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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허균 (광해군ㆍ1569~1618)ㆍ홍길동전 저자ㆍ능지처참형 (혁명)

by 당대 제일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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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許筠ㆍ1569~1618ㆍ48세)"은 조선 천재로, 개혁사상 반영한 "홍길동전(최초의 한글소설)"의 저자로, "서자"를 차별 대우하는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다.  "재취부인"의 소생으로 "서자"와 비슷ㆍ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한 여성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동생이었다. 조선의 자유주의자ㆍ혁명을 꿈꾸다→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응하게 되고,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 형"을 당해, 무려 3,000번 이상 회질이 가해져, "살점"이 도려내진 뒤, 마지막으로 "목"이 잘려, 매우 잔인한 죽임을 당했다.

 

1. 허균 (許筠1569~1618향년 49)

선조/ 광해군 때의 학자조선인 최초의 천주교인정치가(예조판서)시인작가ㆍ "왕실의 인척"이기도 했는데. 허균의 조카사위(허성의 사위)가 바로 "선조인빈 김씨"소생의 "의창군(昌君)"으로 "왕가의 사돈"이었고, "인조""정원군(의창군의 형)"의 장남이다 "사림"의 중시조로 추앙받던 "김종직"을 위선자라고 비판 "종직"의 학통을 계승한 "사림파"에게 심하게 공격당하는 원인이 되나, 비방에 굴복하지 않는다.

출 생 : 강원도 강릉 초당리      사 망 : 조선 한성부         사 인 : 사형(능지처참3,000번 이상 회질)지금의 묘는 "가묘"       스 승 : 이달(2째 형의 벗서자출신으로 출세를 못함) 류성룡(柳成龍매부 추연(秋淵)의 추천)

: 교산 (蛟山)       별 칭 : 백월거사 (白月居士)       종 교 : 유교 (성리학)불교

부 인 : 2- 안동 김씨 (? ~ 1592)후처- 선산 김씨       : 3- 김씨송성옥(宋成玉양민송취대(宋就大)의 딸) 옥매(玉梅) /  2- 이매창(梅窓1573~ 161036부안의 기생)추섬(秋蟾현응민(玄應旻) 등과 간통)

자 녀 : (2) - 소훈 허씨 (광해군의 세자인 "폐세자 이질"의 측실(후궁)) 이사성(맏사위)에게 시집      

부 모 : 부 : 허엽(초당동인의 영수경상도 관찰사서경덕 문인)ㆍ모 : 강릉 김씨(예조참판 김광철 딸)ㆍ "동인의 영수", 강릉 맑은 물로 "초당 두부" 만들어, 관료로서 장사하여 탄핵받기도 했다.

가 족 : 형 : 허봉(許篈) "이이" 탄핵(10만 양병설)귀양(1583)금강산에서 객사(1588)ㆍ누나 : 허난설헌 (許蘭雪軒1563~ 1589.03.1925)"의 동생ㆍ조선 중기 대표적인 여성 문인(한시시조서화산문수필- 213)시인작가화가   /  10촌 : 허준(선조 때 어의허지(許芝)의 손자 허론의 서자)   /  조카사위 : 의창군(선조의 서자)   /  이복 매형 : 우성전(禹性傳ㆍ동인과 남인 중진)

장인 - 성암 김효원(金孝元)ㆍ동인의 초대 당수이중 인척관계ㆍ김효원은 후처의 친정아버지로, 형인 "허성"의 딸이 "김효원"의 아들 "김극건"의 부인이 된다. "처남-매부"간인 "김극건""조카사위-처삼촌"간인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경 력 : 활동 (1589~161829) 1589 (선조2220) - 생원시 합격 1569 1594 (선조2725) - 정시문과(文科) 을과급제 1597 (선조3028) - 중시문과(重試文科) 장원급제

저 서 : 홍길동전성소부부고동국명산동천주해기(東國名山洞天註解記)도문대작(屠門大嚼)남궁두전(南宮斗傳)학산초담(鶴山樵談)국조시산(國朝詩刪)한정록(閑情錄)교산시화(蛟山詩話)성수시화(惺叟詩話)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  평론서 : 당시선(唐詩選)송오가시초(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明四家詩選)고시선(古詩選)사체성당(四體盛唐)  /  소설 : 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

학문은 2째 형의 벗인 "손곡(蓀谷)"에게서 배웠고, 나중에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다1597(선조30) "중시문과(重試文科) 장원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다"당색(黨色)"으로는 "동인"이었으며, "북인대북"으로 활동하였다"허엽" "동인"을 창당한 일원 중 한 사람으로, 후일 "허균""동인"에서 분리된 "북인"의 일원이고, "북인"의 강경파인 "대북의 일인"으로, 광해군 때, "대북"에 가담하여 실세로 활동하였다.

평생 "불평불만을 품은 자" 정도로만 인식되었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비판적인 의식과 "억불숭유사회"에서의 불교숭상, 격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 등으로 "인조반정" 뒤에도 복권되지 않았다. "신분제도ㆍ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ㆍ불만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가 발각된다.

 20년 관직 : 유배 3파직과 복직 6 (불교를 믿는다고 파직)           중국(명)과 수창외교 담당 사신일행으로 6번 이상 방문 :  2차례(1614ㆍ1615) 북경 방문하여 천주교 접함 북경에서 서양지도 찬송가 이외에 서양서적 구매  1만 냥으로 4,000여권 책 구매ㆍ이탁오(성리학의 기행자ㆍ이슬람교도)의 책도 포함

 사명당(승려) 18세에 만나, 형제처럼 지냄           서얼친구인 "이재영"에게 녹봉 절반을 줌.        • 1599(30), 황해도사(지방관리 부정감시) 황해도로 서울 기생을 데리고 감 "기유서행"에 기생과 지낸 것을 기록하였고, 수청 든 기생과 양반사회를 솔직하게 기록

 홍길동전 : 공주목사 파직 후, 부안 현감이 글 쓰는 거처로 준 정사암터(전북 부안군 우반동)에서 집필.  연산군 때, 서얼 도적 홍길동(생가: 전남 장성군 황룡면) 100년 후에 소설로 부활시킴.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장독 뚜껑을 덮을 만한 보잘것없는 원고 : 유재론(遺才論): 인재를 골고루 써야한다. 재능엔 천함이 없다 신분 평등 주장ㆍ호민론(豪民論): 세상을 바꾸는 힘은 민중에 있다. 나라의 흥망은 임금에게 있다. 민주주의 개념ㆍ 백성을 항민(恒民)원민(怨民)호민(豪民)으로 나누어 설명

 칠서의 난(계축옥사) 위험에 빠져 이이첨(광해군 즉위 후 정권의 1인자)과 손잡음 목대비(선조의 계비) 폐비론 주장 광해군의 정적 제거(광해군 신임) 예조판서2품 좌참찬까지 승진  1618.08.10(계축옥사 5년 뒤) 남대문에 흉방이 붙음 남대문 격문은 현응민(심복)이 붙였고, 주모자 하인준(조카심복)이 잡히자, 역모 주모자로 투옥 3일 만에 사형

2.  : 교산 (蛟山)ㆍ인물평

"강릉 사천진" 해변, 사천 바닷가 바위 밑바닥에 이무기가 엎드려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바위가 두 동강이 나면서, 문처럼 구멍이 뚫려 "교문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8년 뒤에 "허균"이 태어났으므로, 그 뒷산("외가 애일당" 뒷산) 이름을 따서 지음.

교산

어릴 적부터 기억력이 비상하였고, 10세 이전의 소년기 때, 글을 잘 지어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허균은 한국 최초의 "음식 평론가"로 한국 최초의 "음식 평론서"도 남겼다그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에 관한 내용으로 꾸며진다이 책에는 허균이 "40 평생 먹어본 조선 최고의 맛"이 기록돼 있다3일 동안 입에서 향이 가시지 않는다는 "강릉의 방풍죽", 회 한 젓가락에 돌아갈 곳을 잊게 한다는 "한강의 숭어와 웅어"  177가지 별미에 대한 평가가 들어있다이 책에 등장하는 특산물 중에는 현재 사라졌거나, 식 재료로 이용되지 않는 것들도 많지만, 조선 중기 우리 음식 문화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유몽인(柳夢寅)"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면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9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이 칭찬(稱讚)하며,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모 사위 추연(秋淵)만은 그 시를 보고 "후일 그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대 명사였던 "추연(秋淵)"이 어린아이의 ""에서 "허씨 문중을 뒤엎을" 그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허균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자신도 "운명을 풀이하는 글(解命文)"에서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나는 기사년(己巳年, 1569, 선조2) 병자월(丙子月, 11) 임신일(壬申日, 3) 계묘시(癸卯時)에 태어났다. 성명가(星命家, 사주관상가)가 이를 보고, "신금(申金)이 명목(命木)을 해()치고, 신수(身數)가 또 비었으니, ()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여러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다그러나 자수(子水)가 중간에 있는 고()로 수명이 짧지 않겠고, 강수가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卯金)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하리라"라고 말했다나는 그전부터 이 말을 의심해왔으나 벼슬길에 나온 지 17년에서 18년 이래 전패(顚沛)와 총욕(寵辱) 반복되는 갖가지 양상이 은연중(隱然中) 그 말과 부합되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다." <성소부부고 중에서>

3. 이이첨 (광해군 시대, 실세)과 갈등 → 죽음

1617(광해군9) 말부터, 허균은 "인목대비 폐출(선조의 계비)"논의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허균이 사형당한 후 그의 외손 이필진은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에 끼어든 것은 본심이 아니었고, 간흉(奸凶, 이이첨)"의 꾐에 빠진 것"이라고 그를 변호했지만, 허균은 남의 사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폐비론 논의"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심지어 깡패들을 모아, 궁궐 뒷산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정황상 "인목대비" 암살을 계획한 것 같다. 이 행동은 후에 "허균 본인이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그가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찬성하자, 그를 좋게 보던 인사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비교적 그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던 "기자헌(奇自獻)"조차 허균을 비난하였고, 그의 문인이자 "기자헌"의 아들인 "기준격" 역시 그에게 등을 돌렸다한편 "신분제도""서얼 차별" 등에 항거하기 위하여, "서자""불만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였으나 그의 "거사 계획"이 소문이 나면서 외부로 확산되었다이는 "이이첨김개시" 등이 "칠서의 변"에 연루된 "서자"들과 친분이 있던 허균을 의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허균은 "이이첨정인홍"보다도 더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섰는데, 이 때문에 "북인"내에서도 "폐모" 반대하는 "소북"의 영수이자,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이 일로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그런데 폐모에 반대한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고, "길주"로 유배되자, 그 아들 "기준격"은 허균이 배후조종한 것으로 의심하여, 부친을 구하기 위해 "비밀상소"를 올리고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어난다이를 비판하던 "기자헌(1567~1624광해군 즉위에 공헌이괄의 난 때 처형)"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기준격(1594~1624, 이괄의 난 때 처형)"의 밀고로 "지처참"되었다.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 상소"를 올리는데, 광해군은 웬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그 와중에 허균은 "이이첨"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이 무렵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양제(세자의 후궁)"로 내정된 것이다. 허균의 딸은 "소훈"이 되어 입궐하였다.

허균에 대한 "이이첨"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었고, 그를 제거하기로 기도한다그런데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에, 1618(광해군10) 08.10, "남대문""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 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1618.08"남대문 격문"은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고 한다"벽서의 작성자가 허균"이란 소문이 돌면서, "광해군"은 과거 "기준격의 상소문""국청"에 내려, 조사하게 했다08.16, 최후를 예감한 허균은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딸의 집으로 옮겨놓고, 다음날 체포된다그는 "도피하라"는 지인들의 권고를 거절하고, 자신의 저서와 작품들, "누나 허난설헌"의 시문들을 모두 손수 장녀의 집에 옮겼다그는 사위 "이사성(李士星)"에게, 나중에 아들에게 물려주어 간행하도록 할 것을 부탁했고, 당시 어린 "외손자인 이필진"에게도 나중에 "자신의 문집을 꼭 간행해줄 것""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08.16일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 뒤, "국문"을 받고, 08.24"한성부"에서 능지처참되었다1618"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이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회로 반란을 계획한다."고 모함하고,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허균에게는 계속 국문이 열렸고, 그때마다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결국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응하게 되고,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 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 그에게 능지처참이 집행될 때 무려 3,000번 이상 회질이 가해져, "살점"이 도려내진 뒤, ""이 잘려, 우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훗날 20세기 초에 이르러, "선산 근처""가묘"가 조성되었다그의 사후 "연좌제"가 적용되어, "강릉"에 있는 아버지 "허엽의 묘소""부관참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이후 비 오는 날이면, "허균 선영"에는 울부짖음 소리가 나서, 어느 선비가 없는 자식으로 생각하라는 내용의 "위령제"를 지낸 뒤, 울음소리가 그쳤다 한다아들들은 처형당했고, "허굉" 등 일부만이 기적적으로 숨어서, "후사"를 이었다다른 아들들은 하인들의 도움으로 "조령 근처"로 숨었다가, "경북 영천""울산"에 숨어 살았다또한 "이사성"에게 시집간 큰 딸, "의창군"에게 시집간 딸, "광해군의 세자""폐세자 이질"의 후궁인 소훈으로 책봉된 딸은 화를 면하였다그밖에 이복 형 "허성"과 친형 "허봉"의 아들들 역시 연좌되지 않는다.

그의 문집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모두 인멸(湮滅)될 뻔하였으나, 그가 죽음을 예상하고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해줘서, 후대에 전래되었다죽음이 임박해 옴을 예감한 허균은 1617년 말 "맏사위인 이사성(李士星)"에게 자신이 수집한 4,000여권의 장서와 자기 문집을 정리해 "이사성"에게 보낸다허균의 문집은 "외손자"이자, "이사성"의 아들인 "이필진"에게 전해졌고, "이필진"의 묘지명에 "허씨의 책"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특히 "홍길동전""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이라고 세상에 드러난 것도 조선 말기 "갑오경장" 이후부터였다"서자 출신"으로 출세가 어려웠던 "스승 손곡"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고, <홍길동전>을 지었다허균도 "재취 부인"의 소생으로 "서자"와 다름없는 형편이라서, "손곡"의 불우한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을 하였으니, 이는 곧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입증하는데, 일각에서는 그를 "조선인 최초의 천주교인"으로 보기도 한다.

 이괄 (1587~1624ㆍ37세)의 난 : 조선왕조 최대의 반란ㆍ공신들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반군조직ㆍ창경궁 소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2등 공신"에 책록되어 불만을 가졌다 1606(선조 때), 무과 급제하여 태안군수를 역임하고, 1622(광해군14)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기 직전, "인조반정"에 가담했다. "인조반정" 거사 도중 기밀이 누설되자 후퇴한 "김류이귀" 등을 대신하여 "반정군"을 인솔하여, "반정"이 성공하게 했다.

"후금"과의 국경 분쟁이 잦자 성책을 쌓고 국경을 경비했다 그러나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으나, "서인" 공신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밀려난 것과 아들 ""이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해 반역의 무고를 받자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기익헌한명련" 등을 포섭하여 ""을 일으켰다 반란 초기 서울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서울 입성 2일 후 관군에게 패퇴한 뒤,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4. 죽음에 대한 의문점

그의 처형을 두고,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유희분""죄인에 대한 면밀한 심문 없이, 자백 직후 형을 집행했다." 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이를 두고, 허균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던 또 다른 권신 "이이첨"이 처형의 정당성과 허균의 역모 혐의를 강조하면서 이 논란은 가라앉았으나, 허균이 "능지처참"되던 날, 형장에서 "죄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증언이 있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허균은 처형 직전, "광해군"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광해군"을 향해, "할 말이 있다"고 외쳤으나, 곧 제지당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또한 "이이첨"은 허균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던 당시, 허균에게 처벌은 없을 것이라며, 꾸준히 안심시켰다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또한 <실록>"왕 역시 허균의 역모와 관련하여, 사실 관계를 더 파악하려고 하였으나, 권신들의 강압으로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더군다나 허균과 함께 "능지처참 형"을 당한 "김개"1678(숙종4) "결정적인 죄안이 없다"는 당시 도승지였던 "김석주"의 주청에 따라 신원되면서, 허균의 "죄안"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그의 하옥부터 형 집행의 순간까지를 소설화하거나, 드라마로 제작하는 등 많은 흥밋거리도 낳고 있다1623.03"인조반정"이후, "광해군"시절의 무수한 "옥사"로 희생된 사람들은 거의 복권과 추숭이 이루어졌으나, 허균 만은 유일하게 "대한제국"이 망하던 시점까지 복권되지 않고, "역적"으로 남게 되었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형을 예감하고,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를 자신의 외가에 비밀리에 의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그의 사상과 학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실제 그 후 국가의 변란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을 당했다"역적"으로 형을 당한 까닭에,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학산초담(鶴山樵談)>, <성소부부고>등 일부만이 남아 현재까지 전한다.

5. "이매창 (梅窓)" 사랑

1601(선조34), "충청전라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으로 부임한다"전운판관"이 되었을 때, "부안"의 유명한 시인이자, "기생""매창(梅窓) 이향금"과 교류한다둘은 "정신상 일에 중점을 두는 관계였다"는 설과 "매창이 그의 첩이었다"는 설이 전한다.

후일 허균은 1609(광해군1), "매창"에게 쓴 편지에 "그대는 성성옹(惺惺翁)이 속세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분명히 웃을 걸세"라고 쓴다"매창"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겠다."는 약속한 사정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약속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그만큼 위험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균은 끝내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 이매창 (李梅窓ㆍ1573~1610ㆍ향년 36세)ㆍ허균(1569~1618ㆍ향년 48세)

• 호 : 매창 (梅窓)      • 본 명 : 향금 (香今ㆍ자- 천향)       시 기 : 선조ㆍ광해군 때     활 동 : 전북 부안     별 칭 : 계생(癸生)계랑(癸娘桂娘)

"아전 이탕종"의 딸로서, "시문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허균이귀"등과 교류가 깊었다고 하며, "부안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와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전북 부안"의 명기 "이매창"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으로 "이귀"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선비들이 그녀의 "시비"를 세워 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가사한시시조가무현금"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매창"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우수한 시재를 엿볼 수 있고, 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秋思)춘원(春怨)견회(遣懷)증취객(贈醉客)부안회고(扶安懷古)자한(自恨)" 등이 유명하며,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고 한다.

6. 평 가

당시의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나,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주고 있다.

허균은 평생 "불평불만을 품은 자" 정도로만 인식되었고, 그의 사회비판적인 의식과 억불숭유사회에서의 불교숭상, 격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 등으로 "인조반정" 뒤에도 복권되지 않았다"유몽인""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고 평가했다그가 지은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또한 허균이 진보적인 "종교인"이어서, 천시 받던 "불교"는 물론 "천주교"까지 신봉하였다는 평가도 있다한편 "기인"이었다는 비판도 있다문집에 실려 있는 그의 "한시"는 많지는 않지만, 국내외로부터 품격이 높고, "시어"가 정교하다는 평을 받는다"시화(詩話)"에 실려 있는 그의 문학비평은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도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7. 사상활동

자신의 문집에서 "관론(官論)정론(政論)(兵論)유재론(遺才論)"등을 통해, "민본사상국방 강화 정책 추진신분계급의 타파평등한 인재등용붕당배척론"을 주장하였다.

학문 편력ㆍ사상

그는 "적서차별"의 부당함과 "부패관료"를 규탄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겨, 사회비판적인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재 등용론

"적자ㆍ서자" 모두에게 공평하고, 균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스승 "손곡 이달""서자"로서, 출세하지 못한 것이 이유라고도 하고, "허균" 자신이 "재취부인" 소생으로 "서자"들과 다를 바 없는 불우한 처지라서, 이에 공감했다는 설도 있다.

사상의 자유

"유교사상"에 얽매이지 않은 사상적 편력은 당대에도 회자화 되었다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노장사상"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이러한 사상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빠질 뻔했다고도 고백하였고, "유교" 이외의 사상에서도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불교"에 호감흥미를 갖는다는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편지글" 등을 통해 일부 밝혔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閑情錄)>등을 통해 은둔의 실천과 방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을 하였으니, 이는 곧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입증한다 일각에서는 그를 "조선인 최초의 천주교인"으로 보기도 한다.

8. "김종직" 비판

"임진왜란" 종전 후, 허균은 학문 연구와 과거를 준비하던 중, <김종직 론>을 지어, "사림"의 중시조로 추앙받던 "김종직"을 위선자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김종직"<조의제문>을 지어, "세조 찬위"를 비난하면서도, 그 자신은 "세조"가 주는 관직을 받았다허균은 "김종직"을 매우 예리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김종직"의 학통을 계승한 "사림파"에게 심하게 공격당하고, 당대와 이후에 나타난 온갖 "인신공격""비방"의 원인이 된다그러나 허균은 이런 "비방"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펼친다.

< 김종직 론 (金宗直 論) :  교산 (蛟山) >

"천하에 이록(利祿)이나 취하고 자신의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세상에서 군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믿을 것인가? 나는 믿지 못한다고 말하겠다. 왜 그게 믿어지지 않을까자기 것으로 해버리거나 훔친다면, 비록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서 나왔더라도 거짓 짓임을 면()하지 하는데, 하물며 이록(利祿)과 명망이겠는가.

이미 이록을 취하였고 명망을 훔쳐서 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의 영화(榮華)와 녹봉을 누린다면, 정말로 자기의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자기의 직분으로 당연히 할 일에 맞도록 하여야 그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보완할 수 있다그런데 반대로, "영화와 녹봉은 나의 뜻이 아니다."하면서, 능청스럽게 한갓 그 수레를 붉게 꾸미고 그 인끈을 붉게 하면서 일생을 마친다면, 그의 죄악은 죽음을 당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김종직은 근세에 이른바 대유(大儒)젊은 시절에는 벼슬하려고도 않더니 세조(世祖)가 과거에 응시하도록 다그치니 부득이(不得已) 과거에 랐으며, 시종(侍從)의 직책에 드나들더니 벼슬이 높아졌다그러면서는 모친이 늙었으므로 억지로 벼슬한다고 일컬었었다그러나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다하고 세상을 마쳤으나, 오히려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었다그의 문인(門人) 김굉필(金宏弼)이 더러 그가 시정책을 건의하지 않음을 간()하면, 이어서,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건의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김종직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록(利祿)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며 능청스럽게 한갓 수레를 붉게 하고 끈을 붉게 한다고 말해지는 바의 사람이었다계유정난(癸酉靖亂)을 당하여, 김종직은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무리처럼 녹을 먹던 사람이 아니었고, 김시습(金時習)처럼 평소에 은택(恩澤)을 입었던 것도 없었다다만 시골의 변변찮은 한 선비여서, 옛 임금 단종(端宗)을 위하여 죽어야 할 의리도 없었으니, 그가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본래 위선이었다비록 위선이었지만 이미 뜻을 세웠다면, 임금이 아무리 다그치더라도 죽기를 맹서(盟誓)하고 가지 않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화()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나온 것처럼 하였다이미 과거에 합격해서는 붓을 귀에 얹고 임금의 말을 기록했으며, 사책(史策)을 끼고 고운 털자리에 엎드리기도 하였다.

또 고을을 맡아서 그의 어머니를 봉양했으니, 그가 이록(利祿)을 취했던 것은 정도를 넘었었다또 명호(名號)를 훔치고 싶어 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어버이가 있다. 그러나 끝내는 서산(西山) 을 지키리라."하였다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복제(服制)를 벗고도 응교(應敎) 벼슬을 받았었고, 10년 동안에 형조 판서로 어올랐다그만 쉴 만도 하나, 오히려 더 탐()내며, 떠나가지 않았다책임을 완수치 못하면서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것도 하지 않다가, 문인(門人)이 그 점을 지적해 주면 (謀免)하려고 꾸며대는 말로써 대답하였다.

이게 과연 군자라고 여길 만한가? 이런 속임수는 마땅히 죽임당해야 한다그러나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그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일까내가 가만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더니, 가학(家學)을 주워 모으고 문장을 공부해서 스스로 발신(發身)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하고 마음은 교활(狡猾)하여, 그의 명망을 높이려고 한 세상 사람을 용동(聳動)시켰고, 임금의 들음을 미혹(迷惑)되게 하여, 이록(利祿)을 훔치는 바탕으로 삼았다이미 그러한 꾀를 부렸지만 자기의 재능을 헤아리니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구제(救濟)하기에는 부족하였다그런 까닭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는 자신의 졸렬(拙劣) 추는 수단으로 하였으니, 그것 또한 공교로웠다.

그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可笑)로운 일이다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죽은 뒤에 당했던 화란(禍亂)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奸邪)하고 교활(狡猾)했던 것에 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殺戮)한 것이 아닐는지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형적(形迹)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 올려 (大儒)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때문에 특별히 나타내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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