적 배경과 방향타를 제시한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주자"의 "예론"에 깊이 공감하였는데, 이후 그는 "주자"를 평생 사표로 받들고, 신념을 지켜나갔다. "대군사부(師傅)"일 때, 그가 항상 "주자"를 언급하자, "효종"은 "말마다 옳은 이는 오직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오직 주자이십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ㆍ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송 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1년 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당초 "1차 예송"에서는 "허목ㆍ윤휴"의 "3년 복설"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다가, "윤선도"가 그의 본심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난하고, "허목"이 그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남인"과 적대하게 된다. "예송 논쟁" 당시, "송준길ㆍ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ㆍ거제도"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경종)"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서울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된다. "유배"와 1689년 "사형"에 이르러서는 그는 자신의 "사형"을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고, "의"를 위한 당연한 "순교"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1756년(영조32)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송시열이 사망한 지 5년 후에, "문묘ㆍ효종묘"를 비롯하여, 충북 청주의 "화양서원", 경기도 여주의 "대로사", 수원의 "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와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단하ㆍ윤증ㆍ민정중ㆍ민유중ㆍ김기하ㆍ권상하ㆍ이여ㆍ정호"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다. "윤선거ㆍ윤선도ㆍ윤휴"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일제는 "조선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송시열 폄하작업"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송시열"은 "사대주의의 표상ㆍ수구보수 사상의 원조ㆍ사색당쟁의 원인 제공자"등으로 잘못 인식돼왔으며, 이것은 "송시열"의 "사상과 기호학" 전반에 관한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부진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숙종의 송시열 사사 (賜死): "희빈 장씨"의 아들 "왕자 균(경종)" 원자 책봉 반대
"송시열"은 "사약 (賜藥ㆍ주다ㆍ하사하다ㆍ은혜를 베푼다)"을 먹고, 시간이 흘러도 죽지 않아 여러 번에 걸쳐 많은 양을 마시고 나서야 겨우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약을 먹고도 쉽게 죽지 않은 것은 이미 치료 목적으로 중금속인 "비소(As)"를 복용한 적이 있어 내성이 있었다는 설도 있고, 사약에 들어간 한약재인 "부자ㆍ남성"이 그의 몸에 큰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송시열"은 "소변"을 약으로 오랜 기간 먹었는데, "소변독"으로 몸에 문제가 생기자 치료를 위해 "비소(웅황)"를 먹고 나았던 과거가 있다. 82세라는 많은 나이에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 아주 특이하다. 또한 "대신"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대신은 역적이 아니면, 사형당한 전례"가 없었는데 그는 "역적이 아니라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사형을 당했다.
그것도 "국문"을 당하기 위해서, "중전 폐비 문제"로 유배된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 "정읍"에서 서둘러 "금부도사"를 내려 보내 사사하라는 처분을 받게 되었다. 송시열은 "의금부"에 가서,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죽으리라"고 장담했었다. 그가 서울로 올라와서, 그를 국문시켰을 때의 파장을 우려한 "숙종"은 그에게 사약을 내린다. "남인"은 그를 "한성부"로 압송해 국문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인"인 "의정부 영의정 권대운" 등이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라"고 권하자, "숙종"은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사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음력 1689.06.03일, "제주도"를 나와, 육지에 도착하자 수많은 문도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전북 정읍"에 이르자, 이미 "사약(賜藥)"이 내렸으므로, 제자 "권상하ㆍ김만준"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도성을 향해 3배를 올린 뒤,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한다. 이어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서적ㆍ의복"을 "권상하"에게 "유품"으로 물려주었다.
평생을 학자로 살았던 것을 반영하듯, 죽기 전 제자들에게 "천지만물이 생긴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길은 오직 직(直)자 한 자뿐이니, 이것은 공맹(孔孟) 이래 전해 온 것이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죽기 전, 손자에게 자기가 쓴 상소를 나중에 올리라고도 했다. 자신의 "사약"을 "순교"로 해석했고, "유배생활"을 "정도를 걷는 자에 대한 사도의 탄압"으로 여겼다. 사후, 제자였던 "권상하" 역시 송시열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하였다. "권상하"는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ㆍ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며 "윤증ㆍ허목ㆍ윤휴"가 술수를 꾸며, 송시열을 죽게 했다고 굳게 확신하였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묘비문"을 쓰면서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ㆍ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글귀가 문제시되어, 다시 "노론ㆍ소론"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가 사사될 무렵, 하늘에서 "문곡성"이 떨어지고, "해일"이 일었다는 전설, 하늘에 "일식" 혹은 "월식"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놀랐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편 "남인"들은 그가 사약을 받지 않으려고 "효종ㆍ현종"의 "유필"을 핑계 삼아, 억지를 부렸다는 전설을 지어냈다.
사직 후, 정계를 은퇴한 뒤, "충청도 청주 화양동(華陽洞)"에 내려가 학문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688년, "숙종(당시 28세)"이 "희빈 장씨"에게서 아들 "왕자 균(경종ㆍ20대)"을 얻었다. "경종"의 탄생은 그간 아들이 없던 왕실 입장에서는 대단한 경사였으나, "숙종"이 100일도 안 된 후궁의 아들을 이례적으로 갑자기 무리하게 원자로 책봉하려 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이미 서인 일각에서는 "장희빈ㆍ남인 세력ㆍ숭선군ㆍ동평군" 등이 결탁하여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대해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지적한 "박세채ㆍ남구만ㆍ김만중" 등을 유배시키거나 호되게 질책하면서, "장희빈"을 위해선 대신을 벌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조정은ㆍ유상운" 등을 중심으로 "전하 나이도 젊은데,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숙종"을 만류하려 했지만, "숙종"은 막무가내였고,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가 내려지며, "장희빈"이 이때 "희빈"에 봉해진다. 그런데 "송시열"이 "송나라 신종이 철종을 10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두었다가,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해 태자로 삼은 예"를 들면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숙종"은 격노했고, 이를 계획적으로 공론화한다.
조정은 "다 정해진 마당에 부당하긴 해도 속셈이 있었겠습니까?"라는 태도를 보였으나, "숙종"은 "군주를 무시해서 그런 것이다. 놔두면 군주를 무시하는 무리가 잇달아 생길거다."면서 계획대로 걸려든 "송시열"을 삭탈관직하여 문외 출송한다. 그리고 승정원과 대신들을 갈아치우면서 "남인"으로 정권을 바꾼다. 당시 "숙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이를 이미 종묘에 다 고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은 "숙종"이 바라던 바였다.
"남인"은 "숙종"에게 적극 협조하며, 상대방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송시열"의 목숨을 요구했으나, 우선 송시열의 애제자이자, 영상 "김수항"이 사사된다. 하지만 "숙종"은 "송시열은 죽여 마땅하긴 해도, 절도에 안치했으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잠시 물러서더니 "인현왕후 폐위"를 문제 삼아서 반대하는 소론 "박태보ㆍ오두인"등을 사실상 장살하고, 남인들의 반대까지 잠재워버린 다음에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는다.
3. 인물ㆍ비교 : 송시열 (기호학파ㆍ이이) - 허목 (영남학파ㆍ이황)과 비교
3세 때, 혼자 글자를 깨우쳤으며, 기억력이 좋고 암기가 능하였다. 5세 때, 스스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7세 때, 2명의 형이 읽은 글을 받아 적을 줄 알았다고 한다. 기억력이 비상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고,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성격이 솔직하고,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꾸밈이 없었고, 솔직담백하였다. 한번 옳다 확신하면 바꾸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적을 많이 두었다.
"송시열"은 "조광조ㆍ이이"의 학풍을 계승한 "김장생"의 제자였다. 그러므로 "기호학파"의 학풍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따라서 "사전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에 더 역점을 뒀으며, 정통 "주자 성리학"의 입장에서 "통치자의 덕성 확립"을 강조했다. 더구나 "예"는 "유교정치"에 있어서, "교화"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명분"을 밝히는 것이므로 "왕"과 "일반 사대부"를 막론하고, 평등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허목"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 받아, "영남학파"의 학풍을 계승했다. 더불어 그는 "도가"와 "장자사상"까지 섭렵해, "송시열"과는 다른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허목"은 이러한 자신의 "도덕적 이념"을 "왕권강화"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예"를 적용하는 것도, "왕"과 "일반 사대부"를 구별하였다. 즉 "예"로써 왕권을 강화시켜, "요순시대"와 같은 "성군정치"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허목"은 "송시열"과 같은 "예치"의 이념을 가졌지만, 그 방법을 다르게 본 것이다.
4. "정조"의 각별한 존경
후일 "송시열"을 높이 평가한 "정조"가 친히 편찬한 <앙현전심록>에서 "송시열"은 마침내 "주자"에 비견될만한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송시열"을 비난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못 박아, 그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다. 1863년 이전까지 "송시열"의 주장에,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와 문도들은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부르며 공식화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송시열의 문하 사람인" 김종수"가 "정조"의 "세손시절 스승"으로 지도하였고, "노론"의 당론에 저항하여 "세손(정조)"를 보호한 바 있다.
"정조"는 즉위 후, 송시열을 "송자(宋子)ㆍ송부자(宋夫子)"라 하여,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하고 "송시열"의 문집과 자료를 모아, "국비"를 들여 "송자대전"으로 간행하였다. "정조"는 평소 송시열을 존경하여, 그를 추모하여 그의 영정에다가 친히 "어제시"를 남겼다. 영정의 중앙부 상단에 "친필"로 기입하였다. 이 시에서 "정조"는 송시열이 아니면, "주자"와 "공자"를 알 수 없다고 표현하여, 송시열이 아니고서는 바른 학문을 알 수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 송부자 (宋夫子 우암 송시열) > - 정조대왕 어제 (御製)시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시었고, 그 뒤를 이을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요. 주자의 학문을 송자가 이었으니, 송자도 또한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아니면 공자의 도를 전할 수 없었고, 또한 송자가 아니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공부자와 주부자와 송부자의 도는 천지사이에 날과 씨와 같고,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처럼 우뚝하니, 이 세 어른 중에서 한분만 안 계셔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홍수가 범람하여, 산허리를 싸돌고 언덕에 오르는 급박하고 질서 없는 시대에 처했으니, 어찌 분주히 노력하여 세 부자의 도학을 취하지 않겠는가?"
5. 관계ㆍ혐오
① 관계 : 송준길
1672년, "동문수학"한 친구이자, 외 6촌 형인 "송준길"이 사망하자, 3년간 "상복"을 입었다. 그는 "송준길"과 함께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다. 보통 "송시열"의 제자가 후에 나은 가르침을 받으러, "송준길"을 찾아가기도 했고, "송준길"의 제자가 후에 "송시열"을 찾아가서 사사하는 일도 있었다. 후에 "석곡봉사"를 올려, "송시열"을 변호한 "송상민" 역시 "송준길"과 "송시열"의 제자였다.
② 관계 : 김종서 가문
"송준길"의 7대조이며, "송시열"의 8대조 "계사(繼祀)"는 판관을 지냈으며, "김종서"의 동생 "김종흥(金宗興)"의 딸과 혼인했다. "순천 김씨"는 "김종서"의 후손들이 "난"을 피해, "공주"에 숨어 있던 집안이다. "순천 김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 "요년(遙年)"과 "순년(順年)"을 두었다. "계사"의 자손으로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이 "요년"과 "순년" 형제에서 갈라진다. "요년"의 5대손이 "송준길"이고, "순년"의 6대손이 "송시열"이다.
③ 관계 : 윤선도
그가 "대군사부"가 될 무렵, "윤선도" 역시 "세자시강원"에 부임, "대군사부"에 임명되어, 이때 "윤선도"를 다시 만나게 된다. "윤선도" 역시 재야에 있을 때, "이이첨"일파의 난행을 규탄했고, 왕자의 사부였으며, "북벌론"을 주창했으나, 당색이 "남인"인 탓에 주목받지 못했다. 같이 "이이첨 탄핵"과 "왕자의 사부","북벌론 주장"등을 하였음에도 주목받지 못하자, "윤선도"는 그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ㆍ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④ 혐오 : 정도전
송시열은 "정도전" 역시 혐오하였고, "정도전"은 조선시대 내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군신공치"의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 마저 "정도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그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 표시한 인물은 그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평가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복권시켜, 역사를 바로세운 "송시열"이 "정도전" 개인이나 그의 사상을 자의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도덕적 이상국가"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선비"의 기본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정도전" 자신이 "왕위계승"에 깊이 관여하는 등, "권신"이 되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거두지 않은 것이다. "대원군"에 의해 정치적인 이유로 복권된 "정도전"에 대해, 현대적인 측면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조선시대 내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유의할 필요가 있으며, 현대적인 해석도 다분히 자의적인 점이라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⑤ 혐오 : 윤후ㆍ허목ㆍ윤선거
"예송"이후, 송시열은 "윤휴"를 "적휴(賊鑴)ㆍ참적(斬賊)ㆍ흑수(黑水)", "허목"을 "독물(毒物)ㆍ독극물ㆍ흉목(凶穆)"이라고 불렀다. 이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에게도 계승되어, "권상하"는 공문서와 다른 사람의 "묘지명ㆍ 묘갈명ㆍ신도비문" 등에서도 "윤휴"를 항상 "적휴ㆍ참적", "허목"을 "독물ㆍ독극물ㆍ흉목"이라 불렀다.
1625년(인조3)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이때 "송준길ㆍ윤선거(尹宣擧)ㆍ유계(兪棨)ㆍ윤휴ㆍ 이유태(李惟泰)"등을 만난다. 이때 만난 "윤선거"는 그의 친구였으나, "병자호란"을 계기로 관계가 악화된다. "윤휴"는 당색을 초월한 절친한 친구였으나, 이후 "예송논쟁"으로 정적으로 돌변한다. 이후 "윤휴"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는 "윤선도ㆍ허목"을 편들면서 감정이 더해져, 원수가 된다.
⑥ 관계 : 윤선거ㆍ윤증 부자
• 명재 윤증 : 수제자로 손꼽히던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ㆍ자신의 친구이자 인척인 "윤선거"가 혼자 살겠다고 "강화도"에서 피신한 것을 비겁하게 생각했는데, 이 때문에 제자이자 인척인 "윤증"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제자인 "윤증(尹拯)"과도 인척관계였고, 아버지인 "윤선거"는 송시열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윤선거"의 할아버지 "윤창세"는 "윤황ㆍ윤전(尹烇)"형제와 딸 1명을 두었다. "윤창세"의 사위인 "은진 송씨 송희조(宋熙祚)"는 송시열의 "5촌 당숙"이 된다. 또, "윤창세"의 아들 "윤전의 딸"이 사촌 형 "송시형(宋時瑩)"과 결혼한다. 송시열의 "사촌 형수"는 "윤선거"의 사촌 누이가 되고, 송시열의 "당숙모"는 "윤선거의 고모"였다. 또, "윤황"은 "윤문거ㆍ윤선거" 형제를 두는데, "윤문거"의 아들 "윤박"이 송시열의 딸과 결혼하였다. "윤선거"의 손자이자 "윤증"의 아들 "윤행교"는 다시 "은진 송씨 송기후(宋基厚)"의 딸과 결혼하는데, "송기후"는 송시열의 "5촌 조카"이자, 사촌동생 "송시염(宋時琰)"의 아들이다.
"윤선거"가 죽자, 그의 아들이자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은 "묘지명"을 친히 그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그는 "윤선거"의 피난을 못 마땅히 여기며 비꼬았고, 이는 "회니시비"의 원인이 된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고, 그의 아버지 "윤선거"는 어쨌거나 송시열의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것에 끝내 앙심을 먹고, "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죽지 않은 것을 비난했다.
"윤증"이 아버지의 "묘지명"을 써줄 것을 부탁하자, "박세채"가 잘 썼으므로, 자신은 쓸 말이 없다고 단 한 구절만 집어넣었다. 한편 송시열은 생전의 "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할 것을 여러 번 권고하였다. 그러나 "윤선거"는 "윤휴"와 계속 만났고, "윤휴"는 나중에 "윤증"의 아버지를 추도하는 제문이라며 "윤증"에게 제문을 보낸다. "제문"의 내용은 "윤선거"가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윤증"은 "윤휴의 추도사"를 받아 읽고, 탄식했다. 이는 "윤증"과의 관계 악화로까지 이어져, "회니 논쟁"과 "노론ㆍ소론" 분당의 원인이 된다.
⑦ 관계 : 윤휴
송시열은 "윤휴"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이자, 친구였다. 당색을 초월한 친구였으나, "예송 논쟁" 때, 정적으로 변신한다. "예송 논쟁" 초반까지만 해도 "송시열"과 "윤휴"는 서로를 "당"이 다른 양반 정도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예송 논쟁"이 터지면서, 둘은 "원수"로 돌변한다.
송시열과 "윤휴"는 비록 멀지만은 같은 "문중"과 혼인한 "인척관계"였다. 송시열의 증조부였던 "송구수(宋龜壽)"는 "윤휴"의 조상인 "윤형(尹衡)"과 함께 "고성이씨 이원(李原)"의 후손이었던 "군수 이구연(李龜淵)"의 딸들과 결혼하여, 동서지간이었다. 송시열과 "윤휴"는 같은 "진외가"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고, 대대로 먼 인척 관계를 유지해 왔고, 두 집안 모두 오래전부터 친밀한 사이었다. 그런데 "윤휴"가 당시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내 비추자, "주자(朱子)"의 열렬한 숭모자인 송시열은 이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윤휴"가 또 "윤선거ㆍ허목" 등과 같이 활동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틀어지고, "윤휴"에게 적개심을 품게 된다. "윤선도"는 송시열이 "종통"과 "적통"을 부정했다는 비판을 하여, "효종"의 스승이자 "북벌론"의 기수인 송시열을 인신공격했다. 이후 "윤선도ㆍ허목"의 "송시열 사형 주장"과 "남인"의 거듭된 공격으로 감정이 악화되었고, "윤휴"가 "윤선도ㆍ허목"을 옹호하면서, 절교하게 된다. 이때 그는 "윤휴"가 "성리학ㆍ주자가례ㆍ주자의 사상"을 비판한 바 있었으므로, 학문상 이유로 절교(絶交)를 선언하였다.
"윤휴"는 종래 "주자"의 해석방법을 배격하고, "중용ㆍ대학ㆍ효경"등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송시열은 처음에 "윤휴"의 의견을 "이설"로서 받아들였다. "윤휴"는 "주자"의 해석을 그르다 하고, 장구를 멋대로 고쳤다. 심지어 "경전의 깊은 뜻을 어찌 주자만 알고 우리는 모른단 말인가?"하는 말로 "주자"의 아성에 도전하는 듯한 인상까지 풍겼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과격하다고 본 송시열은 그를 설득하게 된다. 송시열은 "윤휴"를 직접 찾아가 설득해 보고, 편지로 달래 보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송시열은 격분한 나머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며, 규탄했다.
"예송 논쟁"이 격화되면서, 그의 오랜 친구였던 "윤휴"는 "참최 복"을 주장했고, 역시 같은 "3년 복"을 주장한 같은 "남인"인 "윤선도"의 편을 들었다. 그가 "3년 복"을 지지한 것은 당론 때문이었다고 해도, 송시열을 죽이자고 거듭 주장한 "윤선도"나 "허목"하고 어울려 지내자,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감정은 악화되었다.
그는 "윤휴"와도 오랫동안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원시 유학"으로 돌아가자는 의견 중, "윤휴"가 "주자만이 사물의 진리를 알 수 있느냐"며, 항변한 것이 송시열을 심히 불쾌하게 했다. "윤휴"가 "허목ㆍ윤선도"와 함께 "서인" 및 송시열에 대한 공세를 하자, 그는 "윤휴"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윤휴"는 "중용"의 주석을 놓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주자"의 주석에 오류가 많다고 선언했다. "윤휴"는 서슴없이 자기주장을 펴며, 이를 바로잡겠다고 큰소리쳤다. 이 소리가 송시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송시열은 고향 "회덕"에서 가까운 "논산군 연산"의 "황산서원"을 찾아갔다. 여기에서 "윤선거"를 만났다. 송시열은 두 사람이 잘 어울려 지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윤휴는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適)이오. 혈기를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죄를 성토해야 하거니와 춘추의 법에 따르면 난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붙좇는 무리부터 다스리라고 하였으니, 참 임금이 일어난다면, 그대가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죄를 받을 것이오." 송시열은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가 미칠지라도, 윤휴를 배척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윤휴의 손에 죽는다면 더 이상 영광이 없다."며, "윤휴"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게 된다.
"허목"은 "유교만이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고 하였고, "윤휴"는 "성리학"이나 "주자"의 주해만이 진실을 바라보는 열쇠는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어느 강의에서 "윤휴"는 "사서육경"에서 "정주"가 달아놓은 주해를 삭제하고, 자신의 방법대로 해석했고 이는 송시열의 분노를 가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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