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첨 (李爾瞻ㆍ1560~1623ㆍ63세)"은 "허균" 제거인물ㆍ"임진왜란" 때의 공로로 "선무원종 공신"에 녹훈되었고, "광해군" 때의 정치활동으로는 "정운공신ㆍ익사공신ㆍ형난공신" 등에 녹훈되었다. 선조 말기, 왕가의 후사문제로 "북인"이 둘로 나뉘자, "대북"의 영수로 "정인홍" 등과 함께 "광해군"을 지지했으며, "영창대군(광해군 이복동생ㆍ선조 적자ㆍ인목대비 아들)"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소북의 계획을 저지하였으며, "광해군" 즉위 이후 "류영경ㆍ소북일파"를 제거하였다.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주장하여, 폐서인 화하여 "서궁"에 유폐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인조반정" 직후, 도피하려다가 "광주의 이보현"에서 반정군에게 잡혀 사형 당했다.
1. 이이첨 (李爾瞻ㆍ1560~1623ㆍ향년 63세)
조선 중기 문신(예조판서ㆍ대제학)ㆍ외척(광창부원군)ㆍ의병장(임진왜란 때)ㆍ대북의 영수
• 출 생 : 충청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 사 망 : 한성부 철물전(鐵物廛ㆍ종로구 관철동) • 사 인 : 처형
• 처 : 이씨ㆍ이응록(李應祿)의 딸 • 자 녀 : 아들 : 원엽(元燁,1582~1623)ㆍ대엽(大燁,1587~1623)ㆍ홍엽(弘燁,1592~1623)ㆍ익엽(益燁,1594~1623) • 학 력 : 1594- 별시 문과에 을과 급제 / 1608-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 급제
"선조"가 "약밥"을 먹고 갑자기 사망할 당시, "상궁 김개시" 등이 수라를 올리는 데 참여했는데, 당시 "이이첨이 상궁 김개시 등과 함께 선조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인조반정" 직후, 도피하려다가 "광주 이보현"에서 반정군에게 잡혀 사형당했다.
아들 "이원엽ㆍ대엽ㆍ홍엽ㆍ익엽ㆍ사위 박자흥" 등도 모두 처형당하여, 선대 "이집(1327~1387ㆍ고려 후기 문인)"으로부터 아들 대까지 10대 동안 1번도 빠짐없이 연이어 "대과"에 급제한 내력의 그의 가문은 이때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이첨ㆍ정인홍(스승)"이 처형되어 "대북파"는 몰락했고,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악의 화신"으로 지탄받았다.
효행으로 "광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터지자 도망치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섰다. 당시 "광릉 참봉"으로 일본군이 "광릉"에 불을 지르자 직접 달려가 "세조 어진ㆍ위패"를 손수 불길로부터 구출해냈다. 159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8년(선조31) "황해ㆍ평안 순검해운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1599년 "이조정랑"이 되고, "북인"이었다가 "북인"이 대북ㆍ소북으로 나뉠 때는 "대북"에 가담했으며, "대북의 지도자"였다.
"광해군" 즉위 이후, "류영경(1550~1608ㆍ문신)ㆍ소북일파"를 제거하였다. 1608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대사간ㆍ병조참지ㆍ성균관대사성" 등의 요직을 거쳤고, "광창군(廣昌君)"에 봉작된 뒤, "예조판서ㆍ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광창부원군(廣昌府原君)"으로 진봉되었다.
"광해군" 즉위 직후부터, 그는 왕권을 도전한다고 본 "임해군ㆍ진릉군ㆍ영창대군" 등을 폐서인해 죽임과 동시에 "소북파"를 숙청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정인홍(스승)" 등과 함께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주장하여, 이듬해 대비를 폐서인 화하여,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선조"의 국구(장인)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2. 인조반정ㆍ최후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당시, "광해군"이 반정주도세력을 처음에는 "이이첨의 소행"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그 세는 맹위를 떨쳤다. 1623년(광해군15) 03.13일, 서인 "이귀ㆍ김자점ㆍ김류ㆍ이괄" 등이 "능양군(선조 5째 아들의 아들)"과 함께 반란을 모의, 대궐을 습격한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이이첨"은 실각하였고, 가족들을 이끌고 "이천"을 거쳐 영남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 이보현(利甫峴)"에서 관군에 체포되어, "정조ㆍ윤인ㆍ이위경ㆍ이대엽ㆍ이홍엽ㆍ이원엽" 등과 함께 "철물전(鐵物廛ㆍ종로구 관철동) 앞길"에서 참형되었다.
이때 심복으로 알려진 "이위경ㆍ정조 3형제ㆍ채겸길ㆍ백대형ㆍ이정원ㆍ박종주" 등은 모두 붙잡혀 처형당하였고, 심복으로 지목된 16명은 "능지처참"을, 64명은 "복주(伏誅)"되었다. 그 밖에 측근으로 지목된 인물들은 "의금부ㆍ형조"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이괄의 난" 당시 모두 처형된다.
3. "허균"과의 갈등ㆍ"허균" 제거
1617년, "기준격" 등은 계속 상소를 올려, "허균이 역모를 꾸민다"고 공격한다. 1618.01월, "기준격"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했고, 1618.01월 "좌참찬"이 된 "허균"은 자신이 역모와 무관하다며 해명을 한다. "허균"은 "기자헌"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허균"은 "이이첨ㆍ정인홍" 보다도 더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섰는데, 이 때문에 "북인" 내에서도 폐모에 반대하는 소북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기자헌(奇自獻)"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이 일로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폐모에 반대한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고 "길주"로 유배되자, "기준격(기자헌의 아들)"은 "허균"이 배후조종한 것으로 의심, 부친을 구하기 위해 비밀상소를 올리고,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어난다. 바로 "허균"도 상소를 올려,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변명하였다. 결국 그해 2월, "우의정 한효순" 등이 2품 이상의 대신들을 이끌고, "허균ㆍ기자헌"을 추국하고 문제를 종결시킬 것을 청한다.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상소를 올리는데, "광해군"은 웬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 와중에 "허균"은 "이이첨"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 "광해군"이 세자빈을 간택하려 할 때, "허균"도 자신의 딸을 세자빈으로 만들려 했고, 이때부터 "이이첨"과의 사이가 틀어졌다. 이 무렵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은 "양제(세자의 후궁)"로 내정되었다. "허균"의 딸은 "소훈"이 되어 입궐하였다.
"허균"에 대한 "이이첨"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었고, 그를 제거하기로 기도한다. 그런데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 1618년(광해군10) 08.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1618.08월, "남대문 격문"은 "현응민(玄應旻ㆍ허균의 심복)"이 붙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허균"을 비롯한 "허균"의 심복들을 잡아다가, 국문 끝에 처형한다.
'조선 > 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자호란 : 최명길 (주화ㆍ1586~1647)ㆍ김상현 (주전ㆍ1570~1652) (0) | 2022.11.20 |
---|---|
허균 (광해군ㆍ1569~1618)ㆍ홍길동전 저자ㆍ능지처참형 (혁명) (2) | 2022.11.20 |
이덕형 (선조ㆍ1561~1613)ㆍ오성과 한음 이야기ㆍ이산해의 사위 (0) | 2022.11.20 |
이항복 (선조ㆍ1556~1618)ㆍ오성과 한음 이야기ㆍ권율의 사위 (0) | 2022.11.20 |
류성룡 (선조ㆍ1542~1607)ㆍ징비록 저자ㆍ이순신 천거 (0) | 2022.11.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