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상 (張建相ㆍ1882~1974ㆍ향년 92세)"은 일본ㆍ미국 유학 후,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한 뒤, "상하이 임정" 발족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 그러나 "임정"을 탈퇴, 1920년 말 "베이징"으로 건너가 "국민대표자대회ㆍ고려공산당" 등에 참여하고, "임정"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했다.
1. 장건상 (張建相ㆍ1882~1974ㆍ향년 92세)
독립운동가ㆍ통일운동가ㆍ정치가(야당 정치인)ㆍ국회의원 (1선, 무소속)ㆍ시인ㆍ저술가ㆍ임시정부(외무부 차장ㆍ국무위원ㆍ학무부장) 참여ㆍ혁명 지(동지 김성숙) 발간ㆍ국민대표자대회ㆍ고려공산당ㆍ의열단ㆍ민족혁명당ㆍ민족주의 민주전선 등에서 활동ㆍ1948년 "남북협상" 참여ㆍ조선인민당ㆍ근로인민당(부위원장ㆍ여운형 사후, 당 지도)ㆍ"호헌동지회" 참여ㆍ혁신당 총재
• 출 생 : 경북 칠곡 • 사 망 : 서울 성북구 정릉동 (장례식- 사회장ㆍ장지- 신세계 공원묘지 (서울 근교))
• 호 : 소해(宵海) • 사 인 : 병사 • 아 명 : 장명상(張明相)
• 학 력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중퇴 → 미국 인디애나 주립 밸프레이조 대학교 법학과 졸업 → 국방대 행정학사 1기(1956)
• 가 족 : 장택상 (張澤相ㆍ12촌 동생) : 같은 동향 출신이며,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과는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인 "장택상"과는 호형호제하여, "형님ㆍ아우"라 부르기도 했다. 1950.05월, "국회의원(제2대)" 선거에 당선되었을 때, "장택상"이 친필로 쓴 축하 편지를 보냈고, "장택상"이 "외무부 장관ㆍ총리"에 취임했을 때는 그가 축전을 보내기도 한다.
1950년 "5ㆍ30선거"에서는 "부산"에서 출마, "옥중"에서 "전국 2위의 최다 득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정치 한복판에 선, 건국초기의 "독립운동가"이며, "사상가"라는 평가가 있다. "근로인민당" 계열이었으나, "남북협상" 실패 직후, 정부수립에 참여한 "조봉암"과는 일정부분 거리를 두기도 했으며, 1955년 "조봉암"이 "진보당"을 창당할 때, "진보정당 건설"을 함께 의논하였으나, 실패를 예상하고, 불참을 선언한다. 가난했던 그는 서울 노원구 정릉동 오두막 집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2. 신규식 요청으로, "상하이 임정"에 참여, "외무부 차장"
1905년, "동경"으로 가서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학과 "에 입학했으나, "미국 공사관 " 무관인 "이스트 레이크 " 밑에서 군사훈련을 받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한 뒤, "미국 "으로 갔다. "게일 목사"의 추천으로 1908년 "발프레스 예비학교 "를 거쳐, "인디애나 주립대학 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일본ㆍ미국" 유학 후, 1917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한 뒤, "상하이 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임정"을 탈퇴, 1920년 말, "베이징"으로 건너가 "국민대표자대회ㆍ고려공산당" 등에 참여하고, "임정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했다. 1921년,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대회"에 참석, "정치부위원"으로 선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3인터내셔널 3차대회"에 참석, "레닌"과 만났다. 이를 계기로 "코민테른"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사이의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1922.0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 민족대회"에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하고 돌아와, 12월 "고려공산당" 성립을 위한 "꼬르뷰로 임원"에 피선되었다. 1923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김성숙" 등과 함께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다. "김성숙" 등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잡지 "혁명"지 발간과 편집원으로 활동하다가, 1926.10월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잡혔다가, "북경신문"이 옹호해 줘, 석방되었다.
1937년, "상하이"에서 "의열단(義烈團)"으로 활동하며, 국내로 폭탄을 들여보내다가 잡혀,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뒤 송환, 일제로부터 "김원봉"을 유인할 목적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민족혁명당"에 가담했고, 1940년 "임시정부"에 재 입각, "임정 국무위원ㆍ학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임정"을 탈퇴, "여운형" 계의 "조선인민당ㆍ근로인민당 부위원장ㆍ민족주의 민주전선" 등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여운형"이 죽자, "근로인민당"을 이끌었으며,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 기간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의 일방적 협상 결정에 반발하여 감금당했다가, "홍명희ㆍ김두봉" 등과의 인연으로 풀려났다.
3. 야당 정치인ㆍ호헌동지회 참여
1947년 "남북협상"의 실패 이후, "단독정부"에는 불참하였으나, 반대하지는 않았다. 1948.7월, "이승만"으로부터 "내각 입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한민당" 계열로부터 번번이 "사상논쟁" 시비에 휘말렸다. "한국 민주당원"을 극도로 미워했던 그는 한때 원내 "자유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1950년 "5ㆍ30선거"에서는 "부산"에서 출마, "옥중"에서 "전국 2위의 최다 득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는 참여했으나, "민주당 창당"에는 불참했다. 그 뒤에도 "혁신적인 정치 세력"으로 남아, 당국의 주목을 받던 중, 1957.11월, "간첩 박정호(朴正鎬)사건"과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무죄로 석방 되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입건되었다가, 풀려났다. 1961년 "5ㆍ16 군사 정변" 이후, "혁신당(革新黨)사건"으로 검거되어, 사상범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노령" 등의 이유로 석방된 뒤, "정릉"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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