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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 : 2차 대전ㆍWorld War 2ㆍ1939.09~1945.09 (5년)

by 당대 제일 2022.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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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은 1939.09.01~1945.09.02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독일이" 온통 다른 나라로 둘러쌓여 사방을 경계해야 하고, 바다를 통한 진출로 역시 가로막혀 있어서였다. 강대국 지위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유럽 패권을 지배하려면, 이런 "지리적 열세를 극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ㆍ아래로 "캐나다ㆍ멕시코", 동ㆍ서에 바다를 끼고 있는 "미국"을 가장 부러워하면서도 두려워했다.

 

1. 2차 세계대전 (World War 2ㆍ1939.09.01~1945.09.02)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09.01~ 1945.09.02일까지 치러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이고 치욕스런 전쟁이다. 일반적으로 개전일은 "1939.09.0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2일 후의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 포고"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서는 기존의 학설인 1939.09.01일을 개전일로 정한다.

종전일의 정확한 날짜도 합의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 제국"의 공식적인 항복일인 1945.09.02일보다는 "휴전 협정을 체결(대일전 승전기념일)"한 1945.08.15일을 종전일로 보기 때문이다. 일부 유럽에서는 "유럽에서의 승리의 날"인 1945.05.08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까지 체결되지 않았고, 독일에 관한 최종 합의 강화조약은 1990년 "2 + 4조약"까지 체결되지 않았다.

• 일 시 : 1939.09.01~ 1945.09.02          • 장 소 : 유럽지중해아프리카중동전선남북 아메리카동아시아동남아시아태평양대서양인도양 등 전 세계

• 결 과 : 나치 독일ㆍ일본 제국의 패망→ 탈 식민지화ㆍ연합국의 승리ㆍUN 창설ㆍ미국/소비에트 연방이 초강대국으로 성장→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냉전 시작

• 연합국 : 미국ㆍ소련ㆍ영국ㆍ중화민국ㆍ프랑스ㆍ폴란드ㆍ오스트레일리아ㆍ뉴질랜드ㆍ캐나다  / 추축국 : 나치 독일ㆍ일본 제국ㆍ이탈리아 왕국ㆍ헝가리 왕국ㆍ루마니아 왕국ㆍ불가리아 왕국ㆍ타이  /  지휘관 : 연합국- 프랭클린 루스벨트(미국)ㆍ해리 S.트루먼(미국)ㆍ윈스턴 처칠(영국)ㆍ샤를 드골(프랑스)ㆍ이오시프 스탈린(소련)ㆍ장제스(중화민국)  /  추축국-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히로히토 왕(일본 제국)도조 히데키(일본 제국)

• 피 해 : 연합국- 계 : 6,100만 명 이상- 군인사망(1,600만 명 이상)ㆍ민간인 사망(4,500만 명 이상)  /  추축국- : 1,200만 명 이상- 군인사망( 800만 명 이상)민간인 사망( 400만 명 이상)

통상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는 1939.09.01일 새벽 04:45분 "아돌프 히틀러"가 다스리는 "나치"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이 1939.09.17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한 때로 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1937.07.07일 "일본 제국"의 중화민국 침략, 1939.03월 "나치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무기 개발 금지ㆍ국방군 제한" 등을 당하였으므로, 다수의 무기 개발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소련"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공공연하게 "베르사유 체제"의 철폐가 주장되고, "히틀러의 반공 정책"으로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소련과의 협력 관계가 청산되었다.

1945.08.06일과 08.09일, "일본 제국" "히로시마ㆍ나가사키"시에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08.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사실상 끝이 났으며, "일본 제국"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09.02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결과로 동아시아의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고, 그 외에도 여러 제국들의 식민지가 독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는 약 2,500만 명이고, 민간인 희생자도 약 3천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 제국은 1937년 중국 침략 때 "난징"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하여, 겁탈ㆍ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명의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고, "포로 학살" 등 여러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나치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ㆍ집시"를 학살하였다. 그리고 독일은 더 나아가 유럽 거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소련까지도 저 멀리 쫓아냈으며, 영국까지도 총공격을 개시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미국은 1945.03.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소이탄"으로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하여 민간인 15만 명을 살상했고, 1945.08.06일과 09일에 각각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원자 폭탄공격"을 감행하여 약 34만 명을 살상하였다. "영국 공군ㆍ미국 육군항공대"는 "드레스덴ㆍ뮌헨"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도 매우 심했다. 전쟁은 크게 "서부 유럽전선ㆍ동부 유럽전선ㆍ중일 전선ㆍ태평양 전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ㆍ1889~1945.04.30ㆍ향년 56세)

나치독일 총통 (대통령 겸 총리-1934.08~1945.04)ㆍ독일국 총리 (1933.01~1945.04)ㆍ나치당 당수 (1921.06~1945.04)노벨 평화상 후보(1939)ㆍ"독일 출신"이라는 설이 있기도 했지만,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임.

기억력과 직관력이 뛰어났고,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우수한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여 능력을 발휘시킬 줄 알았다. 그러나 특정 인물의 지나친 권력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2명 이상의 인물에게 같은 일을 배당하여 충성 경쟁을 유발시켰다. 그는 세간의 평처럼 미친 사람도, 성격이상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동방대제국의 건설ㆍ게르만족의 동방으로 대규모 진출ㆍ열등한 민족의 전멸ㆍ추방 등 시류에 역행하는 세계관을 고집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대통령ㆍ총통의 변경

1945.04.12일, 미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망→ "해리 S.트루먼"이 대통령직 승계 / 1945.04.28일,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 처형→ 소련 "파르티잔"에 의해

1945.04.30일, 지하벙커에서 독일 "히틀러"가 "에바 브라운(애인)"과 동반 자살 → "칼 되니츠(대 제독)"이 총통 승계ㆍ"히틀러"의 뜻에 따라, "괴벨스(나치 독일 대중계몽 선전장관)"이 총리로 임명

2. 전쟁의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은 이전의 전쟁과는 다르게 정치지도를 크게 변경시켰다. "독일 제국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ㆍ오스만 제국"을 포함한 동맹국은 패배로 인한 해체가 일어났고, 한편 "프랑스ㆍ벨기에ㆍ이탈리아ㆍ그리스ㆍ루마니아" 같은 연합국은 영토를 얻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적백 내전"에서 "볼셰비키"가 승리하며, "러시아 제국"은 붕괴되고, "소련"이 탄생하였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918년)ㆍ오스만 제국(1923년)"이 각각 붕괴ㆍ멸망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인해, "민족 통일주의자ㆍ보복주의자"들에게서 "민족주의"는 유럽에서 중요한 요소로 꼽히게 되었다. "민족 통일주의ㆍ보복주의"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영토ㆍ식민지ㆍ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본토의 13%의 손실ㆍ독일 제국의 식민지"를 모두 잃고, 독일 민족 영토의 합병은 금지되었고, 배상금이 부과되며, 군사의 양과 역량은 제한되었다. "독일 11월 혁명"으로 인해 "독일 제국"이 해산한 후, "민족주의 정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제1ㆍ2차 세계대전의 사이 기간 동안, 새로운 공화국에서는 "우익ㆍ좌익"의 정치 대립이 심해지고 있었다. 협상국인 "이탈리아"는 약간의 영토 획득은 있었지만,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런던 조약"에서 약속했던 영토를 주지 않자, "반 영국ㆍ프랑스" 감정이 심해지게 되었다. 1922~1925년까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는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전체주의자ㆍ국가주의자ㆍ고위 협력자"들을 장악했으며, "사회주의자ㆍ우익ㆍ자유주의자"를 억압하며, 세계적으로는 "이탈리아 제국"을 표방하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에티오피아"를 해방하며 이탈리아의 식민지를 해방시켰다.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독일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했다.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나치당"의 지지도는 올라가고, 1933년에는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에 임명되었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이후, "히틀러"는 "나치당"이 이끄는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었다. "히틀러"는 1923년 독일 정부를 전복하는데 실패했으나, 1933년에는 히틀러의 권력 상승이 이어졌다. 그는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새 질서를 옹호하며, 독일의 재무장을 시작했다. 1935년에는 독일이 "자르 지역"을 합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며, "독일의 재무장"을 공개했다.

"중국 국민당"은 1920년대 중반, 지역 군벌의 토벌과 통일 중국을 목표로 북벌을 시작하지만, "중국 공산당"과의 대립으로 인해 "국공 내전"이 시작된다. 1931년, 점점 "군국주의"로 기울어지는 "일본 제국"은 계속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일본 정부의 아시아지역 지배의 첫 단계로, "만주 사변"을 구실로 만주를 침공하며,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에게 저항을 할 수 없었던 중국은 "국제 연맹"에 도움을 요청했다.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를 발표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1933년 까지 "만리장성"과 "러허성"으로 간간히 전투를 진행하며, 중국과 일본은 "탄구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후, "중국 자원군 세력"은 "만주국 저항전"과 "내몽골 저항전"으로 계속 전투를 이어갔다. 또한 "한국광복군"도 "중국 국민당"을 지원했다.

"프랑스"에게 독일을 재제하는 "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의 "스트레사 체제"는 희망이었다. 소련은 "드랑 나흐 오스턴"으로 인해, "프랑스"와 상호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프랑스- 소련 조약"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국제 연맹"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이것이 "스트레사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1935년 영국에서 독일과 "영국-독일 해군 협정"을 맺으면서, 해군의 규제가 완화되었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일련의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며, "중립법"을 통과시킨다. 10월에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독일은 이탈리아를 지원하는 유일한 주요 유럽 국가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를 흡수하는 독일에게 이의를 걸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ㆍ로카르노 조약"을 깨며, 1936.03.07일 "라인란트"를 점령한다. 그는 다른 유럽 국가로부터 작은 반발을 불려왔다. 1936.07월에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히틀러ㆍ무솔리니" 등 "파시스트"는 "프랑코 정권"을 지원하고, 소련은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했다. 양측 모두 전쟁에서 새로운 무기와 기술을 시험하며, 1939년 초에 "프랑코 정권"이 승리한다. 1936.10월에는 "독일ㆍ이탈리아"가 "로마- 베를린" 축을 공개한다. 1달 뒤, "독일ㆍ이탈리아"가 체결한 "방공 협정"에 일본이 합류한다. 중국에서는 "시안 사건" 이후, 중국 "국민당ㆍ공산당" 간 "제2차 국공 합작"을 시작한다.

3. 결 과

① 제2차 세계 대전 사상자

전쟁의 많은 사상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연구마다 그 수가 다르다. 대부분, 약 6.000만 명이 사망했고, 2.000만 명의 군인과 4.0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많은 민간인이 전염병ㆍ기아ㆍ대학살ㆍ전략 폭격ㆍ제노사이드 등으로 사망했다.

군인 사망으로는 러시아가 5,756,000명으로 1위, 다음으로 우크라이나 민족 1,377,400명이었다.

소련은 전쟁 기간 동안 2,700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하였다.(군인- 870만 명, 민간인- 1,900만 명) "독ㆍ소 전쟁" 중에서는 매일 소련 시민 4명이 사망 또는 부상을 입었다.  독일은 530만 명이 주로 "동부전선"에서 사상자가 나왔다.

전체 사상자의 비율은 대부분 "중국ㆍ소련"이 사망한 연합국이 85%, 추축국이 15%를 차지했다.

이러한 사상자들은 "독일ㆍ일본"의 점령 지역에서 대부분 발생했다. 약 110~ 170만 명의 민간인이 "나치 이데올로기"의 직접적ㆍ간접적 영향으로 사망하는데,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 600만 명, "롬 족" 500만 명, "동성애자ㆍ기타 슬라브 민족"들을 사살했다.  약 750만 명의 민간인이 일본 점령하의 "중국"에서 사망하고, "세르비아인ㆍ집시ㆍ유대인"과 함께 "크로아티아"에서 "우스타샤"로 인해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이후 전쟁 후에는 "크로아티아" 인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

가장 유명한 일본의 잔악 행위에는 약 수백만 명의 중국인을 사망시킨 "난징 학살"이 있다.

약 300~ 1000만 명의 민간인이 일본 점령기에 사망했다.  "히메타 미츠요시"는 "삼광작전"으로 인해 27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오카무라 야스지"장군은 "산둥 반도"의 "헤이페이"에서 이 작전을 구현했다.

② 생물학무기ㆍ화학무기 사용, 민간인 사망

추축군은 "생물학 무기ㆍ화학 무기"를 한정하여 사용했다. 이탈리아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겨자 가스" 만을 사용하나, 일본제국 육군은 "중ㆍ일 전쟁" 당시 여러 다양한 무기를 사용했다.(731부대 참조) 그리고, "할힌골 전투"에도 일부 사용했다."독일ㆍ일본" 모두 민간인에게 무기를 사용하고, 어떤 경우에는 전쟁 포로에게도 실험했다.

추축국은 이러한 추축국의 범죄로 인한 최초의 재판을 받는 동안, 연합국의 전쟁 범죄는 그러지 않았다. 이러한 연합국 범죄의 예로는, 소련의 "인구 이동", 미국의 "킬하울 작전"으로 인한 일본계 미국인 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인 추방", 연합국 점령 하의 "독일인 강간", 소련의 "카틴 숲 학살" 등으로 연합국은 이에 대한 책임에 대해 직면하기도 했다.

기근 사망자의 대다수는 전쟁 중 사망자에 포함될 수 있었고, 대표적으로 1943년 "벵골 대기근", 1944~ 1945년의 "베트남 대기근" 등이 있다. "요르그 프리드리히" 같은 일부 역사학자들은 전략 폭격으로 인해 민간인 사망을 포함하며, 대표적으로는 "도쿄 대공습", 독일 지역에서는 "드레스덴 폭격함부르크 폭격쾰른 폭격"등으로 인해 160개 도시가 파괴되고, 약 6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③ 강제 수용소ㆍ강제노동

나치는 고의적인 "집단 학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홀로코스트로" 인해 유대인 대부분ㆍ2백만 명의 "폴란드 민족ㆍ장애인ㆍ정신 질환자ㆍ소련 포로ㆍ동성애자ㆍ프리메이슨ㆍ여호와의 증인ㆍ롬 민족"을 포함한,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을 포함하여, 약 6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OST 아르바이터"의 대부분인 1,200만 명은 대부분 강제 노동으로 끌려갔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 뿐 아니라, 소련의 "굴락"은 "폴란드ㆍ리투아니아ㆍ라트비아ㆍ에스토니아" 등의 국민 뿐 아니라, 독일의 전쟁 포로도 수감하며, 심지어는 소련의 국민 중 "나치 지지자"로 보이는 시민들도 구류되었다.

전쟁 중, 독일의 소련군 포로 60%가 사망했다. 역사학자 리차드 오버리는 소련 포로 570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전체 시민의 57%가 사망하며, 총 360만 명이 사망했다. 소련의 전 전쟁 포로와 송환된 민간인들은 잠재적인 "나치 부역자"로 인식하고, 그 중 일부는 "NKVD"에 의해 강제 수용소로 구금되었다.

일본의 "포로수용소"는 "노동 수용소"로도 이용되며, 특히 많은 사망률을 보였다. "극동 국제 군사재판"에서 서양의 병사들은 사망률이 27.1%(미군 전쟁 포로는 37%)이고, 이는 독일과 이탈리아인의 포로에 비해 7배가 높았다. 일본의 항복 후, 영국군은 37,583명, 네덜란드인은 28,500명, 미국인은 14,473명이 풀러난 반면, 중국인은 56명만 해방되었다. 역사학자 지히펜 주는 1935~ 1941년 사이에 "중국 북부ㆍ만주"에서 최소한 5백만 명의 중국인이 "동아시아 개발위원회(Kōain)"에 노예가 되어, 광산에서 강제 징용되었다고 주장한다. 1942년 후에 그 수는 1,000만 명을 돌파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자와 섬"에서 400~ 1,000만 명이 "로무샤"가 되어 일본군에게 일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추측한다. 27만 명의 "자와인"들은 "동남아시아"의 다른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52,000명만 "자와 섬"으로 송환되었다.  1942.02.19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여, 수천 명의 일본인ㆍ이탈리아계 미국인ㆍ독일계 미국인ㆍ진주만 폭격 이후 하와이에서 일부 도망친 이민자들이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과 캐나다 정부는 15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에 더하여, 14,000명의 보안적인 위험으로 꼽힌 독일계와 이탈리아계 미국인들도 구금되었다.

"얄타 회담"에서의 연합국의 계약에 따라, "전쟁 포로"와 "민간인" 수백만 명이 "소련"에서 강제 노동을 하였는데, 예를 들어, "헝가리"의 경우에는 1955년까지 "헝가리"인에게 강제 노동을 하였다. 

4. 전쟁 이후

1945.09, "영국미국중화민국소련" 등이 "일본 분할 점령"을 하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08.15일에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이 모두 무산되었다.

"미국소련""독일일본"을 패망시킨 계기로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와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가 발달하는 "냉전"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점령한 "오스트리아독일"에 행정 기구를 설치했다.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이 되었고, 모든 정치 블록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의 "탈 나치화"의 일환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나치" 정치와 관련된 인사를 제거하나, 이 정책은 "사면"으로 바뀌면서, "구 나치 인사"가 재결합하게 된다.

독일 동부의 "실롱스크노이마르크포메라니아" 대부분을 "폴란드"에 할양하고, "동프로이센" 소련에게 할양하였다 900만 명 이상의 독일인을 잃고,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3백만 명 이상의 독일인을 잃었으며, 독일은 전쟁 전의 영토의 4분의 1을 잃었다 또한 독일은 1945"연합군 4개국"에 분할 점령당했는데, 미국과 소련의 정치상 대립으로 인해 동과 서로 나누어지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영국프랑스미국이 점령한 쪽에서는 "독일 연방공화국", 소련이 점령한 쪽에선 "독일민주 공화국"으로 탄생했으며, "베를린" 위기가 벌어지고 자유를 찾아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서 1950년대에, 서독의 5분의 1은 동독에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소련은 "베를린 장벽"을 쌓고 군사를 감시하게 했다 그리고 "동유럽""서유럽"의 나머지 부분의 세력 범위도 연합군에게 점령당했다 또한, 대부분의 "동부" "중앙 유럽"의 국가들은 소련에게 점령되어, 소련 당국의 지원으로 "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그 결과, 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알바니아 민주 공화국은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되었다. 공산주의 체제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과는 독립된 정책을 펼쳐 긴장을 유발했다 이후, "티토-스탈린" 결별로 "유고슬라비아""코민테른"에서 제명되었다 또한, 소련은 폴란드인 2백만명 이상루마니아 동부핀란드 동부발트 3국을 합병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연합국은 공식적으로 1945.10.24일에 UN을 생성하고, 1948년 모든 회원국의 공통 표준으로 "세계 인권 선언"을 채택한다 전쟁의 수혜자인 연합국인 미국소련영국중화민국프랑스는 "UN 안전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서방 연합국과 소련의 관계는 전쟁 후에 급격히 악화되었다 전후 유럽은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두 동맹으로 나뉘었으며, 긴 기간 동안의 두 세력은 정치적 긴장과 군사적 경쟁은 냉전으로 전례 없는 "군비 경쟁""대리전"을 치루게 된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본토"와 태평양의 일본이 점령했던 ""을 점령하고, 소련은 "사할린 섬" "쿠릴 열도"를 합병했다.

한반도에선 일본의 항복으로 일제 강점기가 끝났지만, 일본군 무장해제로 인해 미국과 소련이 1945~ 1948년까지 "38"을 경계로 남과 북을 점령하여 분단이 되었다 역시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인해 한반도에서도 남과 북으로 갈라지면서 서로 한반도를 통일겠다고 주장하고, 북한이 군사적으로 이를 시행함으로써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통일에 실패하고 훗날 "연평도"사건과 "천안함"사건 등도 함께 벌어진다.

중국에서는, "일 전쟁"에 따른 "국공 합작"으로 보류됐던 "국공 내전"1946.06월 재발발 한다 그 결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며, 동시에 기존 "중화민국""타이완"으로 이전하며, "양안 관계"를 형성하면서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다.

"중동"에서는 "아랍""팔레스타인 분할 안"에 거부하여, "1차 중동 전쟁"이 발발한다 유럽의 "식민지 제국"은 식민지를 유지하려 노력하나, "탈 식민지화"와 전쟁으로 인해 많은 자원 및 인력의 손실이 발생한다 전쟁 후 "국가 해방전"이 발발하며, "이스라엘"의 생성과 아시아의 식민지 및 아프리카의 식민지가 독립하게 된다.

참전 국가는 다른 영향을 얻었으나, 세계적인 경제는 크게 고통 받았다 미국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부유해졌고, 그 후 1950년대 "베이비 붐"이 시작되며, 국내총생산이 가하며 세계 경제를 지배하게 된다 영국과 미국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산업 군축 계획"을 세웠다 때문에, 유럽의 경제 침체는 "국제 무역의 상호 의존"과 맞물려 몇 년 동안 회복되었다 1948년 중반, "서독의 화폐 개혁""유럽의 경제 자유화"가 가속화되어, "유럽 부흥 계획"1948년부터 1951년까지 진행되었다 1948년 이후 서독의 경제는 "라인 강의 기적"으로 회복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경제도 회복되었다.

대조적으로 영국의 경제는 파산 직전에 있었으며, 수십 년 동안 영국 경제는 하락세를 보였다 소련은, 전후 시대의 엄청난 생산력 증가에도 불구하고 매우 큰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일본은 "고도 경제성장"을 경험하며, 1980년대에 가장 큰 경제체중 하나가 된다 중국은 1952년에 전쟁 전 "산업 생산량"이 복구되었다.

5. 전투 및 기술 발전

① 항공 분야

연합국은 "유럽 항공전"에서 16만 명의 병사와 33,700기의 항공기를 잃었다. 항공기는 정찰ㆍ전투ㆍ폭격ㆍ지상군 지원 등으로 각 역할이 발달했다. 혁신적인 "공ㆍ수 시스템"을 포함하여, 산업 시설과 병사의 사기를 저해하는 "전략 폭격기"가 발명되었다. "레이더"와 "독일의 88mm 대공포"를 포함한 진보된 "대공포"로 인해 "대공전"도 한층 발달되었다. 비록 시기가 늦었지만, "제트기"의 발명으로 전 세계의 항공 부대의 표준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② 해전 분야

해전에서는 특히 "잠수함ㆍ항공모함"을 포함하여 전적으로 발전되었다. 전쟁 시작 당시, "항공 공학"은 전쟁에서 비록 작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타란토ㆍ진주만ㆍ남중국해ㆍ산호해에서는 "전함" 대신 "항공모함"이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9~ 1945년까지, 3,500척의 연합국 상선과 783척의 독일 U-보트가 격침되었다. "대서양"에서는 "호위 항공모함"이 연합국 호송선단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보호 반경이 효과적으로 늘어나 "중대서양 갭"이 줄어들게 되었다.

"항공모함"은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과 중무장의 불필요성으로 인해 "전함"보다 선호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효과적인 무기로 입증된 "잠수함"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중요한 무기로 부각되었다. 영국은 "대잠전"에서 "호송선단의 소나" 등 "대잠 무기"의 개발에 초점을 맞추었다. 독일은 "독일 U-보트 7형"과 "이리때 전술" 등을 통해 공격력의 상승에 초점을 두었다. 점차적으로, 연합국은 대잠 탐조등ㆍ헤지호그ㆍ스퀴드ㆍ마크24 어뢰 등을 개발하며 승리하게 된다.

③ 지상군 분야

지상군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동성ㆍ통합 무기"가 증가하게 되었다. "탱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보병의 지원"으로 사용되었으나, 후에는 주요 무기가 되었다. 1930년대 말에는 "탱크"디자인이 1차 대전 때보다 고급화되었으며, 전쟁 동안 속도ㆍ방어력ㆍ화력 등이 증가하였다. 소련의 주력 전차인 T-34는 1945년까지 57,000대가 생산되었다. 전쟁 시작전, 독일의 대부분 지휘관들은 적 탱크보다 더 우수한 탱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디어는 방어력이 약한 "경전차"가 초기 "대포 성능 저하"에 의해 도전되었으나, 독일에서는 "전차-전차전"을 채택했다. 이것은 독일의 "육군 결합 사용"과 함께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대부분의 "대전차전"에는 간접 사격ㆍ대전차포ㆍ대전차 지뢰ㆍ원거리 보병 무기ㆍ다른 전차 등이 사용되었다. 대규모의 기계화와 함께 보병은 군사의 기반을 유지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해 대부분의 보병은 비슷하게 구현되었다. "휴대용 포"가 개발되면서, "독일의 MG 42" 같이 도시나 정글 전투에 적합한 "기관단총"이 활성화되었다. "돌격소총"은 전쟁 말기에, "기관단총"과 "라이플"의 많은 기능을 결합하며, 대부분의 보병에서 보편적인 무기가 되었다.

④ 암호학 분야 :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화 기계

대부분의 주요 교전국은 "보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암호학"의 "코드북"이나, 독일의 "에니그마"처럼 "암호화 기계"를 이용했다. "SIGINT(신호정보수집)"은 "해독의 계산 과정"이었고, 유명한 예제로는 연합국이 "일본 해군 코드북"의 해독과 "영국의 울트라"이다. "울트라"는 "폴란드"의 "암호화 사무국의 해독 방법"이 영국으로 넘어간 것으로, 전쟁 전 7년 동안 "에니그마"의 해독 방법은 수수께끼였다.

⑤ 기만 작전ㆍ기타 기술ㆍ공학의 발전

군사적 정보의 다른 이용으로는 "기만 작전"으로, 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민스미트 작전"과 "보디가드 작전"이 있었다. 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 달성된 기타 기술이나 공학으로는 전쟁 중 최초로 개발된 "컴퓨터인 Z3", "콜로서스","에니악"이 개발되었다. "유도 미사일"과 현대적인 "로켓",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계획", 운용 과학의 개발과 "인공 항구" 개발, 영국 해협의 "해저 파이프 관 건설" 등이 있다. 

6. 점 령

유럽에서 점령은 매우 다른 두 형태가 있었다서부 유럽북부 및 중앙 유럽(프랑스노르웨이덴마크저지대 국가병합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은 전쟁 끝까지 약 695억 라이히스마르크(278억 미국 달러)를 수탈하고, 이것은 "나치 독일"의 산업 시설군사 장비원자재 등의 약탈 물자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그리고 점령 국가에 대해 "40%가 넘는 과세"를 함으로써, 독일의 소득을 40% 이상 끌어올렸다.

동부에서는 "레반스라움 사상"으로 인해 수확이 나오지 않았으며, 전선에서는 "소련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자원이 거의 남지 않았다"우크라이나" 서부에서는 "독일의 인종 정책"으로 인해 "슬라브 족""운터멘쉬"로 간주되어 과도한 폭력으로 점철되었고, 이는 독일의 "제네럴플랜 OST"의 원인이 된다하지만, 저항 운동이 점령지 곳곳에서 일어나 1943년까지 동부와 서부에서 독일의 점령을 방해했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아시아를 일본 하의 지역으로 둘려하고 기본적으로 일본의 패권은 "식민지 지역민의 해방이 목적"이라고 주장했다일본군에게 점령된 지역은 처음에는 "유럽 지배의 해방자"로 맞았지만, 과도한 폭력적인 점령으로 인해 얼마 안가서 "저항"으로 돌아섰다.

7. 전쟁 전 사건

① "에티오피아" 침공 :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이탈리아 왕국"과 "에티오피아 제국"간의 "식민지 전쟁"으로, 1935.10월에 시작하여 1936.05월에 끝났다. 이 전쟁은 "에티오피아"를 점령 및 병합으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Africa Orientale Italiana, AOI)가 "점령지"관리를 맡게 되었으며, 이는 "국제 연맹"에서 "이탈리아"가 약점을 노출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는 모두 "국제 연맹"의 회원국이었으나, 국제 연맹 규약 제10조를 어겼어도 연맹은 제재하지 않았다.

② 스페인 내전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민족주의 스페인"을 지원했다. 소련 등의 "사회주의 세력"은 "좌익"성향인 "기존 정부인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했다. 독일과 소련은 "대리전"으로 각자의 무기와 기술을 시험해볼 수 있었다. 1937.04월 "콘도르 군단"에 의해 고의적인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일어나자, 다음 전쟁에서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테러나 폭격에 대한 우려가 상승했다.

③ 중ㆍ일 전쟁

1937.07월,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옛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하자, 중국과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소련은 신속히 "중국-소련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군수품을 지원하고, 독일과의 협력 협정인 "중국-독일 협력"은 종료되게 되었고, "대원수 장개석"을 포함하여 독일 훈련 "중국 국민당군"이 "상하이"를 방어하지만, 3달 만에 상하이를 점령당했다.일본은 중국을 계속 점령하고, "난징 전투"의 일본군 승리 후에 "난징 대학살"이 발생한다.

1938.06월, 일본의 진출은 1938년 "황허 홍수"로 저지되고, 이 시간동안 "우한 시"의 "우한 전투"까지 방어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군사적으로 승리했으나, 중국 정부는 수도를 내륙인 "충칭"으로 이전하고, 일본이 바란 중국의 붕괴 대신 치열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④ 일본의 소련ㆍ외몽골 침공

1938.07.29일, 일본의 소련 침공으로 "하산 호 전투"가 발생하였다. 전투는 거의 소련군의 승리였으나, 일본군은 무승부로 판단하고, 1939.05.11일에는 강제로 "할힌골 전투"를 일으키며 몽골 영내로 진군했다. 초기에는 몽골로의 침공이 성공했으나, "붉은 군대"에 의해 관동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충돌들은 소련의 중국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해 소련 정부를 회유하고 대신 남쪽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파벌들이 태평양과 미국 방면으로의 진출을 설득하게 되고, 또한 나중에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게오르기 주코프"가 활약함으로써 원수로 등극하게 된다.

⑤ 유럽 점령과 조약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대담해지고 있었다. 1938.03월, 독일은 "오스트리아 병합"을 하며, 다른 유럽 국가의 "유화 정책"을 자극했다. 이에 격려되어 "히틀러"는 "주데텐란트"에서 독일인의 병합을 주장하면서, 곧 프랑스와 영국은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많은 영토를 독일에게 할양하고 인정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빈 협정"을 체결하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토를 "폴란드"와 "헝가리"에게 양도했다.

1939.03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부분을 침공하며, 독일은 "보헤미아 모라비아 보호령"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나누어 점령했다. 히틀러는 또한 "단치히 자유시 할양"을 요구하자, 이에 놀란 프랑스와 영국은 "폴란드-영국 방위 협정"으로 "폴란드"의 독립의 지원과 보장하고, 1939.04월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병합하자, 이 보장을 "루마니아"와 "그리스"로 확대했다. 곧 "프랑스-폴란드 동맹"을 맺으며 "영국-폴란드-프랑스 동맹"이 형성되자, 독일과 이탈리아는 "강철 조약"으로 동맹을 공식화했다.

1939.08월, 독일과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맺고, 비밀 조약과 함께 조약을 맺었다. 양 국은 서로 "영토와 정치적 영역의 재정리"와 "영향 구역"을 정했다(독일은 폴란드 제2공화국ㆍ 리투아니아, 소련은 동부 폴란드ㆍ핀란드ㆍ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ㆍ베사라비아). 또한 "폴란드"의 독립 유지에 대한 문제를 남겼다.

⑥ 전쟁 발발 전, 연합국의 인구ㆍ경제의 이점, 독일ㆍ일본의 노예노동력

전쟁 발발 전, 유럽에서 연합국은 "인구"와 "경제" 모두에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1938년, 서부 연합국(영국ㆍ프랑스ㆍ폴란드ㆍ영연방 국가)는 유럽의 추축국(독일ㆍ이탈리아)보다 30% 많은 인구와 30% 더 높은 "국내 총생산(GDP)"를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의 인구를 포함할 경우에는 연합국의 인구는 5:1로 차이 나고, GDP는 2:1로 차이가 났었다. 같은 기간, 아시아에서는 중국은 일본보다 인구가 6배 많았지만, GDP는 89% 차이가 났고, 만약 식민지가 포함될 경우에는 인구는 3배 차이가 나고, GDP는 38%로 감소했다.

연합국의 인구 및 경제의 이점은 독일과 일본의 "초기 기습"으로 완화되었지만, 전쟁 생산의 차이는 1942년 미국과 소련의 참전 이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연합국보다 추축국이 종종 더 많은 "천연 자원"을 가지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독일과 일본의 "여성 노동력"에 의해 결정되었고, 연합군의 전략 폭격, 독일의 전시 경제 체제 전환과 독일과 일본의 지속적인 전시 경제가 정착되지 않아서 크게 기여가 되지 않았다. 자국의 노동력을 개선하기 위해, 독일과 일본은 노예 수백만 명을 이용하고, 독일에서 대부분 동유럽인의 1,200만 명의 노동력과 일본에서는 극동에서 1,800만 명의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8. 전쟁의 경과 (유럽에서의 전쟁 발발)

1939.09.01, "독일슬로바키아""폴란드 침공"을 시작했다09.03, "프랑스영국영연방 국가"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지만, "가짜 전쟁"이 발발하고 서부에서의 공세는 소규모의 "자르 공세"밖에 없었다"영국프랑스"는 독일의 전쟁 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09.03일 해군을 이용한 독일의 봉쇄를 시작했다.

09.17, "소련-일본 국경 충돌" 이후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다이후 "폴란드""독일소련"이 병합하고, "리투아니아슬로바키아"도 일부 영토를 얻었다"폴란드"는 항복하지 않고 "폴란드 망명 정부"를 세우며, "폴란드 국내군"을 통해 모든 외부 전선에서 연합군과 공동으로 전투를 하였다10만 명이 "루마니아발트 국가"로 망명하고,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폴란드 서부군"과 합류한다"폴란드""애니그마 암호해독가"도 프랑스로 망명했다이 기간 동안, 일본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창사"에 대한 첫 공격을 실시하지만, 9월 하순까지 점령하지 못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독일-소련 협력, 우호 및 경계 조약에서, 소련은 "발트 국가"들을 점령하고, "핀란드" 영토 요구를 거부하자, 1939.11월 소련이 "핀란드"에게 선전포고하며 "겨울 전쟁"이 발발한다"겨울 전쟁"1940.03"핀란드"가 영토를 "10% 할양하는 조건""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끝난다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하는 나라를 지원한 것처럼 소련에게 공격받은 "핀란드"를 지원하고, "국제 연맹"에서 소련 침공에 대해 "소련을 제명"시켰다.

서부 유럽에서는 프랑스에 영국 원정군이 상륙하고 나서, 1940.04"가짜 전쟁"이 끝나면서, "베네룩스" 프랑스를 상대로 "프랑스 공방전"이 시작된다소련과 독일은 "통상 조약"을 맺고, 소련은 연합군의 봉쇄를 우회하기 위해 독일에게 원자재를 주는 대가로 "독일 군사 장비""산업 장비"를 얻었다.

1940.04, 독일이 "스웨덴산 철광석"을 확보하기 위해 "베저위붕 작전"을 시행하고, 연합군도 "윌프레드 작전"을 시작했다"덴마크"는 즉시 항복하고, "노르웨이"는 연합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2개월 이내에 항복했다1940.05, 독일의 "아이슬란드" 점령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이 "아이슬란드"를 침공한다또한 "노르웨이" 전역의 영국 불만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1940.05.10일 총리가 "네빌 체임벌린"에서 "윈스턴 처칠"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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