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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공산주의 (남로당 • 빨치산 • 연안파 • 소련파)

사건- 22.02 :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레닌 자금ㆍ김립 암살사건)

by 당대 제일 2022.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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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레닌 자금)"은  1922.02.06일 발생한 "김립" 암살사건이다.

1921년, "한형권"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의 대표자로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참석, 1921.11월 "코민테른 회의"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지원받고, 그 중 "한형권"이 받은 "40만 루블"을 "한인사회당"과 한국인 "사회주의" 청년들을 위한 지원금으로 운반하던 중, "상하이"에서 1922년 "임시정부 경무국"의 "김구"가 보낸 "오면직ㆍ노종균"등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 당시 60만 금화 루블은 2012년 오늘의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약 600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그러므로 200만 금화 루블은 2,000억 원에 해당한다)

 

1.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김립 암살사건)

"국제공산당""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민족을 도우려고 하였고, "국제공산당""한인 독립운동""200만 루블"을 원조하기로 결정하였다그러나 1922"레닌"이 지원한 자금 중, "이동휘ㆍ한형권" 등과 함께 "60만 루블"만을 받아가지고 와서 사용하였으며, 그는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는 알리지 않고, "한국인 사회주의"들의 활동비와 "한인사회당" "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하였다"이동휘한형권"등과 함께 "상해파 고려공산당" 자금으로 보관 중이던 금액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폭로되면서, "이동휘김립한형권""상하이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임정"의 표적이 되었다.

"이르쿠츠크파" 사람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김립이 다시 사람을 소련으로 보내서 자금을 가져왔다 한다"김립이 러시아말을 잘하는 박진순(朴鎭淳) 등 심복들을 보내서 그것을 인수해 가지고 왔다 인수를 해서, 몽고 고륜(庫倫)을 경유해서 가지고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한형권" 등이 1920.11"치타"에 도착하여, 김립에게 자금을 넘겨주었고, 김립은 "상하이"로 가져왔으며, "이동휘"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임정"이 아니라 자신의 "공산당 조직"을 위해 썼다

"임정"에서는 "레닌"의 자금을 "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혁명운동에 사용하고, "상해 임시정부"에는 내주지 않자, "임시정부"는 그가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하였다한편 "이태준"은 김립에게서 돈의 일부를 받아 "베이징"으로 가져가다가, "몽골"을 점령한 "백군파"에게 붙들려 총살되었다.

김립 (金立김익용(金翼容)1880~1922.02.06향년 42) : 독립 운동가이동휘의 측근/책사ㆍ사회주의 운동가ㆍ언론인ㆍ교육인ㆍ중국으로 망명, "고려공산당(상해파)한인사회당"에서 활동했다. (하단 맨 오른쪽)

김립

2. 피습ㆍ 최후

1922.01.26일자로, "상해 임정"은 "신규식ㆍ이동녕ㆍ노백린ㆍ김인전ㆍ이시영ㆍ손정도"등 각원들 명의로 "이동휘ㆍ김립"을 성토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 "포고문"에서 "상해임정"은 "이동휘"를 성토하여 "한형권을 이웃나라에 몰래 파견하여, 이웃나라의 후의에 의하여, 거금을 정부에 증여케 하고, 김립으로 하여금 이를 중도 횡령케 하고, 도리어 죄를 전 각원에게 돌리여 정부를 파괴하려고 꾀한 그 죄 하늘과 백성이 함께 할 수 없다"고는 성토했다.

아울러 포고문은 "(김립은) 이동휘와 서로 결탁하여 마침내 국금(國金)을 횡령하여 사양을 살찌우고 같은 무리들을 숙취하여 공산주의운동의 미명하에 숨어서 간모(奸謀)를 하고 있어 그 죄는 극형에 처할 만하다."고 선언했다.

1921년 말, "임시정부"에서 보낸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吳冕稙)ㆍ노종균(盧鐘均)"등 청년들이 김립을 찾아 상하이를 탐색하던 중, 1922.02.11일 "상하이의 자베이(閘北)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김립은 다른 한국인 사회주의자인 "김철수ㆍ유진희ㆍ김하구"와 함께 있다가 이들의 은신처를 알아내 잠입한 "오면직ㆍ노종균ㆍ양여주"등의 총격을 받고 죽었다. 곧 "상하이 불조계" 근처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시신은 "상하이 송경령공원(원 상해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

"김철수"에 의하면, "임정"에서는 "한형권"의 추가 자금 "20만 루블"을 확보하기 위하여, "김상옥"을 시켜, "윤해"에게 총을 쏘았으나 폐를 상하게만 하고 죽이지는 못하였고, "김구 일파"는 다시 김립을 백주대로 상에서 난사 살해하였다고 한다. 그때에 "김하구ㆍ윤진희ㆍ김철수"가 함께 당했다는 것이다.

"오면직ㆍ노종균"은 "김구"의 부하였으며 김립을 암살한 것은 "김구"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김철수"는 문서 처치와 김립의 시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바로 은행으로 가서 남은 돈을 다른 곳으로 옮겨두었다. 한편 상하이의 한인 사회주의자 "최동욱ㆍ이호반ㆍ한광우"등은 "임시정부"에 대해 김립에 대한 복수를 기도하기도 했다.

그가 암살당하자, "상하이"로 급하게 건너온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분개했다. 한편 그의 동지들은 김립을 죽이고, "김철수"마저 죽이려는 "김구"를 죽이고자 했으나, "김철수"는"독립운동 동지들끼리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말린다.  이 보고를 접한 "소련 공산당"에서는 "상하이"에 있는 "한인 공산당 조직"을 해소하고, 조직을 이동할 것을 지시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한 호의를 거두게 된다.

사후 "김구"가 "백범일지"에 기록한 대로, 그가 "군자금 40만 루블"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사적으로 유용, 낭비한 것으로 알려져,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와서 "구 소련 비밀문서" 등이 공개되면서, 그가 "임정"의 자금을 횡령하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지고, 그에 대한 연구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 논 란

① 레닌의 자금 문제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 그가 횡령을 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후일 "박노자"는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ㆍ노종균" 두 청년이 1922.02.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고 평가했다.

② 공금 횡령 문제

김립의 "횡령 행위"는 사실이라기보다는 "한인사회당" 등 "공산주의 정당"에 대해 적대적인 세력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의 동지들에게 3차례에 걸쳐 나눠서 전달된 "200만 루블"의 자금은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등에 어렵게 운반해 주어, "한ㆍ중ㆍ일 좌파 혁명가"들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혁명 사업비로 활용되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

"김립의 암살" 등으로 나머지 "140만 루블"은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레닌"은 "임정이 아니라, 이동휘 등에게 이 돈을 지원한 것"이었다. 그가 "모스크바"로부터 받은 돈을 사적으로 활용했다는 비판은 주로 "이동휘"의 적대세력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제기하였다. "김학준"과의 인터뷰에서, 김립에 대해 험하게 말한 "장건상"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간부였으며, 평소부터 김립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③ 향락 논란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그가 "군자금 40만 루불"을 도용, 낭비한 것 외에 "광둥" 여자를 첩으로 들여 사치와 향락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중국 여자와 사치, 향락을 누렸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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