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李東輝ㆍ1873~1935ㆍ62세)"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대한제국 군인(육군 장교 출신)ㆍ임시정부 군무총장(1919)ㆍ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1919)였다. "이동휘 1인"이 세운 학교만도 100여 개나 되었다고 한다.
1. 이동휘 (李東輝ㆍ1873~1935ㆍ향년 62세)
공산주의 운동/사회주의 운동 전개ㆍ"헤이그 밀사 사건" 기획자ㆍ한말 애국계몽/의병운동 전개ㆍ"기독교인"으로,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는 독실한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ㆍ"함경도ㆍ평안도ㆍ북간도ㆍ연해주" 한인사회 등 활동하면서 "소련에 의탁하였다"는 비판이 있으며, "러시아 공산당의 앞잡이"로 조선독립 운동군 3,500명을 학살한 "자유시 참변"에 참여하였다.
• 출 생 : 함남 단천군 • 사 망 : 소련 프리모르스키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 사 인 : 병사
• 호 : 성재 (誠齋)ㆍ대자유 (大自由) • 학 력 : 한성무관학교ㆍ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 종 교 : 개신교
• 부 모 : 이승교(李承橋) 아전 • 가 족 : 사위 - 오영선(吳永善ㆍ1886~1939ㆍ53세) 임시정부 국무위원
• 경 력 : 대한제국 육군 참령ㆍ대한제국 육군 작전장교ㆍ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김구"에게,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김구"는 이를 "제3국가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냐?"며, 그의 청을 거절하였다. 소련에 의탁하였다는 비판이 있으며, 러시아 공산당의 앞잡이로 조선독립 운동군 3,500명을 학살한 "자유시 참변"과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최린"에 의하면, 그는 "늠름한 장부지풍(丈夫之風)이 있고, 체격과 얼굴이 아울러 훌륭한 장부였는데 성격은 열렬하고, 불덩이 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레닌(소련 지도자)"은 "이 사람은 마르크스의 이념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혁명가로서는 훌륭하다."고 평했다.
1891년경(18세 때), "군수"의 시중을 드는 "통인(通人)"으로 있다가 상경하여, 1895년 "한성무관학교"에 입학ㆍ수학한 뒤, "육군 참령(參領)"까지 진급하였으며, 1902년부터는 "강화도 진위대장(鎭衛隊長)"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군직을 사임한 뒤,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결성에도 관여하는 등 민족주의 교육ㆍ애국계몽운동에 적극 노력하였다.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의 준 식민지화하자, 군 동지였던 "연기우ㆍ김동수"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투쟁할 것을 모의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ㆍ이동휘"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일경에 피체ㆍ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주선으로, 그 해 10월 석방되었고, 석방 후 "서북학회"를 창립에 참여하였다.
1907.04월, 서울에서 조직된 민족 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ㆍ비밀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 (新民會)의 창건위원"으로, "이동녕ㆍ안창호ㆍ양기탁ㆍ이갑"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ㆍ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11.09월,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ㆍ안악 사건(안명근 사건)ㆍ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함경도"에서 다시 피체되어, "황해도 무의도"에 3년간 유배되었다.
2. 독립운동 활동
1912년 가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하여 "북간도"로 망명한 그는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서 "김립ㆍ계봉우" 등과 더불어,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지속적으로 민족주의 교육활동을 전개하면서, "구례선 목사"의 도움으로 "북간도" 전역에 "기독교 선교사업"을 진흥시키기도 하였다.
1913년, "러시아 제국 연해주"로 망명하여 거점을 옮긴 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에 가담하여, "이상설ㆍ이갑ㆍ신채호ㆍ정재관"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투쟁"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제"와 연대한 "러시아"가 재러시아 한국인들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자, "이종호" 등과 더불어, "중국 왕청현 라자우거"의 한인촌으로 거점을 옮겨 "대전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듬해,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무관학교"는 해체되고, 그 또한 "일제" 에 쫓기는 몸이 되어, "왕청현 하마탕"의 한인촌에 숨어, 요양하였다.
1917년 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으로 건너간 그는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7월 초 "독일 제국의 밀정"으로 오인되어, "케렌스키 임시정부 헌병대"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러나 1918년 초, 이 지역을 장악한 "볼셰비키" 가운데 한국인 출신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하바로프스크 시 책임비서ㆍ원동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외교부장"이었던 여성혁명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의 도움으로 풀려나,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한국 민족운동"에 "사회주의"를 접목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8.04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고, "연해주"에서 "한인적위군(韓人赤衛軍)"을 편성하는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직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문창범"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대한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취임하여, "동녕현(東寧縣)"에 독립군을 지휘할 "임시 군집부"를 설치하고, "일본"과 독립전쟁을 전개할 "독립군" 양성에 강한 추진력을 보였다.
3. 임시정부 국무총리ㆍ고려공산당 상하이파 활동
1919.08월 말,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09.11일, "임시정부"가 다시 개편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고, "임시정부" 내외의 동조세력을 규합, "사회주의 운동" 확산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반공주의자 "이승만"과 충돌하였다. "이동휘"는 "공산 혁명"을 주장하여, "구미식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대통령 이승만"과 노선갈등을 빚었다. "소련"으로 보내는 대표단을 파견함에 있어, 심복 "한형권"을 몰래 먼저 파견하여, 독자노선을 걸었으며, "제3 국제 공산당 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01월 말,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개혁여부를 둘러싸고, "대통령 이승만ㆍ이동녕ㆍ이시영ㆍ신규식" 등 "기호지역" 출신 총장들, 그리고 "안창호" 등과 대립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이후 그는 "고려공산당(상하이 파) 창당"에 나서게 된다.
그는 "임정 탈퇴ㆍ고려공산당 창당"을, "민족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그 방향이 정당하고 필연적으로 최후승리의 경로"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지들 간에 호상분규가 있었음에도, 무심자괴하다"고, 스스로 비판했다. 또한 자신이 "국무총리"로 참여했던 "상해 임시정부가 기성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전 국민을 호령하는 너무도 우활하여, 기실은 지상공문이었다."라고 반성했다.
4. 국민대표대회 이후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상해 파(이동휘 중심)ㆍ이르쿠츠크 파(여운형 중심)ㆍML 파(김준연 중심)"를 통합하는데, 실패하였다. 주로 "이동휘ㆍ여운형"이 주도권 다툼을 하였는데, "여운형"은 "임시 정부"의 재조직을 주장하였고, "이동휘"는 그냥 두고 개조하자고 주장하였다. 통합을 보지 못한 채, "김규식"이 수반이 되어, "임시 정부"와 별개의 한국 정부를 구성하였는데, "소련"으로 가서, "인정"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5.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1921년, "레닌"이 보낸 "독립자금"을 수령하는 과정에서, 자금 전달책인 "김립"이 "김구"에게 살해되자,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고, "임시 정부"를 떠나, "시베리아"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생애 말년에는 "일제 통치"하의 국내 감옥에 수감된 항일운동가ㆍ사회주의자ㆍ가족을 후원하기 위하여 조직된 "국제 혁명자 후원회(MOPR)"의 "원동 지역" 한인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국제 혁명자 후원회(MOPR)"의 모금을 위해, "파르티잔스크 지방"을 방문한 후, "알촘 탄광"으로 나오던 길에 거센 눈보라를 만나, 심한 독감에 걸려, 쓰러졌다. 급히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옮겨졌고, 한인 의사들이 전력 구호에 나섰으나, 1935.01.31일 오후 7시에 병사했다. 이동휘는 죽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 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는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잊혀져 왔으나, 1995년 정부에서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의 역할을 해왔다."는 인정을 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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