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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김철수 (지운ㆍ1893)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거목ㆍ반(反) 박헌영

by 당대 제일 2022.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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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金綴洙ㆍ1893~1986ㆍ향년 93세)"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의 거목으로, 줄곧 반(反)박헌영 계열에서 활동했다. 한국 "초창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고, 해방 공간에서 좌ㆍ우익의 가교역할을 자임했고, "이승만ㆍ박헌영 회담"을 추진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한 "사회주의 계열"의 최고 원로이다.

 

1. 김철수 (金綴洙1893~1986향년 93)

신아동맹당(반제(反帝)운동단체)사회혁명당통일조선공산당 결성ㆍ고려공산당 중앙위원조선공산당(3) 초대 책임비서ㆍ"우장춘(우범선 아들)"에게 한국을 선택하도록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식화 시킨 장본인

한국 "초창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고, 해방 공간에서 좌익의 가교역할을 자임했고, "이승만박헌영 회담"을 추진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한 "사회주의 계열"의 최고 원로

•  출 생 : 전북 부안 백산     •  사 망 : 전북 부안 백산      •  학 력 :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  : 지운(芝雲遲耘)     •  별 칭 : 동재(銅再)초봉(初峯)창률(昌律)창근(昌根)

•  경 력 : 1915 : 열지동맹 (裂指同盟) 결성 1916 : 곡귀단 (哭鬼團)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반제(反帝)운동단체) 결성  1920 :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조직 (일제를 몰아낸 다음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겠다)

김철수

1912,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대감"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다1915.09.07., "이명직 대감"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일본러시아중국"을 오가며, "독립 운동코민테른" 등 사회주의 활동을 벌였다특히 "코민테른"에서 지급한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용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로 부터 "미주 한인 독립운동기부금의 횡령착복조직원 살해미수 혐의"로 암살 위협에 처한 "이승만"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해방 후,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으로 부터 목숨을 보존 받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지사"이다.

1920.07~08,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고려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22"고려공산당 통합대회 간부회" 임원으로 선임. 1923"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생계위원 및 비서로 활동했으며, 1925.12"조선공산당"에 입당. 1926.02, "공산당" 중앙집행위원선전부원 등으로 선임된 뒤, 09"책임비서"로 취임, 12월까지 활동하다가 당이 와해됨1929, "중국 지린(吉林)"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 국내에서 당의 재건을 위해 활동하던 중 체포돼, 1931.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38년까지 복역했다. 1938, 출옥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다 1940년, 다시 체포돼 ,1944년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1945.08.17"공주형무소"에서 41명의 정치범들과 함께 석방

2. "신아동맹당 (新亞同盟黨)" 결성

1915년 가을, "동경"에서 유학 중, 반제(反帝)운동단체인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하는 등 청년 시절부터 반일적인 태도를 명확히 하였다1920년 가을, 일제를 몰아낸 다음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최팔용이봉수" 등과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을 조직하였다.

1921.05, "8인의 사회혁명당 대표이동휘(李東輝)진순(朴鎭淳)" 등과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고려공산당 대표회의"에서 "고려공산당"의 출범을 선포하였고, "김철수"는 중앙위원 13인 가운데 1명으로 선출되었다이때 "이르쿠츠크파"와 대립하는 "상해파"가 형성되었는데, 김철수는 양 파벌의 통일을 위해, 1922.11,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베르흐네우딘스크 연합대회"에 합동간부로 참가하고, 12"상해"로 왔다그러나 1923"국민대표 대회"에서의 파벌 대립에 실망하여, 7월 귀국길에 들어섰다.

3. "조선공산당" 입당

귀국 후, "서울파의 김사국(金思國)""서상합작"을 하여, "코르뷰로(高麗局) 국내부"와 대립하였으며, 1925.12"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김철수는 "2차 조선공산당"에서 조직부장, 1926.09월에 복구된 "3차 조선공산당"의 초대 책임비서를 역임하였다.

한편, "동경 일월회(一月會)의 안광천" 등과 "서울 신파의 권태석" 등을 가입시켜, "통일조선공산당"건설하였다1926.12.06., "2차 당 대회" , "안광천"에게 책임비서 자리를 인계한 직후, 보고 차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출두해, 당의 경과 및 간부개선상황을 서면으로 보고하고, 1927.05월경 귀국하였다.

"코민테른"1928"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해산재건을 지시하였다이에 "서울 상해파"1929.03"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김철수"를 위원장에 선출하였다그러나 1930.01, 서울에 도착하였다가, 3월에 검거되었다1931.10,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38년까지 복역하였다1940, 다시 붙잡혔고, 1945.08.17"공주형무소"에서 41명의 정치범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4. "이승만ㆍ박헌영"의 제휴에 노력

석방 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당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실천하였다김철수는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세력의 연대를 주장하였으며, "이승만헌영"의 제휴에 노력하였다1946, "영등포" 지역 노동자 300여 명의 입당 문제를 놓고, "경성 콤 그룹" 출신들과 대립하였다또한, 1946년 중반, "3당 합당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대회파"로서 당 대회의 개최를 주장하며, "박헌영 계열"의 선두에 서서, 08.08일 당으로부터 "무기정권"을 받았다.

이후 "사회노동당"에 대한 "북조선 노동당"의 비판이 거세지고, 11.23"남조선 노동당"이 결성되면서 많은 "사회노동당" 사람들이 "남로당"에 입당하자, "사회노동당"은 마침내 1947.02월 해체되었다이 때 김철수는 극심한 좌우익 세력다툼에 환멸을 느껴, "그만 죽고 싶은 마음"이 되어, 모든 정치활동을 포기하고, "부안 백산"으로 낙향하여, 움막을 짓고, 칩거하다가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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