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完璧)이란, 본래는 "흠 없는 옥"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에 대한 고사는 "화씨지벽"이다. 흠이 없고 완전함을 말하는데, "정도"로 따지면 최상급이기에 "더 완벽하다"거나 "가장 완벽하다"는 말은 동의미 반복으로 인해서, 잘못된 표현이다.
1. 완벽 (完璧)
• 1점의 흠집도 없이 "훌륭한 옥"을 가리키는 말 • 고사처럼 "훌륭한 것을 그대로 무사히 보존한다"는 뜻
• 어떤 사물이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거나, 또는 일 처리를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게 한 것
"벽(璧)"은 원래 동그랗게 갈고 닦은 "옥(玉)"을 가리키는 한자어인데, 이 벽(璧)자를 쓴 "완벽"이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전해진다.
"중국 조나라(BC 403~228)"에 "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유명한 보물 구슬이 있었다. 그런데 "진나라 왕"이 그 구슬이 탐이 나, "진나라" 땅의 일부와 구슬을 바꾸자고 제의했다.
"조나라"는 주고 싶지 않았지만, "진나라 왕"이 쳐들어올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구슬을 주기로 했다. 그는 구슬을 재주 있고 용감한 "인상여"라는 사람에게 맡겨 "진나라"에 보냈다.
"인상여"가 "진나라"에 가서 왕을 만나보니, 왕은 구슬만 넘겨받고 땅은 도무지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인상여"는 꾀를 내어 구슬에 흠집이 있다고 하여, 구슬을 다시 자기 손에 받아 들고 나더니 별안간 큰소리로 "약속대로 땅을 주지 않으면, 구슬을 내던져 산산조각을 내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진나라 왕"은 약속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인상여"는 "진나라 왕이 구슬을 받으려면, 1주일 동안 목욕재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이 그러겠노라고 하자, "인상여"는 부리나케 숙소로 돌아가 하인을 시켜, 구슬을 "조나라"로 몰래 가져가도록 했다. 그리하여 구슬은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화씨의 벽 (和氏之璧)
• 전설상의 보물로, 화씨(和氏)의 벽옥 • 사람을 깨우쳐 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이 이야기는 원래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에 나오는데, 실화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즉, "한비자"가 당시의 군주들이 법술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마치 "초나라 왕"들이 "화씨벽"을 대하는 것과 같으며, 우매한 군주를 깨우쳐 주기가 그처럼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춘추시대 초(楚)나라(BC 9C 이전~ BC 223)"에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산에서 1개의 박(璞ㆍ옥을 싸고 있는 돌덩어리ㆍ즉 옥의 원석)"을 얻어, "초여왕(楚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은 옥장(玉匠)에게 돌을 감정하게 했다. 옥장은 "평범한 돌"이라고 말했다. "변화"는 여왕을 속인 죄로 왼쪽 다리를 잘렸다.
"초무왕(楚武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다시 "박"을 가져다 바쳤다. "무왕" 역시 옥장에게 감정을 시켰는데, 또 그냥 평범한 돌덩이일 뿐이라는 답을 얻었다. "변화"는 이번에는 오른 다리를 잘렸다.
"초문왕(楚文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박"을 안고, 산에 가서 사흘 밤낮 대성통곡을 했다. 눈물이 다 마르고 피가 그 뒤를 이었다. "문왕"이 이를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물어보았다.
"천하에 다리 2개 잘린 사람이 당신 하나뿐이 아닌데, 왜 이렇게 슬프게 우는가?" "다리 2개가 잘린 것이 슬퍼서 우는 것은 아닙니다. 옥석을 돌덩이라고 해서 슬픈 것이고, 충정이 있는 사람이 사기꾼으로 몰리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문왕"은 옥장에게 명을 내려 "박"을 가공하도록 하여 "보옥"을 얻고, 이를 "화씨지벽"이라 이름했다.
3. 다른 전설같은 이야기
"초문왕" 이래로 "화씨벽"은 계속 "초나라"의 소유였다. "초위왕(楚威王)" 때, "위왕"은 공이 많은 재상 "소양(昭陽)"에게 "화씨벽"을 상으로 내렸다."소양"이 한번은 크게 연회를 열었는데, 이때 "화씨벽"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연회 중에 "화씨벽"이 없어졌다. 당시 "장의(張儀)"도 그 자리에 있었다. "소양"은 "장의"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고, "장의"를 죽지 않을 만큼 팼다. 후에 "소양"은 천금을 내걸고 "화씨벽을 사겠다"고 했지만, "화씨벽"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BC 290년으로 추정), 먼 곳에서 온 손님 하나가 "조(趙)나라"의 환관인 "영현(纓賢)"의 집에 와서 "벽옥을 팔겠다"고 했다. "영현"은 "벽옥"의 가치를 알아보고 500금을 주고 사들였다.(영현이 시장에서 샀다는 설도 있다.)
후에 "영현"은 이것이 바로 "화씨벽"이란 사실을 옥장에게 듣고 매우 기뻐하며 이를 감추어 두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의 귀에 들어갔고, "혜문왕"은 "영현"에게 "화씨벽"을 내놓으라고 했다.
"영현"이 즉시 바치지 않고 머뭇거리자, 왕이 크게 노하여 사냥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영현"의 집에 들이닥쳐 "화씨벽"을 빼앗아 가 버렸다.(영현이 자진해서 조왕에게 헌상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화씨벽"은 "조나라"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 외에도 "초나라"가 "조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화씨벽"을 선물했다는 설도 있고, "염파(조나라 명장)"가 "초나라"를 쳐서 "화씨벽"을 빼앗았다는 설도 있다.
"조나라 혜문왕"이 "화씨벽"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秦)나라 소왕(昭王)"은 "진나라"의 15개 성과 "화씨벽"을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조왕"의 명을 받고 사자로 간 "인상여"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벽옥"을 머리로 받아 깨뜨려 버리겠다고 "진왕"을 위협한 후, 몰래 수행원을 시켜 "벽옥"을 "조나라"로 되돌려 보냈다. (가중연성(價重連城)ㆍ완벽귀조(完璧歸趙))
그 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화씨벽"을 손에 넣어, 이것으로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오래도록 가고 영원히 창성하라"는 뜻의 "수명어천기수영창(受命於天旣壽永昌)"이라고 새긴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만들게 했다.
이 "전국옥새"는 "자영(시황제의 손자)"이 "유방(劉邦)"에게 나라를 들어 항복하면서 함께 바쳤으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한(漢)나라 황제"에게 대대로 전해졌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이 잠시 이 옥새를 빼앗았으나,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가 되찾았다.
옥새는 후한 말년의 혼란기에 유실되었다가, "손견(孫堅)ㆍ원술(袁術)"을 거쳐 "조조(曹操)"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나라ㆍ당나라ㆍ오대십국 시대의 후량(後梁)과 후당(後唐)"까지 전해지다가, "후당"의 마지막 황제인 "폐제(廢帝) 이종가(李從珂)"가 분신할 때 사라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몇 차에 걸쳐 "전국옥새"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모두 진짜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화씨벽"으로 만든 "전국옥새"에도 신비를 더해 주는 전설이 붙어 있다. "시황제"가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 어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뻔하였다. "시황제"가 황급히 "옥새"를 호수에 던지고 신령께 빌자, 물결이 잠잠해졌다.
8년 뒤, "시황제"의 사신이 "화음(華陰ㆍ섬서성 화음시 동남)" 지방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밤에 어떤 사람이 돌연히 나타나 사신의 길을 가로막고, "용왕이 돌아가셨기에 돌려준다"며, 옥새를 놓고 바람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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