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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일반ㆍ명리학

역술인 ⑤ 1대 백운학 (白雲鶴) : 박유붕 (朴有鵬ㆍ1806~1866)

by 당대 제일 202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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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백운학 (白雲鶴)"은 신라시대에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구한말 대원군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1대 백운학"은 "박유붕 (朴有鵬ㆍ1806~1866ㆍ60세)"으로,  조선 철종~고종 때 관상가이며, 관상의 대가(한국 관상가의 대표)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興宣大院君ㆍ李昰應ㆍ1820~1898ㆍ77세)"이 살던 "운현방(현재 운현궁 자리)"을 찾아가, 마당에서 팽이를 치고 있던 도련님에게 "상감마마 절 받으십시오."하고 땅바닥에서 큰절을 올린다. 그가 바로 "고종 (高宗ㆍ26대 왕ㆍ대한제국 초대 황제1852~191967재위 1863~1907)"이다.

 

1. 박유붕 (朴有鵬ㆍ1806~1866ㆍ향년 60세ㆍ경북 청도군 출생)

고기를 잡아 파는 "백정ㆍ사주 관상 점쟁이"라면, 조선시대 "천민(賤民)" 중에서도 가장 천박(淺薄)한 천민으로 알려져 왔다. 그는 젊었을 때,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있던 "일허선사(一虛禪師)"를 만나, 관상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신상전편(神相全篇)"을 사사(師事)받았다. 

백운학은 일찍이 관상에 소질을 보였던 모양이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스승인 "일허선사"로부터 애꾸눈이 되면 더욱 신묘하게 관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멀쩡했던 한쪽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송곳" 혹은 "젓가락"으로 찔렀다고도 하며, 아예 "담뱃불"로 지졌다는 말도 전해 온다. 그러한 대가를 치르면서, 백운학은 관상의 깊은 경지로 들어갔던 것 같다.

조선후기 철종 때, "흥선대원군"의 2째 아들(명복)의 관상을 보았는데, 왕이 되실 귀한 재목이라고 말했고, 그의 말대로 "명복"은 13세에 "고종"이 되었다. 그의 "관상" 보는 실력에 감탄한 "흥선대원군"은 복채로 "서울 삼선교에서 돈암동"까지의 토지와 "언양현감"의 관직을 주었고, 그 후 "정3품 당상관"인 "조수영 수사"까지 벼슬을 하였다. 

어느 날, "대원군"이 며느리 감으로 "명성황후"를 데리고 왔는데, "명성황후"의 관상을 본 그는 혼인을 반대를 했다고 한다. 계속 반대를 하자, "흥선대원군"은 "당신이 며느리를 보냐"며, 화를 냈고 이를 계기로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멀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명성황후" 쪽에서 그에게 관상을 보아 달라며, 사람을 보냈다. 거기에 가면 결과적으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는 계속 미루다가 결국 "인두"로 나머지 한쪽 눈을 지졌고, "눈이 멀어 관상을 볼 수 없다"며 자신의 운명을 피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얼마 후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주특기 : 지인지감(知人之鑑)

구한말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뒤, 가장 고심한 것도 사람을 판별하는 일이었다.  이때 "대원군"이 고용한 책사가 "박유붕(朴有鵬)"이라는 인물이었다.  "대원군" 옆에 앉아서, 내방객들의 얼굴과 행동거지를 보고, 그 성격과 주특기를 판별해주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전자고택 (田字古宅)

"전자고택"에는 훈훈한 미담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집이 99칸"으로 지을 때는 많은 목재가 필요했다.  문제는 어떻게 많은 목재를 조달하느냐에 따라, 집을 잘 건축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어, 어려웠는데, 이 집에서는 사람을 시켜, 산 주변의 "소나무"에다가 금액을 써 붙이기 시작했다.  작은 나무 1냥, 중간 나무는 2냥, 큰 나무 3냥, 이런 식으로 기록하고, 이 소나무를 운반만 해주면 써진 금액대로 돈을 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무만 가져다주면, 돈이 생기니까 신이 났다.

대개 다른 집 부자들은 돈을 주지 않고, 권세를 힘입어 공짜로 노동력을 이용하였지만, "박유붕"의 집안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적선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1950년 6ㆍ25전쟁 때, 다른 부잣집들은 모두 불에 타 없어졌지만, 이 고택은 훼손하나 되지 않고,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2. "흥선대원군"과의 만남ㆍ백운학의 탄생

청도에서 "관상수업"을 마친 백운학은 어느 날 한양으로 올라온다. 당시 대원군이 살던 "운현방(현재 운현궁이 있는 자리)"을 찾아가, 마당에서 팽이를 치고 있던 도련님에게 "상감마마 절 받으십시오."하고 땅바닥에서 큰절을 올린다. 

13살 먹은 어린아이에게 임금이라면서, 큰절을 올렸다는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하도 황당해, 애꾸눈 백운학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는다. 백운학이 말하기를 "제가 한양에 와서 보니 이곳 운현방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음을 보았습니다. 저기서 팽이를 치고 있는 명복 도련님은 제왕(帝王)의 상을 갖춘 분이라서, 큰절을 올린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백운학은 대원군에게 복채를 요구했다. 대원군이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고 묻자, "제왕의 상을 보았는데 3만 냥은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달라는 것이 아니고, 4년 후에 주시면 됩니다."고 했다. 3만 냥이면 엄청난 거액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원군은 돈이 없던 시절이라 복채를 곧바로 줄 수는 없었고, 약속어음 비슷한 증서를 백운학에게 써 주었다고 한다.

과연 그로부터 4년 후 "명복"도련님은 "고종"으로 즉위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백운학은 복채를 받기 위해 대원군이 써준 어음을 들고 "운현방"으로 찾아갔다. 대원군을 찾아갈 때, 백운학은 당나귀 4마리를 끌고 갔다고 한다. 당나귀 4마리는 3만 냥의 엽전을 싣기 위한 용도였음은 물론이다.

3만 냥의 복채 외에도 백운학은 대원군에게 벼슬을 요구하였는데, 벼슬도 못하고 죽으면 신위(神位)에 "현고학생(顯考學生)"이라고 써야 하니, 학생(學生)을 면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백운학은 복채로 3만 냥과 함께 "청도 현감"이라는 벼슬까지 받았다고 하니, 배포 한번 대단했던 셈이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백운학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이후 조선팔도에는 수많은 가짜 백운학이 탄생하게 된다.

3. 생 애

젊은 시절부터 "관상ㆍ점술"을 공부하였으며, "매천야록"에 의하면, 스승인 "일허선사"로부터 애꾸눈이 되면 더욱 신묘하게 관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송곳" 혹은 "젓가락"으로 찔렀다고도 하며, 아예 "담뱃불"로 지졌다는 말도 전해 온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가 장가간 처가가 "명나라 무장 두사충(杜思忠)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두사충"은 "명나라 기주자사 두교림(杜喬林)"의 아들로 "상서 벼슬"을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조선"의 원병요청으로 출병이 결정되자, "이여송(李如松)ㆍ진린(陳璘)"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왔다가 "조선"에 정착하게 되었다. "두사충"은 당대 "풍수ㆍ점술ㆍ관상"의 일가를 이루었던 사람으로, "조선"에 정착한 뒤 자신의 "풍수ㆍ점술ㆍ관상"에 대한 지식을 정리한 "비전서(秘傳書)"를 남겼다고 한다. 그가 조선에 남은 것도 "명나라가 곧 청나라에 멸망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어쨌든 "박유붕"은 "처가"에서 전해지던 이 책들을 입수하여 공부하였고, 이로써 장안 제일가는 "관상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매천야록"에서 1가지 잘못 기록하고 있는 것은, "박유붕"의 처가의 본관을 "만경두씨(萬頃杜氏)"라고 쓰고 있는데, "두사충"의 후손은 고향인 "중국 두릉(杜陵)"을 본관으로 삼아 "두릉두씨(杜陵杜氏)"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사실과는 다르다. "만경두씨"는 고려 무인정권시대의 "무장 두경승(杜景升)"을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지금의 "김제"인 "전주 만경현"이 본관지이다. "두경승"의 후손은 이 "만경현"을 본관으로 분파하기도 했고, 일부는 그대로 "두릉두씨"에 남았지만, "두경승"의 후손과 "두사충"의 후손은 따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당시 "황현"이 뭔가 착각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항간에 알려진 이야기가 잘못되었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궁도령 흥선대원군"을 돕다

"철종 조, 안동 김씨"의 세도 말기에 아직 "궁도령"이라 불리며, "안동 김씨"로부터 모욕을 받던 "흥선군 이하응"에게 "곧 천하가 쥐어 잡힐 것"이라 점치고, "운현궁(흥선군의 사가)"을 찾아간 그는, 제기를 차고 놀고 있던(팽이치기를 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흥선군"의 2째 아들 "명복"의 관상을 보고 그 자리에서 "상감마마!"라고 외치고 엎드려 절했다. 이에 놀란 "흥선군"이 그를 불러들여 사정을 묻자, 박유붕은 "운현궁에 왕기가 서렸기에 찾아뵈었더니, 둘째 아드님께서 제왕의 골상을 타고 나셨음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야심을 숨기고 있던 "흥선군"이 흥미를 가지고 그게 언제쯤일지 물었더니, 박유붕은 "앞으로 4년 뒤일 것"이라고 말했다. "흥선군"은 그것을 반신반의하며 관상을 보아주었으니, 복채를 주어야 할 것인데, 자신은 "궁도령" 신세이니 어찌하겠느냐 농을 하였다. 그러자 박유붕은 "자신의 말대로 될 것이니, 4년 뒤에 받으러 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것도 아닌 제왕의 관상을 보았으니, 최소한 3만 냥은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흥선군"은 이 말을 제대로 믿지 않았다.

그런데 4년 뒤인 1863년, "흥선군"과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조씨)"의 합작으로,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이 "철종"의 뒤를 이어, 새 왕으로 즉위했는데, 이가 곧 "고종"이다. "흥선군"이 "신정왕후"를 만나, 암암리에 인맥을 쌓았던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박유붕"의 말대로 된 것이다.

 "흥선 대원군" 섭정기

"고종"이 즉위하고 얼마 뒤, "박유붕"은 "대원군"으로 올라선 "이하응"을 찾아가, 약속했던 3만 냥을 받으러 왔다고 말한다. "박유붕"의 지인지감에 탄복하고, 그를 곁에 두고 싶었던 "흥선대원군"은 박유붕을 자신의 "책사"로 두었고, "운현궁" 바로 옆에다 "45칸 저택"을 마련해주었으며, "수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넓은 땅도 내려주었다. 이를 시작으로 박유붕은 "흥선대원군"을 "잠저"시절부터 모셔오던 "중인 4인방(천하장안)"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심복으로 활약하였고, 이때부터 별호인 "백운학"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복채를 받으러 왔을 때, "죽고 나서 신위에 현고학생부군이라고 쓰여질 것이 싫으니, 나리께서 벼슬 하나 내려주시어, 학생 신세 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제사를 지내면 알겠지만, 벼슬이 없는 남자는 죽어서 신위에 "학생(學生)"이라고 쓰도록 되어있다. 배우는 입장의 "학생"이 아니라, "벼슬 못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박유붕은 1864년(고종1) "언양현감"에 제수되었다. 지금은 "자수정ㆍ한우"로 유명한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이다. 이를 시작으로 "박유붕"의 출세 길이 열렸는데, "언양현감"을 지낸 뒤, "남양부사"로 옮겼다가 이후 여러 현직을 거쳐, "정3품 당상관"의 품계를 받았다. "점쟁이"로서는 유례없는 관직행보였다.

4. 의문의 최후

그러나 곧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멀어지는 계기가 일어나는데, 나중에 "명성황후"가 되는 "민자영"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오랜 시간동안 외척이었던 "안동 김씨"의 세도를 척결한 뒤, 다시는 "외척의 발호가 없는 조정"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고종의 중전 후보"로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민치록"의 딸인 민자영(명성황후)"를 점찍어두고, "박유붕"에게 관상을 보게 했다.

그러자 "박유붕"은 장래 "흥선대원군"의 앞을 막게 될 것이라며, 3번이나 반대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박유붕"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으며, "내 며느리를 뽑는 게지, 자네 며느리를 뽑는 거라든가?"라며, 역정을 냈으며, 결국 새 중전은 "흥선대원군"의 뜻대로 "민자영"이 간택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앞길을 흐리게 하는 시초가 된다. 하지만 "지인지감"으로는 "박유붕"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기에, "흥선대원군"은 여전히 "박유붕"에게 의견을 물으며, 곁에 두었다.

그러나 "박유붕"의 화려한 경력은 곧 끝나게 된다. "중전 민씨(민자영ㆍ명성황후)"와 "고종"의 사이는 처음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것은 "고종"이 연상의 "궁녀"를 총애하는 등, "중전"을 등한시했기 때문이었다. "중전 민씨"는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고종"의 마음은 "중전"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박유붕"은 처음 반대 입장이었던 "중전 민씨"와 "운현궁" 사이의 절충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균형은 1868년에 깨지게 되는데, "귀인 이씨(영보당 이씨)"가 "고종"의 "서장자"이자 첫 아들인 "완화군(完和君)"을 낳은 것이다. "완화군"을 총애한 "고종흥선대원군"은 "완화군"을 "원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박유붕"은 "완화군"의 명이 길지 않음을 알고, "중전 민씨"의 편에 가까운 입장을 표하며, 사실상 반대를 하게 된다. 이에 노한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박유붕"을 관직에서 추방했으며, "흥선대원군"에게서 버림받은 "박유붕"은 자신의 시대가 다 되었음을 알고,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한편 일설에 의하면, 그의 죽음은 "명성황후"가 중전으로 간택되던 그 시점을 전후해서라고도 한다. 장래 시아버지가 될 "흥선대원군"의 눈에는 들었지만, 결정적으로 관상의 대가였던 "박유붕"에게 반대당하는 것이 꺼림칙했던 "명성황후" 측에서 사람을 보내 사정했으나, "박유붕"은 나머지 한쪽 눈을 마저 지지고 장님이 되어, 더 이상 관상을 볼 수 없다고 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다고도 한다.

"매천야록"에도 그가 "한쪽 눈을 마저 지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박유붕"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예감하자, 주저앉고 장님이 되는 것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관상가"로서의 삶을 스스로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점쟁이"로서의 길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박유붕"이 버림받은 뒤, "완화군"은 그대로 "원자"에 책봉될 듯 했지만, "중전 민씨" 측의 견제로 불발로 끝났고, 이후 "완화군"은 1880년 13살의 나이에 병을 얻어 요절하고, 생모인 "영보당 이씨"도 충격에 뒤를 따르듯 병으로 죽었는데, "박유붕"의 우려는 실현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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