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 (安堅ㆍ1400? ~ ?)"은 1400년을 전후로 태어나, 조선 "세종ㆍ문종" 전후에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안견이 그렸다"고 추정되는 작품은 다수 있는 편이나, 그가 그렸다고 확인된 작품으로는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다.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인 "도화원(圖畵院)의 화원"으로 근무하며, "종6품 선화(善畵)"를 거쳐 "정4품 호군(護軍)"에 올랐다. "화원"으로 "정4품"에 오른 사람은 "안견"이 처음이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1. 안견 (安堅ㆍ1400? ~ ?)
조선 초기~ 중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화단에 영향을 미쳐, "신사임당"도 어린 시절 "안견"의 작품을 보고 그림공부를 했다고 한다. 1447년(세종29) "안평대군"을 위하여 "몽유도원도"를 그리고, 이듬해 "의장도(儀丈圖)"를 그렸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총명ㆍ정박(精博)하여, "안평대군"의 후원으로 고화(古畵)를 보고 깊은 경지를 체득했으며, 여러 화가의 장점을 절충하여, 자신의 화풍을 이룩하여 웅혼한 필치로 많은 명작을 남겼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초상ㆍ화훼(花卉)ㆍ매죽(梅竹)ㆍ노안(蘆雁ㆍ갈대가 무성한 곳에 내려앉은 기러기를 그린 것)ㆍ누각ㆍ경작(耕作)ㆍ말(馬)ㆍ해청(海靑ㆍ매(조류))"등을 잘 그렸다. 최고의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이 형 "수양대군"에 의해 희생된 "계유정난"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세조(수양대군)" 시대에도 그 명성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안평대군"이 희생된 후, 그 역시 죽거나 몰락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윤휴"의 "백호전서"에 1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안평대군"은 "안견"을 특히 아껴, 집으로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하고, 한시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안견"은 시절이 수상한 것을 감지하고, "안평대군"의 집 밖으로 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안평대군"이 중국에서 귀한 "용매먹(龍煤墨丸)"을 구해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외출했다 돌아오니 "용매먹"이 사라져 있었다. 이에 종들을 다그치자 그들은 "안견"을 지목했고, "안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맷자락에서 "먹"이 떨어졌다.
이를 본 "안평대군"은 진노하여 "안견"을 내쫓고, 다시는 집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안견"은 이후 자신의 집에서 두문불출했고, 얼마 후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을 비롯해 그 집에 드나들던 사람이 모두 죽임당하거나 화를 입었다고 한다.
2.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 1447년 (세종 29)ㆍ안견 산수화
1447.04.20일, "안견"의 독실한 후원자였던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무릉도원"의 꿈을 꾸었고, 그 내용을 "안견(安堅)"에게 설명하여 3일 만에 그림이 완성되었으며, "매죽헌"에서 "몽유도원도"라는 제서(題書)를 달았다. 그림의 화풍은 "꿈속 도원"을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俯瞰法)"으로, 기암절벽 위에 복사꽃이 만발하고, 띠 풀로 엮은 초막과 폭포수 아래 빈 배도 보이는 꿈속의 낙원을 표현한 "안견"의 걸작이다.
• 크 기 : 가로 106.5cm x 세로 38.7cm • 재 질 :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 • 소 장 :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
① 무릉도원 (武陵桃源): "도연명"의 "도화원기 (桃花源記)"에 나오는 가상의 선경 (仙境)
도연명 (陶淵明ㆍ365~ 427): 중국 동진 후기~ 남조 송대 초기까지 살았던 전원시인(田園詩人)
② 안평대군 (安平大君ㆍ1418~1453ㆍ35세) : 세종 3째 아들ㆍ문종/세조의 친동생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린다. 서예ㆍ시문ㆍ그림ㆍ가야금에 능하였다. "수양대군ㆍ안평대군"이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세종은 둘을 궐에서 멀리 떨어져 살게 했으면, 형 "수양대군"과 갈등하다가 1453년 "김종서ㆍ황보 인" 등과 함께 정변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으로 사사 당했다.
③ 무계정사 (武溪精舍)
꿈속 도원과 비슷한 자리라고 생각한 곳을 찾아내어, 지리ㆍ복서(卜筮)에 뛰어났던 "이현로"로 하여금 터를 보게 하니, 그가 말하기를 이곳은 "큰 용이 일어날 땅(旁龍所興)"이라 하여 별당을 지을 생각을 하였다. 이때가 1447년(세종29) 08.30일인데, 1396년(태조5)에 세운 도성의 정문 "숭례문(崇禮門)"이 비좁고 남루하여, 왕은 "좌참찬 정분(鄭笨)"에게 명하여 숭례문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게 되는데,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완공하였고, "안평대군"은 친분이 두터웠던 "정분"ㄴ에게 장인ㆍ재목ㆍ기와를 요청하니, "정분"은 "선공부정 이명민"을 시켜 "숭례문"을 완공한 후 남은 자재로 도성 밖 "부암동"에 "무계정사"를 세워주어, 만 여 권의 책을 갖추고, "마포 용산강 위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여러 선비들과 시화를 즐겼다. 특히 "안평대군"과 또래인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신숙주"등은 "성균관"에서 수학한 절친한 사이이기에 같이 어울려 시회(詩會)를 즐겼다.
3.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세부내용
① 일본 반출
현재 "몽유도원도"는 "상하" 2개의 두루마리로 표구되어 있는데, 1592.04.13일 왜구가 부산으로 들어와 05.01일 서울에 입성한 후, "남별궁"에 주둔한 "총대장 평수가(平秀家)"가 이 절에 보관하던 "안평대군"의 유품 중 "몽유도원도"를 포함한 "장서(藏書)ㆍ금불(金佛)"까지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일본에 반출했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안평대군" 사후 "몽유도원도"가 어디에 소장되었으며, 이후 어떤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다.
"안견의 그림ㆍ시문(詩文)"은 현재 2개의 두루마리로 나누어져 표구되어 있다. 1번째 두루마리에 "박연"의 시문까지, 2번째 두루마리에 "김종서~ 최수"의 찬시까지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순서는 일본에서 다시 표구할 때 변형된 결과로 여겨진다. 일본에 널리 알려진 "신숙주의 찬문"이 맨 앞에 배치된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본래는 "고득종의 찬문"이 제일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시문은 각 인물의 친필로 쓴 것이어서 그 내용의 문학적 특징은 물론 서풍(書風)까지 파악할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즉 "몽유도원도" 그림과 거기에 곁들여진 시ㆍ글씨가 함께 어우러져, "시ㆍ서ㆍ화(詩書畵) 삼절(三絶)"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 "세종"대 문화예술의 성과가 집대성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② 안평대군 발문 요약
내가 정묘년(1447년) 04.20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인수(박팽년)와 함께 산 아래 이르러, 높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깊고 험준하고, 복숭아가 수십 그루가 있다. 오솔 길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는데, 산관야복(소박한 복장) 차림의 행객을 만나니 정중하게 길을 가르쳐 주어, 그 길로 인수와 함께 말을 몰아, 깍아 지른 절벽과 수풀을 헤쳐 그 골짜기를 들어가니, 탁 트인 곳에 마을이 나타났고 사방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가려진 사이로 복숭아 나무숲에 붉은 노을이 비치었다.
또 대나무 사이로 초막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섬돌은 무너져 가축도 없으며 앞 냇가에 빈 조각배가 물결 따라 흔들거려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인기척에 뒤를 보니 정보(최항), 범용(신숙주)도 동행 했는데,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이리저리 두루 돌아다니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 하였는데, 나는 궁중에 몸을 담아 밤낮으로 바쁜데 어째서 그때 꾼 꿈이 도원에 이르렀는가?" 뒷날 이 그림을 구해서 나의 꿈을 상상한다면, 반드시 무어라고 할 말이 있으리라. 꿈을 말한 후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완성되었고, 비해당(匪懈堂) 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라고 되어 있다. "비해당"은 아버지 "세종대왕"에게 하사받은 당호(집)이며, "매죽헌"은 "인왕산" 아래 "누상동 수성계곡"에 있었던 "안평대군의 정자"이다.
③ 구성ㆍ형식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3년 후(1450년), "안평대군(30)"은 "무계정사"를 세우게 되어, 가깝게 지내던 문사들을 초대하여 이 작품을 감상하고, 찬문을 남겼다. "몽유도원도"에는 "안견의 그림ㆍ안평대군의 제서(題書)와 발문ㆍ1450년(세종32) 정월에 쓴 시 1 수를 비롯해 당대 문사(文士) 20명과 고승(高僧) 1명이 쓴 "제찬"을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찬문(讚文")이 곁들여져 있다.
23편의 "찬문(讚文)"은 "신숙주(31)ㆍ이개(31)ㆍ하연(72)ㆍ송처관(38)ㆍ김담(32)ㆍ고득종(60)ㆍ강석덕(53)ㆍ정인지(52)ㆍ박연(70)ㆍ김종서(65)ㆍ이적(?)ㆍ최항(39)ㆍ박팽년(31)ㆍ윤자운(32)ㆍ이예(29)ㆍ 이현로(30?)ㆍ서거정(28)ㆍ성삼문(30)ㆍ김수온(38)ㆍ만우(?卍雨)ㆍ최수(?)"의 것이다.
④ 내용
이 그림은 회화 양식상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야기의 전개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상적인 예와 달리, 왼편 하단부로부터 오른편 상단부로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왼편의 자연스러운 "현실 세계"와 오른편에 배치된 "환상적인 도원(桃園)의 세계"가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것도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현실세계"는 부드러운 "토산(土山)"으로 이루어져 있고, "도원의 세계"는 기이한 형태의 "암산(巖山)"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그 차이가 현저하다. 무엇보다 큰 특색은 전체 경관이 몇 개로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경군(景群)들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즉 여러 개의 산 무더기들이 합쳐져, 하나의 통일된 전경(全景)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와 그 영향을 받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산수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2가지 두드러진 시각의 차이가 엿보인다. 즉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오른편 대부분의 "도원"은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俯瞰法)"을 적용하여 표현되었다. 이처럼 "부감법"을 사용함으로써, "안견"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공간이 넓은 도원의 경치를 성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산들은 왼편에서부터 오른편으로 점점 높아지는 경향을 띠고 있어서 서서히 웅장감이 느껴지도록 하였다. 이 밖에 사람이 나 동물의 모습은 전혀 그려져 있지 않아, 중국에서 그려진 "도원도(桃源圖)"와는 차이를 드러낸다. 이상의 여러 가지 양식적인 특색은 바로 안견이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고, 그러한 특징들이 후대의 한국 산수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또한 붓을 잇대어 쓴 필법(筆法), 조광효과(照光效果)를 살린 표현, 그 밖의 세부에서 "안견"이 토대로 삼았던 "북송대(北宋代)" 이래의 "이곽파 화풍(李郭派 畵風ㆍ중국 북송대 이성ㆍ곽희가 이룩한 산수화 양식)", 특히 "곽희 화풍(郭熙畵風)"의 영향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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