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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일반ㆍ명리학

역술인 ③ 자강 이석영 (自彊 李錫暎ㆍ1920~1983ㆍ63세)

by 당대 제일 202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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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 이석영 (自彊 李錫暎ㆍ1920~1983ㆍ향년 63세)"은 신살론의 대가로, 한국역학교육학원의 창립자이며, 사주첩경(四柱捷徑명리학계의 동의보감)을 저술했다.

 

1. 자강 이석영 (自彊 李錫暎1920~1983향년 63)

출 생 : 1920년 평북 삭주군 삭주면 남평리            사 망 : 1983 (향년 62)             활동지 : 서울             : 자강 (自彊)             학 력 : 청주대 법학과             제 자 : 벽천 김석환            

저 서 : 사주첩경(四柱捷徑6)자강진결추명가 등을 지어 역학자들의 노하우를 공개하여, 음지의 학문을 양지의 학문으로 현대화시키는데 공헌

2. 1948년 월남 후, 생계 수단으로 명리를 보다.

1920, "평북 삭주군 삭주면 남평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역학에 조예가 깊었던 조부 "이양보(李陽甫)"로부터 훈도 받았다1948년 월남해, 충북 청주에서 몇 년간 살다가, 그 후 서울로 옮겨 생활하였다.  자강이 본격적으로 명리를 연구하게 된 시기는 1948년 월남한 후에 생계 수단으로 명리를 보면서부터다.

3. 명리학에 입문하다.

자강이 명리학에 입문하게 된 배경에는 사회적인 원인도 있지만, 개인적인 원인도 무시할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명리학의 고수였던 조부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조부인 "이양보"가 이미 명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사주첩경"4권에 보면, 1927(정묘년) 이석영 본인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그 사건이란 이석영의 조부가 혼사를 앞둔 손녀 딸(이석영 누님)의 궁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손녀딸 혼사를 반대한 일이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나의 조부님께서 우리 누님과 신랑 될 사람의 궁합을 보시고, 나의 아버님께 하신 말씀이 "얘야, 그 청년이 지금은 돈도 있고 명망도 있고 학교도 중학까지 나왔으니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으나, 단명(短命)하는 게 흠이야. 거기에 혼사하지 말라. 만약 하면 길레(吉女:누님의 애명)30을 못 넘어 과부가 된다. 그러니 안하는 것이 좋을 거야"라고 하셨다.

그러나 좋은 사윗감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아버님과 어머니의 심정이었고, 또 누님도 매우 그곳에 출가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결정짓기로 하여 마지막으로 조부님의 승낙을 청하였을 때의 일이다. 조부님께서는 "~ , 명은 할 수 없구나, 너희들이 평소에는 내 말을 잘 듣더니 왜 이번에는 그렇게도 안 듣느냐, 저 애가 팔자에 삼십 전(누님은 1911년생)에 과부가 될 팔자다 그 청년은 33을 못 넘기는 팔자이고 보니 기어코 팔자를 못 이겨 그러는구나 이것이 곧 하늘이 정한 배필인가 보다. 이 다음 네가(누님을 가리킴) 일을 당하고 나서 나의 사당 앞에서 울부짖으면서 통곡할 것을 생각하니 참 가엾구나 안하고 하는 것은 너희 마음에 있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씀하셔서, 혼인은 성립된 것이다.

그 후, 재산과 부부간의 금슬 면에서는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살았는데, 자손에 대해서는 애가 태어나면 죽고, 나면 죽고 하여 6남매 (42)를 낳아 모조리 실패하였다기유년(1939) 09.14일에 득남하고, 매형은 그 해 12.30일 별세하고 말았다조부님은 이미 2년 전인 정축년에 작고하셨고, 누님은 기묘년에 상부(喪夫)하여 과연 조부님의 사당 앞에 가서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누님의 모습이 지금도 나의 눈에 훤하고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나의 매형 사주는 무신(戊申)년 정사(丁巳)월 기묘(己卯)일 경오(庚午)시였다(사주첩경 4, 309~311, 한국역학교육학원)

심리학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유년시절의 체험이 그 사람의 인생행로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사주첩경"의 저자인 이석영도 어린 시절 누님의 운명에 얽힌 참담한 광경을 목격하였다"나의 사당 앞에서 울부짖으며 통곡할 것"이라는 조부의 예언이 현실로 들어맞았을 때, 그 장면을 목격한 이석영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고인들이 탄식하였던 "명막도어오행"(命莫逃於五行, 운명은 오행(사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의 이치를 깨달았던 것일까? "이석영"이라는 걸출한 명리학자의 출현은 서북지역의 소외감, 명리학의 대가였던 조부의 영향과 어린 시절의 체험이 모두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4. 명리학계의 동의보감이라는 "사주첩경(6)"1969년에 완성되었다.

1948년부터 대략 20년간의 연구와 실전체험을 정리해 저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사주 공부를 하려면 중국의 원전에 매달려야만 하였다중국 원전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면 해독하기가 쉽지 않다이뿐 아니라 연습문제도 수 백년 전의 명, 청대 사례이므로, 현장감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런데 "사주첩경"은 이 문제를 모두 극복했다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한문 원전보다 한결 쉽다책에 소개되는 연습문제도 60, 70년대를 전후한 한국 사람들의 팔자를 분석한 것이라 훨씬 피부에 와 닿는다허준의 "동의보감"이 등장함으로써, 한국이 중국 의학에서 독립할 수 있었듯이, "사주첩경"이 등장함으로써 한국 명리학계는 중국에서 어느 정도 지적 독립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석영은 수십 년 동안 읽은 중국 원전과 바닥에서 갈고 닦은 실전 노하우를 소화해 자신의 책에다 대부분 공개하였는데, 이 점은 높이 평가받는다후학들이 명리학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서를 통해 많은 도움을 얻고 있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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