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극로 (李克魯ㆍ1893~1978ㆍ향년 85세)"는 조선어학회 회장ㆍ한글학자 ("좌익"계열이 아닌 "중도우파" 성향의 노선 견지)로, 본질적으로는 "김구"와 함께 활동하는 "우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승만"과 사이가 정말 나빴고, 남쪽에서 "이승만"의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었기에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1. 리극로 (李克魯ㆍ1893~1978ㆍ향년 85세)
복역하다가 해방과 함께 출소ㆍ"당 간사"자격으로 "김구 선생"을 대동한 바 있다ㆍ 북조선 정치인 (초대 내각의 무임소상ㆍ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 출 생 :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 사 망 : 평양 • 사 인 : 병사 • 자 녀 : 이억세ㆍ이대세
• 호 : 고루ㆍ물불 • 학 력 : 중국 동제대학 예과ㆍ독일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 경제학 박사 • 종 교 : 대종교
• 저 서 : 국어학 논총(1948)ㆍ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1949)ㆍ조선말 조(調) 연구(1966) • 논 문 : 조선어 어음의 된소리 음리에 대한 과학적 천명(1928)ㆍ훈민정음의 독특한 음성 관찰(1932)ㆍ"·"의 음가에 대하여(1937)ㆍ조선말 역점연구(1957)
1920년, "중국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거쳐, 1927년 "독일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 한글 연구에 참여ㆍ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ㆍ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ㆍ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위원ㆍ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전임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조선어학회 간사장"에도 선출되었다.
1942.10.0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 "함흥재판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08월 광복 후 석방되었다. 1946.06월, "건민회(建民會ㆍ이극로 등 중도파 세력이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 결성한 정치 단체) 위원장"을 지냈고, 1948.0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하였다.
제1차 내각의 무임소상(1948.09)ㆍ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1949)ㆍ공화국 과학원 후보원사ㆍ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1953)ㆍ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 문학연구소 소장(1962)ㆍ조국전선 중앙위 의장(1966)ㆍ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1970)ㆍ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1972) 등을 역임하였다.
※ 공병우 (公炳禹ㆍ1907~1995ㆍ88세ㆍ일본 나고야 제국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 일제 강점기ㆍ한국의 안과의사(공안과 원장)ㆍ국어국문학자ㆍ수필가ㆍ사진가ㆍ"공병우 타자기"가 유명하며, 한글 전용과 한글 기계화 및 전산화에 공헌하였다. "공병우의 세벌식"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 "이극로"가 눈병으로 "공병우"가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한다. 여기서 "공병우"는 "이극로"의 한글에 대한 열정에 자극을 받아, 본격적으로 한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시작해서, 오랜 기간의 교수ㆍ연구 활동을 통하여, 한국어 발전ㆍ과학적 해명에 큰 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살아생전 1973년 "북한 정부"로부터, "과학원 및 사회과학원의 원사(1973)"이며, 박사학위(1970)를 받았고, 사후 "조국 통일상ㆍ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그가 "월북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학계 관심이 멀어졌었다. 그러나 최근 그가 1920년대 외국(독일)에서 유학했을 시절, 한글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재조명을 받아 주목받고 있다.
2. 유학생활ㆍ독립운동 활동
1893년,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서당에서 공부한 뒤,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2년, "독립군"이 되고자 "서간도"에 망명했다. 1912년, "회인현 동창학교"에서 후일 "대종교 3세 교주"가 된 "윤세복"을 만나 "대종교"에 귀의하였고, 교사로서 "박은식" 등 저명한 민족주의자들과 활약하였다. "동창학교" 폐교 후, 1915년 "무송현 백산학교"에서 다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동제대학"에 입학하여 서구 학문을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1920년,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이동휘(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영수)"가 "고려공산"당 내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데, "이동휘"와 동행하였다가, "독일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에 유학하게 되고, 여기에서 1921~1927년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어 "베를린 대학"에 "조선어강좌"를 개설하여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27년, "제1회 세계 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인 대표로 "김법린ㆍ이의경(이미륵)ㆍ황우일" 등과 출석하여, "조선 독립 실행을 일본 정부에 요구할 것ㆍ조선에 있어서 총독정치를 중지시킬 것ㆍ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등 3개 항목의 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서 당시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있던 "허헌"을 만나, 조우하기도 했다. 졸업 후, 영국에 유학했다가 귀국하는 길에 미국에 들러, "서재필ㆍ이승만" 등을 만났다.
3. 한글 연구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국ㆍ일본" 등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선에서의 활동을 구상했던 이극로는 1929.01월 귀국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글 연구단체인 "한글학회"의 전신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고,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ㆍ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 사전"으로 이어진다), 1930년 "한글 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그밖에 1930년 "신간회 대표"로, 동포 구제의 목적을 띠고, 만주지방을 돌아보다가 귀국했다.
4. 조선어학회 사건 투옥
1942.07월,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최현배ㆍ이윤재"와 함께,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당했다. 10.01일, "함흥재판소"에서 징역 6년형 선고받았고, 같은 한글학자로 "조선어학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최현배"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역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던 "이윤재"는 수감 중 옥사했다) 이후 "함흥형무소"에 갇혔다가, 1945년 광복 이틀 후 08.17일 출소했다.
"이근엽(연세대학교 명예교수)"가 당시 출옥당시를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1945.08.17.일, 내가 15살 때인데, 조선어학회 회원인 "모기윤 선생"이 교회 청년 30여 명을 함흥형무소 앞으로 모이게 해서,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었다. "모기윤 선생"이 조선인 검사에게 광복이 되었는데, 왜 독립 운동가들을 풀어주지 않느냐고 항의해서 네 분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 분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이극로ㆍ최현배ㆍ정인승ㆍ이희승"님인 것을 그 뒤 알게 되었다. 그 때 한 분(이극로 선생으로 보임)은 들것에 들려 나오고, 세 분은 부축해 나오는데 처참한 모습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이틀이 지났지만 일제가 무서워 태극기를 들고 환영도 못했다."
5. 광복 이후
해방정국, 다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다.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한글연구를 다시 이끌었다. 그런데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가 붉어져,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김구"가 이끌던 1945.12.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 총 운동본부"의 위원으로 "반탁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회장"에 위촉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46년, "건민회(建民會)"에 입당, 그해 "건민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봄부터, "미군정" 주도로 "좌우합작운동"이 대두되자, 그는 "좌우합작"에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입법기관(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해서는 좌우합작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1947년 초, "조봉암"과 함께 "민주주의독립전선"을 결성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재개 조짐이 보이자, "좌우합작위원회"에 가담해 "시국대책협의회"에 참가한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어,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에 해체되었다. 그 해 12.20일, "김규식"이 주도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6. 좌우합작운동ㆍ남북협상
1948.0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하였다. 1948.04월, "김구"가 주도하던 "남북협상 위원"으로 참가해 "평양"을 방문한다. 이 때, "김구"는 서울로 귀환하지만, "이극로"는 북한에 잔류하면서 결과적으로 월북하게 되었다.
7. 북조선 정권 수립에 참여
1948.0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1953.12월까지 "제1차 내각의 무임소상(無任所相)"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1949년 "조국통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ㆍ공화국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등을 지냈으나,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후에 북한에서 "숙청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1961.03.2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 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 연구소 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 이후, 본격화된 북한 언어 규범화 운동인 "문화어 운동"을 주도하였고, 논문으로 "조선어조 연구" 등을 남겼다.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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