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丙子胡亂ㆍ1636.12.28~1637.02.24ㆍ인조14ㆍ청나라(후금)이 침입하여 조선과 싸움→ 군신의 예) 당시, "최명길 (1586~1647)"의 "주화파"와 "김상헌 (1570~1652)"을 필두로 한 "주전파"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1. 최명길 (崔鳴吉ㆍ1586~1647ㆍ61세)
조선 중기의 문신ㆍ성리학자ㆍ양명학자ㆍ외교관ㆍ정치가ㆍ나라를 위한 결단(주화론)ㆍ시대의 흐름을 읽어 왕을 지킨 재상ㆍ홀로 적진에 들어가 담판을 짓다.
17살에는 "이항복ㆍ신흠"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그 영민함으로 스승에게 주목을 받았다. "광해군"대에는 "병조좌랑"까지 올랐다가 파직되었으며, 1623년(광해군15) "김류ㆍ이귀"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최대 전란인 "병자호란"을 맞아, "주화(主和)"라는 과감한 "현실론"으로 나라를 살린 재상으로, 좌의정ㆍ우의정ㆍ영의정을 역임했다. 1636년 겨울,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때 "병자호란"에서 "강화"를 주관하였다. "병자호란" 때,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존명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척화(斥和)"가 우세했다. 그럼에도 최명길은 싸울 힘이 없을 때는 국토를 보존하고, 왕을 지키며,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이 최선이며, 그 길은 "주화" 뿐임을 내세워, "청"과 담판을 짓고, 전쟁을 매듭지었다.
"병자호란" 초기에 "청의 기동대"가 들이닥쳤을 때는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적장에게 침략을 항의함으로써 "인조"와 "백관"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다.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강경 대응해야 한다는 "김상헌ㆍ홍익한" 등의 "척화론(斥和論)"에 맞서, 명분보다 현실적 정세를 감안하자며, 확전은 불가능하다며 "주화론(主和論)"을 폈다.
그는 "주전론"이 일색인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다. 홀로 "주전론자"들 사이에서 "주화론"을 주장하였는데, "청의 첩자" 혹은 "뇌물 매수"의 의혹을 받았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는다. 정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화의론"을 좇는 자가 많아져, 드디어 1636.12월 말, 최명길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감수하겠다고 선언하고, "화의 교섭"을 주관한다.
"병자호란" 후에도, 스스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대청 외교"에서 패전국으로서 겪는 굴욕과 수치심을 모두 감내하고 당당하게 교섭에 참여하여, 조선 백성들은 청나라를 침략할 의지가 없음을 유창하게 설득하여, "조선"에 적개심을 가진 "청나라" 장수들을 설득,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 주화론 (主和論)ㆍ강화론
"정묘호란(1627)ㆍ병자호란(1636)" 당시, 그는 "남한산성"에서 많은 사대부와 지식인들이 "주자학적 명분론"과 "여진족"이 과거 "고려ㆍ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과거에 사로잡혀 항전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수행과 견디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과감히 자신의 주관에 입각해서 "화의론"을 주장하였다.
당시 그는 "후금ㆍ청나라"가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라는 이유로 척화, "주전론"이 우세하였다. 이때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서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그는 이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소수의 사대부들의 만족을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점과,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손해가 극심할 것을 들어 화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오랫동안 전쟁준비를 하지 않고,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면서,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화도"로는 도저히 항전이 불가능한 것 없음을 걱정하여, 강력히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는 현실적인 주장이었으나, 오랫동안 비난의 원인이 되었다.
2. 김상헌 (金尙憲ㆍ1570~1652ㆍ82세)
조선 중기의 문신ㆍ병자-정묘호란 시, 척화대신ㆍ"조선후기" 세도가의 직계선조로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ㆍ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ㆍ헌종비ㆍ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영빈 김씨(숙종 후궁)"이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 석실산인(石室山人): 중년 이후, "양주 석실(石室)"에 퇴거해 있으면서 사용 / 서간노인(西磵老人): 만년에 안동에 은거하면서 사용
1636년,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고, "인조"가 항복하자,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이 정해지자, 식음을 전폐하고, 교수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는데, "최명길"은 이를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해서 죽을 수나 있겠냐?"며, 쇼를 한 것이라 비난했다.
"정축하성(삼전도 굴욕)" 때, "인조"를 따라가지 않고, "남한산성" 뒷문으로 나가, "안동의 학가산(鶴駕山)"에 들어갔다. "와신상담하여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안동 소산"으로 은퇴하였다. 1638년, "사헌부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며,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의연히 반대하였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의 동생으로,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김대효"에게 출계하였다. 1590년(선조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ㆍ응교(應敎)ㆍ직제학"을 거쳐, 1611년(광해군4)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언적"과 "이황"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 아들 김광찬이 김제남의 아들 김내의 사위)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해, "안동시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에 반대, "시비(是非)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해,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ㆍ이조참의ㆍ도승지ㆍ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6조의 판서ㆍ예문관ㆍ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데 반대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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