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계 박재완 (陶溪 朴在玩ㆍ1903~1992ㆍ향년 89세)"은 용신론의 대가ㆍ명리요강(命理要綱) 저술ㆍ박도사로, 무욕담백한 인품을 통해 명리학자의 품격을 끌어올린 인물이다. "박도사"란 명칭을 들으며, 명성이 자자했는데도 평생에 집 1칸 마련하였다고 한다. 인격이 청렴하고, 올 곧아서 아직도 고매한 인품이 칭송받고 있다.
1. 도계 박재완 (陶溪 朴在玩ㆍ1903~1992ㆍ향년 89세)
명 언 : 운명은 작은 건 인간의 노력으로 바꾸어도, 큰 건 못 바꾼다. (인생의 큰 줄거리는 못 바꾼다는 뜻ㆍ1991년 MBC 방송 "명리학자 박재완")
• 출 생 : 1903년 (대구) • 활동지 : 대전 • 호 : 도계(陶溪) • 별 칭 : 득명(得名)ㆍ득령(得靈) • 특 기 : 무욕담백한 인품을 통해 명리학자의 품격을 끌어올린 인물 • 이 론 : 용신론의 대가
• 스 승 : 면우 곽종석(傘宇 郭鍾錫): 사서삼경 / 왕보(王甫ㆍ중국인): 태을수(太乙數)ㆍ황극수(皇極數)ㆍ명리학(命理學)을 연수 / 백사 전백인(白蛇 全白人)- 중국에서 만나 명리를 배웠다고 전함. • 제 자 : 독특한 감명법(즉, 사주 + 황극수)으로 후학들이 꽤나 골치를 아파하였음. • 수제자- 노석(老石) 유충엽(종로에서 역문관(易門關)운영)ㆍ조철수
① 저 서 : 명리요강 (命理要綱)ㆍ명리사전 (命理辭典)ㆍ명리실관 (命理實觀)
• 명리요강 : 명리의 핵심 원리들을 요약한 책. • 명리사전 : 원리들을 사례별로 풀어 놓은 책ㆍ일본의 추명학자들이 일어로 번역본을 내자고 2번이나 요청했던 명저로, 하지만 도계는 이를 완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한국 명리의 노하우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명리실관 : 도계가 직접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사주를 본 임상기록ㆍ보통 "간명지(看命紙)"라 부르는데, 사후(死後)에 제자들이 간행한 것이다. 수제자 "유충엽"이 한문으로 된 간명지를 해석한 것이 "명리실관"이다.
② 스 승 : 백사 전백인 (白蛇 全白人ㆍ본명- 전재학ㆍ호- 백사(白蛇ㆍ흰뱀)ㆍ서울 도렴동 44번지)
구한말에 살았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온몸이 흰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특이한 몸의 특징으로 인해 약재로 쓰려고, 왕실로 잡혀 왔다가 눈동자가 까맣다는 이유로 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삼각산 밑으로 숨어들어가 명리학을 익혔는데, 한 공부 한 다음 대륙으로 가서 군벌들의 사주를 풀어줬다고 한다. 조선 총독의 일(전쟁터로 나간 사위 생사)을 감정하여 사주면허증을 발급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③ 동문 수학 : 윤상돈ㆍ전동진(全東津)ㆍ권상룡(權相龍)
실력 : 윤상돈 > 전동진 > 권상룡 > 박재완 • 윤상돈 : 한의사, 전동진에게 오행을 배움. • 전동진 : 후에 평강군수가 됨. 박재완보다 나이가 많았음. • 권상룡 : 박재완보다 나이가 18세 위
2. 일 화
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1979년 운세 : 풍표낙엽 차복전파 (楓飄落葉 車覆全破)
"풍표낙엽 차복전파"는 "단풍이 낙엽이 되는 시절, 차가 엎어져 전부 파손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김재규는 차를 아주 조심했고, 자동차를 탈 때마다 운전기사에게 조심하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곤 했다. 그러나 김재규 인생을 놓고 볼 때, "차복전파"에 대한 해석은 잘못되었다.
車는 자동차가 아닌 "차지철"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全은 "전두환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김재규가 미리 알았다면 역사는 과연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것이 10ㆍ26의 예언이 되어 버릴 줄이야.
② 1979년 12ㆍ12사태 시
사태발생 2일 후인 12.14일 이른 아침, 대전에 살고 있던 박재완은 신군부의 군인들에 의해 서울 경복궁 근처의 모 안가로 강제로 모셔져야만 했다. 그 이유는 12ㆍ12 거사 주체세력들의 명리를 보기 위해서였다. 과연 거사는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인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던 시점이다. 그 긴박한 시점에 신군부 주체들이 다른 일을 제쳐두고, 자신들의 사주팔자부터 보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평소 생각하기를, 칼을 숭상하는 군인들은 사주팔자와 같은 흐리멍텅한 미신(?)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줄로만 알았다.
사주팔자는 다분히 문사적(文士的)취향 아니던가.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군인들 역시 사주를 본다는 것은 의외였다. 사주팔자에는 문무의 구별이 없음을 깨달았다. 박재완이 감정한 신군부 주체들의 사주는 이러했다고 한다. "지금은 운이 좋다. 그러나 10년쯤 지나면 "재월령즉 위재이환(財越嶺卽 爲災而還)" 즉, 재(財)가 재(嶺)를 넘으면 재(災)가 되어 돌아온다."
12ㆍ12라는 긴박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벌어졌던 은밀한 일화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그 계기는 바로 "만세력(萬歲曆)" 때문이었다. 사주팔자를 보려면 반드시 "만세력"이라고 하는 달력이 필요하다. 도사의 필수품은 만세력이다. 만세력은 생년ㆍ월ㆍ일ㆍ시를 육십갑자로 표시한 달력이다. 일명 "염라대왕의 장부책"이다. 염라대왕의 장부를 보지 않으면, 운명을 알 수 없다. 만세력이 없으면, 사주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도사의 필수품은 만세력이다. 신용카드는 놓고 가더라도 만세력은 반드시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 도사는 주머니에 만세력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굶어 죽을 일은 없다. 자기 앞날의 운명에 대해 관심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재적인 고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2.14일의 박재완은 만세력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군인들이 대전의 집으로 들이닥쳐 순식간에 납치했으니, 미처 만세력을 챙길 심리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박재완은 서울에 도착하자, 종로에 사는 제자인 유충엽에게 전화를 했다. "나 지금 서울에 있네. 급히 오느라 만세력을 안 가지고 왔는데, 자네 만세력 좀 보내주게." "그러겠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글쎄. 여기가 어디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사람을 그곳으로 보내겠네." 이 전화가 끝나고 15분 정도 지났을 때쯤, 건장한 청년 몇몇이 검은 안경을 쓰고, "역문관"에 나타나 제자 유충엽으로부터 만세력을 받아 총총히 사라졌다.
이 만세력 일화는 그때 스승인 박재완으로부터 갑자기 전화를 받고 만세력을 전해준 유충엽씨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1997년 월간시사지 "WIN"(월간중앙의 전신)에 "역문관 야화"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유충엽씨는 역술인으로는 드물게, 해방 이후(1949년) 대전사범을 나온 인텔리다. 대전사범이라도 나왔으니, 이 일화를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글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③ 임종 예언
1992년 임종을 맞이해서도 그냥 가지 않고, 후학들에게 자신이 죽는 날짜와 시간을 미리 정해준 일이다. 죽음을 귀천(歸天)이라 했던가! 운명의 이치를 다루는 명리학자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짜도 정해져 있듯 죽는 날짜도 정해져 있다고 본다. 정해진 날짜에 하늘로 돌아가야만 끝맺음을 제대로 한 것이다. 귀천 날짜에 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모습도 과히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갈 때는 가야 한다. 이런 이치를 박재완은 몸으로 직접 보여 주었다.
그는 임종에 즈음해서 자식들에게 자신의 귀천 날짜와 시간을 미리 예견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정해진 그 날짜와 시간에 자신이 하늘나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그러므로 절대로 링거 주사를 꽂지 말아 달라"는 당부였다. 링거 주사를 맞으면 인위적으로 얼마간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하늘의 법도를 어긋나게 하는 일이 된다. 박재완은 자신이 예언한 그 날짜, 그 시간에 조용히 운명하였다.
과연 일세를 풍미한 명리학자의 죽음다웠다. 도인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즈음하여 일생 동안 닦은 내공을 바탕으로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커다란 서비스이기도 하다.
3. 생애
① 전국의 명산대찰 순례하며, 도력 쌓았다.
1903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10세 전에 면우 곽종석(傘宇 郭鍾錫)선생 문하에 입문해 사서삼경을 수학하였다. "곽면우"의 풍수 수제자인 "정봉강"도 일본 경찰을 때려죽이고 전국으로 유랑하였듯, "박재완"도 "곽면우"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을 하려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단체 내부의 파벌싸움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명리학에 입문하게 된다.
당시 이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중국 무송현의 왕보(王甫) 선생 문하에서 태을수(太乙數)ㆍ황극수(皇極數)ㆍ명리를 사사 받는다. 대가 밑에서 이론 공부와 함께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귀한 서적들을 이 시기에 입수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인연도 팔자소관이다. 여기까지가 이론 공부였다면 중국에서 귀국하여 1928년 26세 때는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을 비롯한 여러 명산대찰에서 수도를 한다. 정신세계의 깊은 곳으로 침잠(沈潛)하는 수련의 과정을 겪었던 것이다. 금강산, 오대산, 속리산 등에서 학리 연마에 정진하여, 명리학의 태두의 자리에 이르렀다.
1948년에 대전에 정착하여, 명리학의 궁극(窮極)을 고구(考究)하는 한편 후진양성에 진력하다가 1992.09.29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끝으로 "노자"에서 도의 경지에 들어간 선비의 모습을 표현한 구절이 있다. 아마도 박재완의 모습이 이러지 않았을까 한다. "미묘하고 신비롭게 통하여, 무릇 오로지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일하기 앞서 신중하여, 겨울에 내를 건너 듯하고, 생각이 깊어서 중앙에 있으면서도 변두리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며, 몸가짐이 엄숙하여 항상 초대 받은 손님 같고, 집착하지 않는 모습은 봄날에 얼음이 녹듯하며, 순박하여 손 타지 않은 나뭇등걸인 듯하고, 겸손하여 텅 빈 골짜기인 듯하며, 시비를 떠나 있어 흙탕물인 듯하다.
※ 곽면우 (1846~1919ㆍ73세ㆍ독립운동가ㆍ구한말 영남의 유명한 유학자)
3ㆍ1운동 이후, 일본정부에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학에 깊은 조예를 지녔던 인물이다. 소설 "단(丹)"을 보면, 그는 정신수련에서 상당한 경지에까지 들어간 인물로 묘사된다.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풍수가인 박의산 (朴懿山ㆍ1926~ )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이환조 선생이 나오고, 이환조의 스승이 정봉강이고, 정봉강의 스승이 바로 곽면우 선생이 되기 때문이다.
② 2만 명의 사주는 봐야, 물리가 터진다.
박재완은 90세의 장수를 누렸기 때문에 고관대작과 기업가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많은 사람들의 사주를 보았다. 모모한 고위관료와 사업가 치고 그에게 사주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만큼 적중률이 높았다. 사주에 대한 적중률도 적중률이지만 그의 인품도 남달랐다. 담백무욕(淡白無慾)해서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명성이 높아지고 적중률이 높아질수록 돈에 욕심을 내기 쉬운 법인데 그는 돈 문제에 담백하였다고 전한다. 그만큼 단순한 술객의 차원이 아니라, 내면 수양에도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③ 명리학자로 고충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사업에 부도나 자살하기 일보 직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몇 년이 고비이니, 이 고비만 넘으면 좋은 운이 찾아온다. 그때까지만 어떻게 해서든 참아 보라"든가. 남편이 몰래 바람을 피워 낳아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이 찾아와 하소연하면, "팔자소관이려니 하고 넘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이혼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라"고 위로하였다.
엄청난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로 위로할 것인가? 그 해답은 주님의 섭리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팔자소관으로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미치거나 병들거나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 낙방을 거듭하던 고시 수험생이 어느 날 박재완을 찾아와 물었다. "저 아무래도 고시공부 집어치워야 할까 봐요." "아니네, 이 사람아, 자네는 고시에 합격할 운이 있네, 한 2년만 더 참고 공부하면 그때 합격할 것이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소."
2년 후, 그 수험생은 고시에 합격하였다. 합격하고 나서 이 수험생은 사주팔자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의문을 품고 고시공부 하듯 명리학 서적들을 독파했다. 그리고 나서 쓴 책이 바로 "사주정설(四柱精說)"이라는 책이다. 고시 합격자가 핵심 원리만 뽑아 정리했기 때문에, 보기에 일목요연하고 부피도 얇아, 초입자가 공부하기에 좋은 책이다. "사주정설"의 저자는 백영관(白靈觀)으로 되어 있는데, 이 이름은 저자의 실명이 아닌 가명이다. "사주정설"을 집필할 때(1982년) 저자는 현직 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현직 검사가 실명으로 사주팔자 책을 저술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부득이 가명으로 책을 낸 것이다.
4. 도계 박재완과의 대담
① 명리학을 공부하게 되신 동기와 명리학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좀 설명해 주십시오.
본래 농촌에서 생장했습니다. 그래서 19살 나던 04.17일까지는 그저 뜻도 모르면서 사서삼경을 읽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려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어 중국으로 빠지게 되었어요. 거기서 오행을 아는 왕보라는 선생을 만나서 오행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오행을 배우겠다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네가 五行을 배운다 한들, 옛날 범증(전국시대 항우를 도운 전략가. 천문을 보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인물임을 알고 그를 죽이려 기도했으나, 실패함)이만 못 할 거고, 그 후의 방사원(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 방통)만큼 못할 텐데, 배워서 뭣하겠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억지로 배워달라고 했지요. 그분으로부터 배운 것이 황극수, 태을수 등의 수(數)였습니다. 이런 수는 세상일을 환히 내다 볼 수 있다는 수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워도 소강절(송나라 성리학자 시인 천문역수의 대가 수리철학자 황극경세서를 저술)처럼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를 바꾸어 사주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해서 20살 때부터 22살 때까지 중국의 사주학설을 공부했습니다. 23살에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서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의 잘되고 못 되는 것을 두루 살피며, 경험을 하기 시작했어요.
② 사람의 길흉화복을 헤아리는 일에 대해서 좀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십시오.
길흉화복은 생년월일(生年月日)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꼭 알아야 할 일은 환혼동각(幻魂動覺)의 4가지 요인이 생년월일 이외에도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환(幻)은 쉽게 말하자면 한 날 한시에 태어났더라도 짐승이냐 사람이냐에 따라 길흉화복은 사람한테만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에게는 사람의 길흉화복이 적용될 수가 없어요.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철학의 주제가 됩니다.
혼(魂)은 조상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전신은 아버지이고 그 앞의 전신은 할아버지입니다. 이렇게 쭈욱 이어지지요. 그래서 그 조상이 좋은 일을 했으면 그 자손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이 고약한 일만 많이 했는데, 그 후손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되겠지요. 동(動)입니다. 한마디로 有國 연후에 有民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왜정 36년 동안, 한국사람은 아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8ㆍ15해방이 뚝 떨어지니까 장관되는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국회의원이 여기저기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動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세상에 태어나느냐가 중요하지요. 마지막이 각(覺)입니다. 이것은 본인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본인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생년월일시가 똑 같으면 똑 같은 인생을 살게 되느냐 하면,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사주는 518,400 가지의 다른 사주가 있습니다. 60가지 갑자에 12가지 달을 곱하고, 거기에다 60가지 일진을 곱하고, 또다시 12가지 시간을 곱해서 얻은 숫자입니다. 세계에는 똑 같은 사주를 타고 난 사람이 한 사주마다 평균 1만 명쯤 있습니다. 세계인구 50억을 오행의 가짓수로 나누면, 그렇게 되지요. 이와 같이 똑 같은 사주를 타고나더라도 각자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앞에서 말한 환혼동각(幻魂動覺)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환혼동각(幻魂動覺)을 빼어 놓고는 철학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헛소리가 되기가 십상이지요. 환혼동각(幻魂動覺)이 좋으면 사주가 좀 부족하더라도 이것을 씻어 줄 것이고, 환혼동각(幻魂動覺) 이 나쁘면 사주가 좀 좋더라도 복을 받는 것이 줄어듭니다.
③ 명리학의 학문적 내력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옛날 복희(중국 고대 삼황오제 가운데 맨 첫 왕)가 하도에서 방위와 신체부위를 표시하는 수 체계를 얻고, 주나라 문왕이 낙서에서 점으로 표시하는 수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이 2가지가 합하여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체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주역(周易)입니다. 그러나 요즘의 술객들이 흔히들 주역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주역은 진짜 학문이지요. 진리와 선을 밝히는 학문입니다. 이것이 역학(易學)입니다. 다만 주역에도 군데군데 음양오행에 따라 길흉화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의 술객들도 음양 2글자와 오행을 말하고 있으니, 그 근원은 주역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역학 그 자체는 아니지만, 역학에서 분(分)하여 나왔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④ 명리학과 도학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도학을 내어버리고, 관상을 보아주어서도, 사주를 보아주어서도, 의술을 펴서도 안 됩니다. 도학을 떠난 오행은 위경입니다. 예를 들어 사주에 본처를 버리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해서 이롭다 하더라도 오행하는 사람은 그것이 도덕에 벗어난 일 일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술객의 심덕에 달린 문제라고 하겠지요.
⑤ 한국의 명리학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다고 보십니까?
지금 우리나라 명리학은 야단났습니다. 버렸어요. 6개월간 초급반, 1년간 고등반 이런 것으로는 명리학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한문에 무식은 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년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67년간을 전공하고 있다고 보겠는데, 그래도 껍데기 밖에 모르고 핵심을 잡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그래도 좀 했다는 나 같은 사람도 오히려 부러지게 이야기 하지를 못합니다. "글쎄요, 운이 좀 덜 좋으니까 분수를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정도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매우 야무진 소리를 더 합니다. 당장 교통사고를 당할 거라느니, 부부 이별할 수가 틀림없다느니 말입니다. 술객들 사이에 서로 공부한 것을 두고 교환하거나 하는 일도 없고 선후배관계 같은 것도 없습니다. 징역쟁이들의 질서만도 못하지요.
이런 얘기는 다 제쳐두고, 술서하는 사람들한테 꼭 얘기하여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시간 얘깁니다. 지금부터 80년 전 대한제국 시절에는 11시 땅 치면, 그때부터 오시 초였습니다.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뺏은 후, 경술년 07.25일부터 식민지 정책을 펴느라고, 우리나라 시간을 30분 앞당겨 동경표준시간을 쓰게 되었지요. 왜정 36년, 군정 3년, 그 다음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도 이 시간을 그냥 쓰다가, 이대통령 그 양반이 시간을 왜 일본시간으로 쓸까 보냐고 야단을 치는 바람에 갑오년 음력으로 02.17일에 가서 다시 30분을 늦추었습니다. 그래서 도로 우리나라 도수와 딱 맞게 되었지요.
신축년까지 그래서 옳은 시간을 썼습니다. 그러다가 군사혁명이 나고, 박정희 대통령시절 정부에서 그 해 음력 06.29일 자시부터 다시 동경표준시간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11시가 지났다고 오시가 아닙니다. 이렇게 틀린 시간을 가지고야 오행이 맞을 수가 없지요. 게다가 서머타임을 실시한 적도 있어서 시간을 바로 잡기가 까다롭습니다. 사주를 바로 보려면 첫째 시간부터 제대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⑥ 옛날 선생님이 처음 명리학을 공부하시던 시절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제가 중국서 돌아와서 배운 선배는 서울 도염동 44번지에 살던 전재학(全在鶴)이란 분입니다. 몸 전체가 새하얀 분이라서 전백인(全白人)이라고도 불렀지요. 같이 서로 공부한 사람으로 권상룡(權相龍)ㆍ전동진(全東津)ㆍ윤상돈 이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권상룡 씨는 나보다 18세나 위였습니다만, 나를 늘 접장, 접장하고 부르며 선생대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지요.
전동진 씨도 기축생이라서 나보다는 나이가 많았지요. 전동진 씨는 나중에 평강군수가 되었는데, 군수가 되다가 말고, 6ㆍ25가 터지는 바람에 내려와서 다시 사주를 보았지요. 학문이 아주 넉넉했지요. 윤상돈 씨는 한의원이었는데 전동진 씨한테 오행을 배운 사람입니다. 우리 넷 가운데 윤상돈 씨가 제일 나았습니다. 나보다는 권상용 씨가 낫고, 권상룡 씨 보다는 전동진 씨가 더 나았어요. 참 잘들 보았지요. 셋 다 나보다 먼저 죽었어요.
⑦ 선생님이 가르친 정통 명리학의 후계자는 누가 있습니까?
이 老石 밖에는 없어요.(옆에 앉은 노석(老石) 유충엽(종로에서 역문관(易門關)운영)을 가리키며) 73년부터 3년 동안 내 옆에서 서사 노릇을 해주었습니다. 내가 책을 쓰는데도 도왔어요. 그 밖에 지금 공부하고 있는 사람은 약 10년째 내 옆에서 지내고 있는 조철수라는 사람이 있어요.
⑧ 선생님의 사주보신 경험담 가운데서 몇 가지만 좀 얘기해주십시오.
(질문에 선생은 웃음만 머금고 좀체 대답이 없다. 듣기로는 우리나라 당대 명사들 가운데 선생에게 명운을 물어 본 사람은 대단히 많다고 했다. 유충엽 씨가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기록했던 몇 가지 일화를 들려준다)
• 어느 날 아침에 손님이 한 분 찾아와서 사주를 봐달라고 했다. 선생은 다음과 같은 옥루몽의 주인공 양창국의 시를 써 주었다. 斜雨江口 碧龍倒江 < 빗긴 비 내리는 강에, 푸른 용이 넘어졌구나.> 그 손님은 탄성을 지르며 어떻게 대처할지 그 방도를 물었다. 토건업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전날 부슬비 내리는 날씨에 그의 심부름을 가던 차가 금강에 거꾸로 박혀 버렸던 것이다. 그 차는 푸른색 코로나였던 것이다.
• 수년 전에 교통사고로 별세한 어떤 유명한 전문경영자의 그 때 신수는 "石氏問藥"으로 나왔다고 한다. 사언독보라는 책에 나오는 이 구절의 뜻은 비석을 새기게 된다는 뜻, 즉 사망의 뜻이라고 한다. (이런 얘기가 자꾸 이어져 나가자, 그때서야 선생이 이야기를 하나 더 꺼낸다)
젊었을 때 한번은 강릉의 어떤 여관에 들었는데 나를 시험해볼 생각으로 어떤 쌍둥이형제의 사주를 누가 가지고 왔어요. 乙酉ㆍ丙戌ㆍ甲申ㆍ辛未 이렇게 된 사주였어요. 시간을 물어보니 쌍둥이 형은 2:28분이고 동생은 2:31분에 태어났다는 것이었어요. 지장간에 보면 선동은 未 가운데 己土가 들어 있고 후동은 같은 未이지만 丁火가 들어 있거든요. 형과 아우는 둘 다 귀한 자리에 오르겠으나 형은 상처를 하고 무 자손하며, 아우는 부부해로하고 3형제를 두었다고 답해 줬지요. 젊은 때는 이렇게 까지도 맞힌 일이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형의 이름은 이동호라고 했고 아우는 이동민이라고, 둘 다 일본서 대학을 나오고 법관노릇을 하는 분들이었어요.
⑨ 여러 가지 말씀 감사합니다. 특별히 하시고 싶은 말씀이 계시다면?
2가지가 딱 있습니다. 이것은 둘 다 나라가 할 일인데... 하나는 전과자를 사회가 받아서 활용하는 방법을 꼭 연구해서 실천해 달라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재능 있는 인재로 키워서 살도록 해줘야지요. 둘째는 교육제도를 고쳐서 우리나라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원하는 대학을 나올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입니다. 건물과 선생이 문제라고 할는지 모르나 건물은 굳이 커다란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닐 테고 대학을 졸업했으면 누구나 또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을 테니 선생도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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