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식 - 일반ㆍ명리학

역술인 ④ 제산 박재현 (霽山 朴宰顯ㆍ1935~2000ㆍ65세)

by 당대 제일 2022. 12. 23.
반응형

 

"제산 박재현 (霽山 朴宰顯ㆍ1935~2000ㆍ향년 65세)"은 물상론의 대가ㆍ앉은뱅이(6ㆍ25전쟁 중)ㆍ책을 내지도 않았고, 제자도 없다. 속칭 "부산 박도사"로 불리며, 천재ㆍ귀신의 반열에 올라도 된다는 명성이었음. 좌충우돌, 종횡무진의 삶을 살며, 지켜보는 이에게 한편의 드라마를 선사했고, "삼성" 입사 면접 : "이병철 회장"의 부탁으로 관상으로 면접을 보았다.

 

1. 제산 박재현 (霽山 朴宰顯ㆍ1935~2000ㆍ향년 65세)

출 생 : 경남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 아 명 : 박광태           활동지 : 부산함양           : 제산(霽山)운포도강           별 칭 : 박도사살아있는 토정           학 력 : 거창 농고           경 력 : 1987- 재야도학인 33인을 규합하여, 진단학회 설립 /  1994- 수련도관 덕운정상(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건립           특 기 : 일람첩기(一覽輒記) 소유자 (한번 읽으면 그 내용을 모두 외워 버리는 것)

 덕운정사 (德雲精舍) 건립

함양군 서상면 옥산부락에 위치ㆍ대지 2,000평에 50여 칸에 달하는 전통 기와집 도교 도관의 형태자신의 탄생지에 자신이 직접 세운 도관(道館)이자, 집이고, 아카데미였다 도회지에서 은퇴하여, 말년에 이곳에서 제자도 키우고 자신의 못 다한 정신수양도 하려고 지은 건물일반주택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그렇다고 불교 사찰로 보기에는 종교적 냄새가 덜 난다. 그게 바로 도교 도관의 형태다.

 복채

1970년대 후반, 서민은 20만원이고, 정치인은 200~ 300만원을 받았다.  20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다. 일반 서민은 부담을 느낄 만한 액수였다.  하지만 효과(?)에 비하면, 그 액수는 싸다고 여겼기에 박도사의 집은 항상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몸이 약했던 박도사는 하루에 상담해 주는 사람을 15명 이내로 정했다.  그 이상은 사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의 인생사를 들어주고 상담해 주는 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2. 일람첩기 (一覽輒記)의 소유자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극락산 자락에 맺혀 있는 을해명당(乙亥明堂)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는데, 과연 비범했다. 몸도 약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얌전해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아이로 보였지만, IQ 만큼은 대단했다. "서상에 신동 났다"는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박재현의 유년시절 이름은 광태(光泰)였고, 어렸을 때부터 한번 읽으면 그 내용을 모두 외워 버리는 "일람첩기(一覽輒記)"의 소유자였다.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은 인물을 수십년간 고대했던 광태의 조부는 신동 손자를 끔찍하게 아꼈다고 한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전설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광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다. 광태가 학교에 가면서 혹시 도시락을 안 가져가는 날이 있으면, 조부는 직접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 문 앞에 가서 기다렸다. 손자가 학교 끝나고 돌아오면, 조부가 당신 방으로 불러 공부를 시켰다. 극성스러울 정도의 손자 사랑에 광태의 어머니는 아들을 시아버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지나치게 손자를 감 싸고 도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 "너희가 무엇을 안다고 광태를 나무라느냐"고 호통치곤 했다. 후일 광태가 정상적인 인생행로를 포기하고 지리산 일대의 산천을 정처 없이 유랑하는 낭인으로 전락했을 때도 손자에 대한 조부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너희 안목으로는 광태를 모른다. 내 말만 들어라.  산으로 가서 공부하겠다면 잡지 말어라. 그 애 하는 대로 가만히 둬라." 이 말이 아들ㆍ며느리에게 남긴 조부의 유언이자 당부였다. 그는 서상초등학교를 마치고 진주농림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진주농림은 당시 5년제였는데, 제산은 공부를 잘해서 장학생으로 뽑혔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제산으로 하여금 조용히 공부나 하게 놔두지 않았다.

3. 6ㆍ25전쟁 중에 앉은뱅이가 되다.

중 2때, 6ㆍ25가 터진 것이다. 피난을 가야 했다. 부랴부랴 진주에서 고향인 서상으로 올라오기 위해 목탄으로 불을 지펴 움직이는 목탄차를 탔다. 서상으로 오던 도중, 이 목탄차가 비행기 폭격을 피하려다 비탈길에서 그만 엎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제산은 다리가 부러졌고, 전쟁 와중에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한 제산은 그만 앉은뱅이가 돼 버렸다. 3년 동안 집에서 앉은뱅이로 있던 제산은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집에서 놀아야만 했다. 그 후 물리치료를 받아 겨우 몸이 회복되었을 때는 동년배 또래들과 많은 격차가 나 있었다. 집안의 다른 사촌들은 정상적인 과정을 마치고, 이미 서울의 명문대학에 다니고 있던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광태(제산)는 시골의 거창농고에 다녔다.  거창농고의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제산 학생의 날카로운 질문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창농고 재학시절 광태와 같은 하숙방을 썼던 동기는 다음과 같은 술회를 남겼다. "하숙방에서 친구가 시험공부를 하고 있으면, 광태는 방에 누워 친구가 책 읽는 소리를 들었다.  광태는 몸이 약해 오랜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태는 친구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모조리 암기해 버렸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친구는 70점을 받은 데 비해 누워 있던 광태는 만점을 받는 희극이 연출되었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였다. 하지만 광태는 보편적인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공부를 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4. 고등학교 졸업과 낭인 생활

거창농고 졸업 후에는 정상적인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해, 이 산 저 산을 떠도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소위 말하는 "낭인과(浪人科)"에 입학한 것이다. 머리 좋은 천재가 낭인과로 들어가면, 관심 갖는 분야가 바로 도통(道通)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여 "나는 왜 이런 팔자인가" 라는 의문을 거쳐, 이 세상과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가 도대체 무엇인가에까지 이른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도를 통하고 싶은 대원(大願)이라고나 할까.

청년 광태는 "그것이 알고 싶다"는 불타는 욕망을 가지고 지리산 일대의 도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지리산은 예부터 기인ㆍ달사ㆍ도사들이 숨어 지내는 산으로 이름이 높다. 박재현은 청년 시절 지리산 일대를 10여 년간 떠돌면서 가진 수많은 기인ㆍ달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영기(靈氣)에 눈이 띄었던 것 같다. 지리산이 어떤 산인가? 역사 이래 한국 최대의 "도인구락부"가 아니던가? 지금도 어림잡아 2개 대대 병력에 해당하는 2,000명 정도의 낭인과가 운집해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이 시절 청년 제산의 모습은 거렁뱅이에 가까웠다. 춥고 배고프고 노잣돈도 떨어진 상황이었다. 완전히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외로운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 불가의 의례집인 "석문의범(釋門儀範)"에서는 이처럼 외로운 구도자의 심경을 "독보건곤 수반아(獨步乾坤 誰伴我)"라고 읊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 홀로 걸어가니, 그 누가 나와 함께 할 것인가!"라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일러 단독자(憺者)의 삶이라고 하였던가! 하지만 머리에 기름을 부은 자는 그 길을 회피할 수 없는 법.

광태는 지리산 둘레의 산청ㆍ함양ㆍ운봉ㆍ구례 등지를 방랑하면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숨어 사는 수많은 기인ㆍ달사들과 교류를 가졌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유교ㆍ불교ㆍ도교를 섭렵하게 되었다. 유교의 사서삼경과 불교의 "금강경ㆍ화엄경ㆍ능엄경"을 비롯한 제반 불경, 도교의 벽곡(酸穀)ㆍ도인(導引)을 비롯한 호흡법과 "성명규지(性命圭旨)" 같은 비서(秘書)들을 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말로만 듣던 천문ㆍ지리ㆍ인사로 통칭되는 재야의 학문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기인ㆍ달사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광태는 어느새 영기(靈氣)가 개발되었던 것 같다. 대체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영기(靈氣), 즉 직관력이 부족한 수가 많다. 분석적이기 때문이다. 매사를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영기가 쇠퇴한다. 마치 모래시계의 양면과 같아서 논리가 강하면, 반대쪽 사이드인 직관 쪽 기능은 퇴화되게 마련이다.

반대로 직관이 강하면, 논리가 약해진다. 필자가 많은 도사들을 만나본 경험에 의하면 산에서 "기도발"이 잘 받는 사람은 성격이 단순해 깐깐하게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쉽게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인다. 반대로 대학에서 논문 많이 쓰는 교수들을 만나보면 논리적이기는 한데 시원하게 터진 맛이 없다. 물증(物證)만 중시하고 심증(心證)은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기도만 많이 하고 학문을 하지 않으면 부황해지기 쉽고, 반대로 학문만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성품이 속되게 변한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했다. 학문을 어느 정도 연마했으면 마지막에는 이를 버리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이 순서라는 말이다. 광태는 타고난 명민함에 이산 저산을 순례하면서 기도와 선정의 묘미를 터득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되면 쌍권총을 찬 격이다. 제산의 지리산 시대를 계산해 보니, 대략 10년 정도 된다.  31세에 결혼하면서 지리산 시대를 마감하였다고 보면, 대략 20대 초반부터 30세까지 지리산 일대를 방랑한 셈이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는 말이 있듯이 "제산을 키운 것은 8할이 지리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박정희의 제안 "함양군수를 시켜 주마"

제산의 지리산 시대에서 1가지 주목할 점은 박대통령과의 만남이다. 제산은 지리산 시절 중엽인 22~30세 무렵, 군대에 갔다 와야만 했다. 그가 군대생활을 한 곳은 부산의 군수기지였다고 전한다. 필자가 정확한 기록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제산은 부산의 군수기지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 장군과 인연을 맺었던 것 같다.

그 시기가 1950년대 후반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제산은 졸병으로 군대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령관인 박정희 장군과 졸병이었던 제산이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운명"이 작용했을 것이다. 비록 계급으로는 졸병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의 운명을 감정하는 데서는 이미 경지에 올라 있던 제산은 박장군과 계급을 떠나 인간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군대 계급으로 따지면 장군과 일등병의 관계였지만, 운명이라는 주제를 앞에 두고는 카운셀러와 내담자의 관계로 전환되었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역술가 앞에서 운명을 문의할 때는 지도받는 학생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제산은 이때 박장군에게 특별한 운명을 예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은 장군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제왕이 될 수 있는 운명의 소유자"라고 말이다. 박장군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점쟁이 일등병의 헛소리로 흘려서 듣지 않고, 상당히 현실성 있는 예언으로 받아들였다. 후일 제산이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박장군과 자신은 사석에서 만나면 형님, 동생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5·16 이후에는 박대통령이 제산에게 함양군수를 한번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제산은 가끔 "박대통령이 나에게 함양군수 하라는 것도 거절했다. 그까짓 함양군수하면 뭐하나? 이렇게 산으로 돌아다니며 사는 것이 훨씬 자유롭지!"라는 이야기를 주변 친구들에게 털어놓곤 하였다.

6. 남산 다녀온 후, 한동안 기관원 공포증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상생(相生)의 관계로 몰고 가지만은 않았다. 도가의 경전인 "음부경(陰符經)"을 보면, "은생어해 해생어은(恩生於害 害生於恩)"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원수에게서 은혜가 나오고, 은인으로부터 원수가 나온다는 뜻이다. 은인이 원수가 되고 원수가 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1950년대 후반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이미 제산의 신통력(?)을 파악했던 박대통령은 70년대 초반 10월 유신을 감행할 무렵 제산에게 사람을 보낸다. 유신을 하려고 하는데 유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때 박대통령의 지시로 찾아온 사람이 청와대의 S비서관이었다고 한다.  S비서관은 제산을 찾아와 "유신(維新)"의 앞날에 대해 점괘를 물어보았다. S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산은 담뱃갑에 "유신(幽神)"이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저승 "유(幽)"자에 귀신 "신(神)"자 아닌가. 만약 "유신(維新)을 하면, 그 결과는 저승의 귀신이 된다"는 무서운 의미의 예언이었다. 그러자 S비서관은 제산이 끄적거린 담뱃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S비서관의 이 모습을 무심히 보고 있던 제산은 순간적으로 "아차, 내가 실수했구나"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다고 한다. 제산은 비서관에게 그 담뱃갑을 가져가지 말고, 그냥 두고 가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S비서관은 "설마 제가 이 담뱃갑을 박대통령에게 보이기야 하겠습니까?"면서 주머니에 챙겨 집을 나갔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있다가 건장한 기관원들이 제산을 잡으러 왔다. 비서관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대통령이 격노했던 것이다. 제산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며칠 동안 죽도록 얻어맞았다. 기관원들은 팔을 뒤로 묶어 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1970년대는 민주투사만 남산 지하실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솔바람이 키워냈던 박도사도 초대 받아야만 했던 시대였다. 중생이 고통 받는데, 도사라고 어찌 무사 하리오! 역사라는 쳇바퀴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치를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깨닫는 중이다. 그러니 사회과학자들이여, 역술가들은 역사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너무 몰아붙이지 마시라! 남산 지하실을 방문한 뒤 제산은 내면의 상처를 입었다. 이른바 기관원 공포증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 가운데 혹시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 기관원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였다. 실제로 많은 기관원들이 제산을 찾아와 별의별 테스트를 하기도 하였다.

7. 가야산의 해인사 시대와 결혼

제산의 일생을 놓고 볼 때, 지리산 시대 다음에는 가야산의 해인사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를 마치고 다시 지리산에서 공부하던 제산은 집안의 강권에 의해 결혼해야만 했다. 장손이어서 씨는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31세 때 결혼하였다. 그러나 신혼살림을 몇 달 한 후, 다시 산으로 간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부인에게 "나는 산으로 가야 한다. 미처 끝내지 못한 공부를 해야 하니 나를 놓아 주어라"하고 해인사로 들어간다. 

함양에서 해인사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해인사가 어떤 절인가. 한국의 삼보사찰 아니던가. 순천 송광사가 국사가 많이 배출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면, 양산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보사찰(佛寶寺刹), 그리고 합천 해인사는 불법의 총체인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이다. 삼보사찰 가운데서도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기강이 엄하기로 유명하다. 예비 스님 과정인 행자생활에서도 해인사에서 행자생활 했다고 하면 제대로 한 것으로 친다. 해인사 행자생활이 다른 절의 행자생활보다 배는 힘들다고 한다. 행자뿐만 아니라 해인사 주지 노릇 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소문나 있다. 그만큼 원리원칙과 법대로 하는 해인사 가풍이다. 

그래서 일반 스님들도 해인사에 들어가면 바짝 긴장한다. 머리 깎은 스님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머리 기른 유발(宥髮)처사는 어떠했겠는가. 사실 머리 기른 처사들은 해인사에서 잘 받아주지도 않는다. 출가 수행자의 청정 공부 도량에 유발 처사들이 머무르면 엄격한 가풍이 흐려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명리를 연구하던 제산의 노선은 불가의 입장에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외도(外道)에 해당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제산은 해인사의 허락을 받아 장기간 머무를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하숙비를 지불하지 않는 무전취식이었지 않나 싶다. 유발처사(有髮處士)가 한국에서 가장 규율이 엄한 사찰인 해인사에 장기간 머무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천대를 받았다. 그렇게 어정쩡한 신분으로 머무르는 과정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8. 살인범은 "일목탱천 목자지행(一木撑天 木子之行)"이라!

참고로 제산은 31세이던 1965년에서 36세이던 71년까지 해인사에 머물렀다. 이 기간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살인사건이란 바로 20대 중반의 처녀가 해인사 경내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늦가을 이른 아침 장경각 밑에서 낙엽을 청소하는데, 낙엽 밑에서 처녀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사찰 경내에서 처녀 시체가 발견되자, 해인사는 발칵 뒤집혔다. 범인은 누구인가? 

관할 합천경찰서에서는 매일 해인사 스님들을 한명씩 경찰서로 호출하여 알리바이를 심문했다. 매일 돌아가면서 스님들이 합천경찰서로 출두해야 하는 상황이 1달이 넘게 계속되었다.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니, 계속해서 스님들을 취조할 수밖에. 이러다 보니 해인사의 청정한 수행 가풍이 잘못하면 망가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애가 타는 상황에서 홀연히 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자청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제산이었다. 뒷방 요사채에서 밥이나 축내던 처사가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고 자청해 나섰던 것이다. 제산은 "이 사건은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동안 축적되었던 냉대의 설움을 한 순간에 만회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는 선언이었다. 

"내가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단 1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아무개 총무 스님이 가사장삼을 입고 공손하게 큰절을 3번 해야 한다.  총무 스님이 3배를 하고 난 후, 지필묵을 나에게 바치면, 그 붓으로 사건의 해결책을 써줄 것" 이라고 큰소리쳤다. 총무 스님의 삼배를 요구한 이유는 당시 해인사 총무를 맡았던 아무개 스님이 평소 제산을 천대했기 때문이었다. 해인사 측에서는 달리 해결 방도가 없었으므로 오만방자한 이 처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산이 정식으로 총무스님의 3배를 받고 난 후 붓으로 써준 글씨는 다음과 같다. "일목탱천 목자지행(一木撑天 木子之行)". 

탱(撑)자는 "버팀목 탱"자다. 해석하면,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하는데, 목자(木子) 즉, 이(李)씨의 소행"이라는 뜻이었다.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한다는 의미는 바로 목수를 지칭한다. 목수는 나무 기둥을 세워 천장을 지탱하는 업종에 해당한다. 그 목수 중에서도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범인이라는 뜻이었다. 목수를 찾아보니, 사건 1달 전에 대웅전 보수공사를 하느라 목수들이 해인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공사가 끝난 후 목수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그 목수들 가운데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수소문 해본 결과 한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합천 경찰서에서는 즉시 형사대를 서울로 급파해, 이 씨 성을 가진 목수를 체포해 심문하였다. 알리바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씨 성을 가진 젊은 목수는 살인을 자백했다. 죽은 처녀는 목수와 사귀던 여자였고, 변심할 기미를 보이자 해인사로 찾아온 애인을 그만 충동적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9.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인연을 맺다.

이 일로 해서 제산의 명성은 경상도 일대에 널리 퍼졌다. 해인사에 "천출귀재"(天出鬼才,하늘이 내린 귀신같은 인물)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제산을 만나기 위해 많은 인파가 해인사로 몰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50대 중반의 남자가 제산을 만나러 왔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자신을 부산 자갈치시장의 갈치장수라고 소개한 남루한 행색의 그 남자는 제산에게 다른 사람의 사주팔자를 물었다. 자신은 권 아무개라는 사람의 심부름을 왔으니, 그 권 아무개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였다. 권 아무개라는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들여다보던 제산은 갑자기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보아하니 여기 써 있는 권 아무개가 바로 너구나! 네가 권 아무개지? 너는 대구검찰청에 있는 검사장이지? 나를 떠보려고 변장하고 왔구나.  네 놈이 검정고무신을 신고 와서 갈치장사를 한다고 하면 내가 속을 줄 알았나?  네 이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나를 시험하느냐!" 라면서 내리 호통을 쳤다.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 권 아무개 검사장은 망신만 당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산은 격한 감정의 소유자라서 자신의 비위에 안 맞으면 직설적인 육두문자로 감정을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렇지만 뒤끝은 전혀 없었다. 권 아무개 검사장은 제산의 신통력을 혹독하게 체험하고 나서, 평소 친분이 있던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해인사 갔다 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제산은 한국 최고의 재벌 회장인 이병철 회장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이병철과 제산. 당대 그 분야 최고수의 만남이었다. 사판(事判)의 대가이면서, 남달리 이판(理判)에도 관심이 깊었던 이회장은 젊은 제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일반에서는 삼성의 각종 인사, 특히 중역급 이상의 고위 인사에 알게 모르게 제산이 많이 관여했던 것으로 회자된다. 물론 소문으로만 전해지니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다른 재벌 그룹에 비해 삼성맨 가운데 유달리 배신자가 적다는 항간의 이야기는 인사를 채용할 때, 이판(理判)과 사판(事判) 양쪽으로 치밀하게 검토한 이회장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러한 이판 참모 가운데 하나가 제산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무렵 이회장이 제산에게 부산에 있는 5층짜리 빌딩을 사준 것은 사실이다. 물질 가는데 마음 간다고 5층짜리 빌딩을 사줄 정도로 이회장은 제산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만큼 후하게 대접했던 것 같다. 재벌 회장 가운데 이회장만큼 역술가들에게 대접을 후하게 해 주었던 인물도 따지고 보면 드물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