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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일반ㆍ명리학

역술인 ⑥ 2대 백운학 (白雲鶴) : 이종우 (1921~1979ㆍ58세)

by 당대 제일 202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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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백운학"은 "이종우 (1921~1979ㆍ58세)"로, 전설적인 관상 대가(觀相 大家)ㆍ20대 후반부터 서울 종로 5가(제일여관(1950~70년))에서 활동했다. 관상을 잘 본다고 이름이 알려져, 정ㆍ재계 고위 인사들도 그를 찾았다. "원조 백운학"은 따로 있는데, 구한말 "고종"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했다는 "박유붕 (朴有鵬ㆍ1806~1866ㆍ60세)"이며, 그를 따라 "백운학"이라 이름 붙인 "관상ㆍ작명가"가 여럿 나왔다.

 

1. 이종우 (1921~1979.01.01향년 58)

출 생 :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사 망 : 서울 신설동            사 인 : 급사 (심장마비)            : 청산 (靑山)             : 주갑순 (미즈모아 산부인과 원장 (서울 광진구 소재))             자 녀 : 3             가 족 : 아버지- 이세기(李世基)32녀 중 3            

활 동 : 제일여관 (1950~70년대종로5)             경 력 : 서도여정(書道旅程) 30년에 명필의 칭호"고려정사"란 절 건립(오사카 근처)              스 승 : 한용운 (만해)             친 구 : 이갑성 (독립운동가)

정치ㆍ경제ㆍ종교 등 지도자들과 친분관계가 두텁고, 붓글씨에 능통하며, 민초들을 위한 선행을 많이 행하였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관상가들이 "청산 백운학"과의 친분관계를 내세울 정도로 "관상학"의 대가이다. 평소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 항상 집에 사람들이 들끓었으며, 밥해주기 바빠서, 유명한 것에 비하여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지나가는 어떤 물건 파는 사람의 것을 모두 산 적이 있는데, 왜 모두 샀냐고 묻자, 이 사람의 오늘 운이 좋아 보여, 모두 샀다고 하였다. (실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산 것임)

백운학(이종우)의 부모님이 충북 진천군에서 안성으로 이사를 와서, 구 군청자리에서 살다가, 금광면으로 이사를 하였으며, 백운학은 금광면에서 태어났다. 금광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용인 송정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집안의 소개로 주갑순(미즈모아 산부인과 원장)과 결혼하였고, 슬하에 3녀를 두었다.

여기저기 백운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관상가가 하도 많아서, 1990년대 중반 정보기관에서 전국의 백운학이 과연 몇 명인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조사된 숫자가 2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광주에서는 3명의 백운학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웃지 못할 사실은 그 3명의 백운학이 모두 같은 빌딩에서 영업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로 자기가 진짜 백운학이라고 주장하였음은 물론이다.

2. 운명감정 입문계기

일찍이 부친으로부터 가학인 한학과 서예를 배우니, 재기가 출중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서울에서 중학교육을 받았으며, 일제의 식민정책에 불만을 품고, 만해 한용운 선생(독립운동가, 불교계 지도자)을 찾아가서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의 경과 선을 배우면서부터 관상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10대 후반부터 "마곡사ㆍ해인사ㆍ통도사" 등에 칩거하면서, 고승대덕들에게 영향을 받아, "인생의 운명론"에 몰입하였고, "주역ㆍ관상학"의 대가에 오른다.

그리고 20살이 되기 전에 해방을 맞아, 본격적으로 "운명감정"에 뛰어든다. 일제시대부터 미래를 내다보거나 관상을 보는 일에 탁월한 소질을 보여, 종로구에 사무실을 차리고 독립운동가 이갑성과 막역한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해방이후 반일감정이 들끓을 때, "일본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ㆍ일 친교회"를 만들어 초대회장 역임.(당시는 한ㆍ일 수교전이라 주위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예지능력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이 사이가 좋아질 것을 알고 추진한 것임) 친교회장을 맡으면서, 일본에 끌려가 한을 품고 죽은 한국인을 위해, 오사카 근처에 "고려정사"란 절을 건립하고, 후원으로 서예작품 3,000점 기증하였다.

3. 일화

 5ㆍ16쿠데타 관련

김종필이 5ㆍ16쿠데타 직전, 후배 "석정선"과 같이 점을 보러 갔을 때, "석정선"의 관상을 보다말고 문밖에서 기다리는 "김종필"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혁명하시누만" 김종필은 거의 반사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누굴 죽이려고 그러시오?"

"다 됐어요. 걱정 마시오. 혁명하겠다고 얼굴에 다 씌어져 있는데 뭘 그러시오. 내 관상은 볼 필요가 없어요. 그 친구나 잘 봐주시오" 백운학은 "석정선"을 쳐다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허, 그거 파쇼. 네발 달린 거 가지고 다니누만, 그게 사람 죽여요. 빨리 파시오.  옷은 이렇게 입고 왔지만, 당신네들 중령, 아니면 대령인데, 아직 관록(官祿)을 먹고 살 사람이니까 자동차 같은 거 손대지 마시오."

 5ㆍ16쿠데타 관련 : 김종필(JP)의 증언

• 왜 옛날에 백운학이라고 있지. 혁명 전 일요일, 석정선(JP와 육사8기 동기생으로 먼저 예편해, 택시운수업을 하다가 JP의 권유를 받고 5ㆍ16에 참여)이가 찾아왔기에 "야, 너 혁명 같이하자" 그랬더니, "난 못하겠다."고 해.  그래서 "알았다. 못해도 좋으니까 일절 말 내지 마라" 그랬지."

• 그런데 "석정선"씨가 왜 운수업을 관두고, 혁명에 참여하게 됐습니까?  "석정선이 자동차 사업 했는데, 무슨 사고가 자꾸 나서 그런지 "유명한 관상쟁이한테 물어봐야겠다."며 나를 끌고, 종로5가 제일여관을 빌려 쓰고 있는 어떤 집에 데려 가더만.

 관상쟁이가 백운학인지 누군지 난 몰랐지. 난 사복을 입고 갔고. 술집 여자들이 댓 명씩 앉아서 교대교대 관상을 보고 그러드만.  석정선 차례가 와서, 썩은 대청마루에 올라가 백운학 앞에 앉았고, 나는 관계없으니까 저쪽 복도에 앉아서 그냥 있었지.  근데 백운학이가 석정선은 안 보고,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됩니다!"하고 소리를 쳐.  내가 "뭐가 되느냐" 했더니, "허~" 웃는 거라.  "천하를 뒤집으려는데 됩니다."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니 여보, 사람 죽이지 말라"고 딱 잡아뗐어. 그래도 계속 "허허"하고 웃데.  그러곤 앞의 석정선이 한테 "당신, 그거 바퀴 달린 거 팔아. 이번엔 사람 죽여." 이러대.  내가 오싹했어. 딱 바퀴라고 하는 거야. 석정선이 운수사업 하는 걸 알았던 거지.  이번엔 쪼그만 사고, 그런 거 아니라 사람 죽인다고, 그런 말을 한 거야."

• 그런 일이 있었군요.  "혁명하고 내가 백운학을 데려다 저녁을 먹였는데, 이번에도 "가만히 보니까 88세는 사시겠어요." 그러는 거야." 

• 백운학이 그랬단 말입니까?  "그게 88세? 조금 넘기겠어요, 그러드만.  나는 "그러면 천수를 다하는 거지"하고 웃었던 기억이 나네.  그게 진짜라면 4년 남았는데. 하하하. 근데 백운학이는 일찍 죽었어."

 박정희 운명 관련

하루는 정보기관에서 찾아와 비분강개하며, 시국에 정치에 관하여 향후 전망을 하교하기를 바란다고 하자 "박정희 정권의 운이 다 되었다.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고 그의 말년 운명이 평탄치 못하다.  바둑으로 말하면, 유신은 자기 목을 조이는 악수를 둔 것과 같다"고 말해 정보기관에 끌려 간적이 있다. 이 때, 자신을 위장하여

"아이쿠 선생님. 미련하고 아둔한 곰 같은 이놈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간밤에도 반성하느라고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제가 무슨 실력이 있겠습니까?  서당 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 했는데, 저는 쥐꼬리만한 귀동냥 상식을 가지고, 남의 인생 상담과 감정을 해왔으니, 이 모두가 잘못된 일입니다." 라고 거짓행세를 하였는데, 이때 평소에 인연을 맺은 고객 중 고위급 간부가 있어 겨우 풀려난 적이 있다.

 기업 관련

삼성의 자문역할을 하여, "에버랜드" 위치를 잡을 때, 항공 촬영한 사진을 백운학에게 보여주어 확인을 받았다고 한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본명을 "태준"에서 "태수"로 바꾼 것, 세무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철강업에 뛰어든 것, 4남 "한근"의 이름에 사용한 한자를 "翰根"에서 "瀚根"으로 바꾼 것에는 백운학의 권고가 있었다.

 자유당 정권 관련

자유당 시절에 야당인 민주당의 편을 들어, 그 유명한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선거 구호를 지어냈다는 설이 있다. "신익희"에게 "서울을 떠나면 변을 당한다."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신익희는 "호남 유세"를 떠났다가, 열차 칸(충남~전북(기차 안))에서 급사(뇌일혈(또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4ㆍ19 직후, 이승만 박사가 다시 돌아온다고 예언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우려의 눈길로 보았는데 결국은 죽어서 다시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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