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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 : 1차 대전ㆍWorld War 1ㆍ1914.07~1918.11 (4년 4개월)

by 당대 제일 2022.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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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World War 1)"은 1914.07.28~1918.11.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렸다. 미국에서는 처음에는 "유럽 전쟁(European War)"라고 불렸다.

 

1. 1차 세계대전 (World War 1ㆍ1914.07.28~1918.11.11)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용어는 1914.09월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헤겔"이 "유럽 전쟁의 두려움에 관한 과정이나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어의 전체적 의미에서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불릴 것이다"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으며, 캐나다와 영국에서는 "First World War"이라는 용어를, 미국에서는 "World War I"이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연합국은 대영제국ㆍ프랑스ㆍ러시아 제국의 삼국 협상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다른 한편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는 동맹국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동맹국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침공했다. 이탈리아 왕국ㆍ일본 제국ㆍ미국이 연합국에 가입했으며, 오스만 제국ㆍ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에 가담했다.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이래,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동맹국의 군대가 차례대로 투항했다.(불가리아→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순으로 항복했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같은 날, 독일의 "킬(Kiel)"군항에서는 해군 수병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다. 파급 효과는 엄청났는데, 곧바로 독일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여, 군경과 실랑이를 벌였다.

"독일 11월 혁명"이후, 독일이 1918.11.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결국, 황제(빌헬름 2세(독일 제국))는 제위를 포기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은 "군주제"를 포기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였으며, 1918.11.11일 연합국과 휴전을 맺었다.

① 개 요

• 일 시 : 1914.07.28~ 1918.11.11       • 장 소 : 유럽ㆍ아프리카ㆍ중동ㆍ태평양 제도ㆍ중국ㆍ남ㆍ북아메리카 해안 등 전 세계        결 과 : 협상국 승리UN의 설립유럽 및 중동에서 여러 나라의 독립 / 독일 제국ㆍ오스만 제국ㆍ러시아 제국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 독일의 식민지 및 오스만 제국 령 지역이 다른 나라들에게 할양

• 협상국 : 대영 제국ㆍ프랑스 식민 제국ㆍ러시아 제국(~1917)ㆍ일본 제국ㆍ벨기에ㆍ이탈리아 왕국 (1915~)ㆍ미국(1917~)ㆍ세르비아 왕국ㆍ몬테네그로 왕국ㆍ포르투갈ㆍ루마니아 왕국 (1916~)ㆍ그리스 왕국(1917~)ㆍ타이(1917~)ㆍ라이베리아(1917~)ㆍ사우디아라비아 헤자즈 왕국

• 동맹국 : 독일 제국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ㆍ오스만 제국ㆍ불가리아 왕국(1915~)        공동 교전국 : 자발 샴마르 토후국다르푸르 다르푸르(~1916)데르비시 국 지원국 : 에티오피아 제국        지휘관 : 연합국- 조지 5(대영 제국)조르주 클레망소(프랑스)니콜라이 2(러시아 제국)ㆍ미국 우드로 윌슨 / 동맹국- 빌헬름 2세(독일 제국)ㆍ프란츠 요제프 1세(1914~1916)→ 카를 1세(1916~191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ㆍ메흐메트 5세(오스만 제국)ㆍ페르디난드 1세(불가리아)

• 투입원 : 연합국- 계 : 42,959,850 명 / 러시아 제국(12,000,000 명)ㆍ대영 제국(8,841,541 명)ㆍ프랑스(8,660,000 명)ㆍ이탈리아 왕국(5,615,140 명)ㆍ미국(4,743,826 명)ㆍ루마니아 왕국(1,234,000명) /  동맹국- 계 : 25,248,321 명 / 독일 제국(13,250,000 명)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7,800,000 명)ㆍ오스만 제국 (2,998,321 명)ㆍ불가리아(1,200,000 명)

• 피 해 : 연합국- 계 : 22,477,500 명- 사망(5,525,000 명)ㆍ부상(12,831,500 명)ㆍ실종(4,121,000 명) /  동맹국- 계 : 16,403,000 명- 사망(4,386,000 명)ㆍ부상( 8,388,000 명)ㆍ실종(3,629,000 명)

② 결 과

동맹국이 연합국에게 전쟁에 지면서, "독일- 베르사유 조약ㆍ오스만 제국- 세브르 조약ㆍ오스트리아- 생제르맹 조약ㆍ헝가리- 트리아농 조약ㆍ불가리아- 뇌이 조약"을 맺으면서, "오스만 제국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많은 영토와 인구를 잃었고, 이로 인해 "발칸 반도ㆍ중동 지방"에서 많은 독립국들이 생겨났다.

독일의 경우, 해외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였으나, 본토 손실은 "알자스ㆍ로렌"을 프랑스에 넘겨주고, "폴란드" 지역을 독립시킨 정도에 그쳤으나, 장기간 전쟁수행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실직자가 속출하였다.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 제국ㆍ러시아 제국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ㆍ오스만 제국" 등 4개 주요 제국이 해체되게 되었는데, "독일 제국ㆍ러시아 제국"은 승계국가가 탄생했지만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완전히 해체하게 되었다.

"유럽ㆍ서남아시아"의 지도는 새로운 독립 국가가 생기면서, 새롭게 그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 연맹(UN)"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유럽의 "민족주의의 부활"과 독일에서의 "파시즘"의 장악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며 실패하게 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일방적 평화의 강요나 다름없는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더욱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과다한 배상금은 "아돌프 히틀러 집권"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외부로부터 강요된 체제라고 하여, 민주정부에 대한 애정과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하여 "공화국"의 생명력을 위태롭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합국인 "이탈리아"의 좌절ㆍ배신감은 "파시즘의 발전ㆍ베니토 무솔리니 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③ 1차 세계대전 사상자

• 독일→ 러시아→ 프랑스 순으로 희생자를 많이 냈다. 반대로 일본은 희생자를 가장 적게 냈다.

• 프로이센 (동맹국): 203만 명 전사 오스트리아(동맹국): 120만 명 전사  /  러시아 (연합국): 170만 명 전사 영 국 (연합국): 90만 명 전사  /  프랑스 (연합국): 140만 명 전사  / 일 본 (연합국): 300명 전사ㆍ900명 부상ㆍ3명 실종 (계 1,203명 희생)

④ 동맹국ㆍ러시아의 전후 결과

• 독일 제국 : 바이마르 공화국 탄생, 막대한 배상금 지불ㆍ독일의 일부 영토였던 폴란드 땅이 독립하게 됨. 태평양 식민지→ 미국ㆍ일본이 분할, 알자스ㆍ로렌→ 프랑스에 병합  /  아프리카 식민지→ 르완다ㆍ부룬디- 벨기에 위임통치령, 탄자니아→ 영국 위임통치령  /  카메룬토고영국프랑스의 분할, 산둥반도일본에 조차

※ 조차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한 기간 동안 통치하는 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오스트리아 자체는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으로 탄생  /  폴란드(신생국)ㆍ이탈리아에 일부 영토 할양  /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한 왕국으로, 루마니아에 일부 영토 할양.

• 유고슬라비아 왕국 : 크로아티아ㆍ체코슬로바키아ㆍ보스니아ㆍ헤르체고비나ㆍ슬로베니아가 연합 왕국으로 독립한 후, 유고슬라비아 왕국 건설

• 러시아 제국 : 발트 3국ㆍ벨라루스ㆍ우크라이나ㆍ폴란드ㆍ핀란드→ 독립  /  루마니아에 일부 영토 할양

• 오스만 제국 : 터키 공화국 탄생, 이즈미르→ 그리스에 할양, 연합국과 세브르 조약 체결  /  트란스요르단키프로스이라크영국 위임통치령  /  시리아레바논아르메니아프랑스 위임통치령  /  메카메디나네지드 술탄국헤자즈 왕국에 할양

2. 당시 국제 정세

유럽의 국제적인 긴장을 격화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비스마르크 실각" 후의 "독일의 적극적인 세계정책 추진과 이를 위한 군비확장"이었다.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대"에 있어서도, 열강의 뒤를 따라, 아프리카ㆍ남태평양ㆍ중국 등으로 진출하였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열강의 세계분할에 한 몫을 보자는 것이었지, 열강의 어느 특정 세력권이나 이권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

1900년 경, "열강의 세계분할"이 거의 완료되었을 때까지, 독일은 계속 강력하게 "세계 정책"을 추구하고 기존 세력권이나 이권을 무시하면서, 파고들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세계분할이 거의 끝날 무렵, "터키 경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직접 그곳을 방문하는 등(1898),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비쟌티움(터키 이스탄불) ~ 바그다드(이라크)"간의 철도 부설권을 따내고, 이를 "베를린"과 연결하는, 이른 바 "3B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려 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세계정책의 기본방향은 "Cape (영국 식민지) ~ Cairo(이집트) ~ Calcutta(인도)"를 연결하는 "3C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의 터키 및 지중해로의 진출정책과도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국제적 불안을 "세계대전"으로까지 몰고 간 중요한 기본적인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고, 장기간에 걸쳐 대립을 거듭해 오던 "영국ㆍ러시아"가 서둘러 타협을 모색하고, 협상을 맺은 주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모로코(아프리카 남북부)"에는 "프랑스"의 세력이 침투하고 있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아직 완전히 그 지배하에 들어가지는 않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불 협상"을 통하여 이곳에서의 우월한 지위와 영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있었는데, 바로 그 협상이 맺어진 다음해(1905) "독일 황제 빌헬름"은 돌연 "모로코의 Tangier항"에 상륙하여,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주장하였다.(1차 모로코사건) 이 사건은 열강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다음해 국제회의에서 프랑스는 영국 등의 지지를 얻어, "모로코"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받고, 고립된 독일이 물러섬으로써 일단락을 지었지만, 한때 대전의 발생을 예상시키는 긴장감을 감돌게 하였다. 그러나 독일은 "모로코"를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1911년 봄, "모로코"에서 내란이 발생하여, 프랑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자, 독일은 군함을 "Agadir"에 파견하여 프랑스를 위협하여, 다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전쟁 직전까지 악화하였다.(2차 모로코사건) 그러나 영국이 강하게 프랑스를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에 독일은 양보하고 프랑스는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2차 모로코사건"을 전후하여, 분쟁의 무대는 "유럽의 화약고"로 일컬어지는 "발칸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908년, "터키"의 정치적 혼란을 틈탄 "오스트리아"는 "베를린 조약"으로 관리하고 있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였다.  이 땅은 전부터 "세르비아"가 "범슬라브주의"의 일환이 "大세르지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탐내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대한 "세르비아"의 증오를 격화시키게 되었다. 

"1차 모로코사건" 때, "삼국동맹"에 반하여 프랑스를 지지한 바 있는 "이탈리아"는 "2차 모로코사건"에 열강의 관심이 쏠려 있는 틈을 타서, "터키"에 개전하여 "트리폴리(리비아)"를 점령하고(이토전쟁, 伊土戰爭, 1911) 다음 해 열강은 이를 승인하였다(1912). 

"터키"의 약화와 정치적 혼란을 이용한 것은 비단, 이탈리아만이 아니었다.  "불가리아ㆍ세르비아ㆍ그리스ㆍ몬테네그로"는 "이토전쟁(伊土戰爭, 1911)" 중에 "발칸동맹"을 결성하여, "터키"에 싸움을 걸어, "1차 발칸전쟁"이 발생하였다(1912).  다음해 "터키"는 "런던조약"에서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 주변의 땅을 제외한 유럽대륙 내의 영토와 "크레타 섬"을 "발칸 동맹국"들에게 양도하였다.  그러나 새로 획득한 영토의 분배 과정에서 "불가리아" 소유가 너무 많다하여, "2차 발칸전쟁"이 발생하였다.(1913) 고립된 "불가리아"는 크게 패하고, "그리스"는 "크레타"를 비롯한 "에게 해"의 여러 섬과 "마케도니아"의 일부를 얻고, "세르비아ㆍ루마니아"도 그 영토를 확장하였다.(Bucharest조약)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영토 확장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가 "알바니아"를 병합하려는 것은 막았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적대감정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한편 열강의 "제국주의 정책"의 추구로 국제관계가 긴장하고, 서로 다투어 "군비확장"에 열중하는 상황이 전쟁의 위기를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899년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주창으로, 군비제한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네덜란드의 헤이그평화회의(Hague Peace Conferecne)"가 열렸다. 29개국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 "러시아 황제"가 의도한 자국의 군사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군비제한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국제중재재판소의 설립ㆍ독가스 사용금지ㆍ전쟁포로의 대우문제" 등에 관한 법규가 채택되었다. 1907년, "2차 헤이그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주된 의제인 군비제한에는 역시 실패하였다. (이준 헤이그밀사 사건)

※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ㆍ철의 재상ㆍ1815~189883세)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했던 정치가ㆍ독일 제국을 건설한 프로이센의 외교관ㆍ정치인프로이센 총리(1862~ 1890)외무장관(1862~ 1890)북독일 연방 연방수상(1867~ 1871)독일 제국 국가수상(1871~ 1890)독일을 진정한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수백 년간 지속된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또한 1860년대 초반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독일권의 통합과정에서 적지 않은 장애 요인들과 직면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그러한 장애요인들을 효율적으로 제거했다.

독일제국 수상으로 있을 때,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ㆍ산재보험ㆍ노인복지법' 등 정책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남겼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가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책 실현과 관련하여 여론의 공감대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과 여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 배려하는 자세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 부정적 시각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현실정치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그의 자세는 정책에 대한 불만 세력의 결집 및 활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훗날 "빌헬름 2세"와의 갈등에서 대중들이나 정당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 있어서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3. 전쟁의 시작ㆍ종료

1914.06.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었다.

6천만 명의 유럽인을 포함한 7천만 명의 군인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전쟁 중 하나에 동원되었다. 전쟁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사건"으로 일어났지만, 근본적으로는 19세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부터 싹텄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신 제국주의" 때문이었지만, 주요 원인은 "민족주의 대두ㆍ군사력 증대ㆍ식민지 경쟁ㆍ군사동맹체재" 등이었다. 

암살자 "프린치프"는 "세르비아"의 테러 조직에 연계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정부"가 암살의 배후라고 믿고,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게 최후통첩을 내리면서, "7월 위기"가 시작되었고, 지난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국제적 동맹끼리 서로 연결되었다. 수주 이내에 강대국끼리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분쟁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ㆍ러시아ㆍ영국"은 "세르비아"를 지원해 "연합국"을 형성했고, 이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ㆍ독일"로 구성된 "동맹국"이 대항했고, 다른 국가들도 잇달아 연합국이나 동맹국에 가담했다. 

1914.07.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리면서, "독일군"은 중립국인 "룩셈부르크ㆍ벨기에"를 침공하면서, "프랑스"로 진격했고, 이로 인해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파리" 앞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춘 이후, "서부 전선"은 1917년까지 "참호전"과 같은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지게 된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내로 진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동프로이센" 침공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게 된다.

1914.11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코카서스ㆍ메소포타미아ㆍ시나이 반도" 등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ㆍ불가리아"는 1915년 참전했고, "루마니아 왕국"은 1916년 참전했으며, "미국"은 1917년 참전했다. "러시아 정부"가 1917.0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이후 "10월 혁명"으로 인해 동맹국이 "러시아"의 영토를 획득했다.

1918.11.0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춘계 공세"이후, 연합군은 일련의 공세를 방어하고, 이후 진격하여 독일군의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이후, 독일이 1918.11.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① 군인들 가운데 1,000만 명이 죽고, 2,100만 명 정도가 부상당했다.

재산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프랑스ㆍ벨기에"였다.  전쟁으로 공장ㆍ다리ㆍ철로가 파괴되었으며, "서부 전선"은 탄피ㆍ참호ㆍ화학 물질로 황폐해졌다.  그리고 대전으로 인해 세계의 "정치ㆍ경제ㆍ사회"는 급변했다.

② "오스만제국ㆍ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정부의 토대를 흔들어놓았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ㆍ헝가리ㆍ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독립 공화국과 "이탈리아ㆍ 폴란드ㆍ루마니아ㆍ유고슬라비아"의 영토 일부로 나누어졌다.  "러시아ㆍ독일"도 "폴란드"에 영토를 넘겨주었다.  "핀란드ㆍ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ㆍ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서 독립했다.  "오스만제국"의 아랍지역은 "프랑스ㆍ영국"의 통제를 받고, 나머지 지역에서 "터키공화국"이 세워졌다.

③ 유럽 경제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며, 교전국은 3,370억 $ 정도의 손해를 보았다.

또한 필수품을 조달하려고, 특별 화폐를 찍어내는 등 화폐 공급을 늘려, 전후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전쟁부채 문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다.  연합국은 "독일"에서 "전쟁 배상금"을 받아, 부채를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배상금"은 패전국의 경제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승전국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반면 "미국"은 경제 강국으로 떠올랐다. 

④ 엄청난 사회 변화가 일어났으며, 대전으로 인한 파괴ㆍ유혈은 유럽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놓았다.

1920년대 "프랑스"는 출산율이 낮아 인구가 줄어들었고,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정부와 국경의 변화로 난민이 발생했으며, 농민이 농토로 돌아가는 않고, 도시에 정착해 도시가 팽창했다.  남성이 참전한 뒤, 공장ㆍ사무실에서 일자리를 얻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얻는 새로운 독립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전쟁 후에 많은 나라가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었다.

4. 전쟁 이후의 세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였으며, 전쟁의 방지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국제 연맹(UN)"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로써 "국제 연맹(UN)"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입에 실패하였다.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으나,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UN" 참여를 거부하고 다시 "고립주의"에 빠짐으로써 강대국으로서 국제 역할에 괴리를 가져왔으며, 결국 "경제 공황"이 생겨난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중앙 유럽의 많은 국가는 독립하였으며, 독립을 조건으로 "영국"을 도왔던 "인도"는 약속이 무산되자, 지속적인 투쟁 운동을 시작했다.  "민족자결주의"로 "민족주의"가 상승하여, 20세기 정치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인도ㆍ조선 독립 운동)

미국ㆍ영국ㆍ프랑스 등지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일본은 "오세아니아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반성보다 지독한 가난ㆍ배상금에 시달렸다. 오스만 제국도 "세브르 조약"을 맺어,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1922년 해체, 1923년 터키 공화국 수립)

"오스트리아ㆍ헝가리"도 각각 "생제르맹 조약ㆍ트리아농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으로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떼어주었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으나, 연합국에게 영토를 보장받기는커녕, 냉대를 받았다.  결국 1922년에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된다.  중국도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둥 반도"에 대한 이권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5. 결과ㆍ의의ㆍ영향

과학기술의 발전 : 맥심 기관총(영국)ㆍ탱크(영국)ㆍ전투기(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U-보트(독일)ㆍ 독가스(독일)ㆍ곡사포(오스트리아)등의 신무기가 생겨났다.

"독가스"와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들도 개발되어 나왔다.  최초의 "독가스"는 독일군이 사용하였으며, 연합군도 같은 무기로 대응했다.  독가스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은 양측 모두 "방독면" 외에는 없었다.  독가스가 사용된 것은 "마른 전투" 이래, 기관총ㆍ철조망ㆍ참호전으로 고착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서였다.

탱크도 "참호선"을 뚫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대포도 점점 "대구경화" 되었다.  장거리 사격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열차포"(독일의 크루프 열차가 유명하다)도 등장하였다.  기술의 개선은 전방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생리대"를 들 수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여성을 위해 "생리대"가 개발되었다.

일본은 "영ㆍ일 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1차 대전기간 동안 여러 이득을 보았고, 경제호황기를 누림으로써 대체로 만족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ㆍ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진의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1914.08월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한 후, 일본 육군은 중국에 있던 독일의 조차지 "산둥 반도"의 "자오저우 만(칭다오 포함)"을, 일본 해군은 태평양의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고, 이 지역에서의 이권을 할양받는 것을 "영국ㆍ프랑스"가 승인하는 조건으로 지중해에 소규모 함대만을 파견하는 등 독일과의 직접적인 전투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산둥반도"를 점령하고 나서, 일본은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둥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 영구화하고, "남만주ㆍ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21가지 특혜조건을 요구(1915.01월)하였고, 중국은 이를 수용(1915.05월) 할 수 밖에 없었다.(→21개조 요구)  이와 같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5ㆍ4 운동(1919년)"과 같은 격렬한 배일(排日)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

한편, "러시아 혁명(1917년)"에 뒤이어 일어난 "러시아 내전(1917~22년)"에서 일본은 "러시아 백군"을 도와, 72,000여 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견하였으나, 패배하였다. • 중국은 1917년에 "연합국"으로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산둥 반도"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사인도 하지 않고, 국제 회의장에서 철수한다.  이것은 "5ㆍ4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선언하여, 국제 정치가 이념화ㆍ도덕화 되기 시작했으며, 이상적 집단안전보장정책인 "국제연맹(UN)"을 통해, 법률적ㆍ도덕적 세계 여론에 부응하여 평화를 추구하는 시대가 도래 했다. 국제 정치에도 변화가 크게 나타나서, 독일ㆍ러시아 등의 전제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해체되었고, 유럽 국가들의 절반에 가까운 국가에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국제 정치는 이제 유럽에만 힘을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전 세계가 국제 정치의 무대가 되었으며, 국제 정치가 좁은 유럽에서 벗어나 전 세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 세계 국민의 감시 속에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전 세계 지도자들이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도덕적으로 국제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많은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하여 다른 국가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늘어났고, 민주주의가 발달하였으며, 사회구성원간의 평등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높아지게 되었다.

6. 전쟁 배경

① 정치ㆍ군사적 동맹

19세기 유럽의 강대국들은 유럽 전역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결과 1900년에는 복잡한 정치, 군사적 동맹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동맹은 1815년 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ㆍ러시아 간의 신성 동맹으로부터 시작했다. 1873.10월에는 독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ㆍ오스트리아-헝가리ㆍ러시아 사이 "삼제 동맹(Dreikaiserbund)"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에 "발칸반도"에 대한 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삼제 동맹"에 탈퇴하여, "2국 동맹"을 따로 만들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반대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 "2국 동맹"은 1882년 "이탈리아 왕국"이 가입하면서, "삼국 동맹"으로 변화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간의 "양면전선"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간"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황제 지위에 오르면서 "비스마르크"는 퇴위를 강요당했고, "비스마르크"가 세운 "동맹 시스템"은 점차 해체되었다. 예를 들어, "빌헬름 2세"는 1890년 러시아와의 "재보험 조약 갱신"을 거부했다.

2년 후, "3제 동맹"을 막기 위하여,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체결되었다. 1904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영국-프랑스 협정(Entente Cordiale)"을 맺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이 "영국-러시아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공식적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가 분쟁을 겪을 경우 영국이 참가하게 된다는 항목이 있었으며, 이러한 "양자 연동 협정"을 "삼국 협상"으로 알려졌다.

② 군비 경쟁

1871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여 독일이 통일한 이후, 산업 및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1890년대 중반부터 "빌헬름 2세"는 중요한 경제 자원을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지휘하는 독일 제국 해군에 투자하여, 영국 해군과 해군 군비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각 국가들은 주력함을 더욱 많이 건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6년 "HMS 드레드노트"의 건조 이후, 대영제국은 독일 제국과의 경쟁에서 주요한 위치를 선점하게 되었다. 영국과 독일 사이의 군비 경쟁은 모든 유럽 주요국이 유럽 전역의 분쟁에 필요한 장비와 무기를 생산하는 데 산업기반을 기울이면서 유럽 전역으로 경쟁이 확장되었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유럽 국가의 군비 지출은 50% 상승했다.

 "발칸 반도"의 분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1878년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이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보스니아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 점령으로 "세르비아 왕국" 및 그 국가의 후원자인 "범슬라브주의 동방 정교회"의 "러시아 제국"을 화나게 했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행보는 이미 "유럽의 화약고"로 널리 알려진 "발칸반도"의 균형을 붕괴시켜 "평화 협정"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 동맹"과 "오스만 제국"사이의 전쟁인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 결과 체결된 "런던 조약"에서 "알바니아"는 독립했으며, 불가리아ㆍ세르비아ㆍ몬테네그로ㆍ그리스는 영토를 확대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감소했다. 1913.06.16일,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33일간의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불가리아"가 패배하여,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루마니아"에게 "남 도르부자"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발칸반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7. 전쟁의 서막

① 사라예보 사건

1914.06.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세르비아의 검은 손"이 지원하는 청년 "보스니아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단 6명, 쳬베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ㆍ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ㆍ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ㆍ네델코 카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ㆍ트리프코 그라베츠(Trifko Grabež)ㆍ바소 쿠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는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있었다.

"카브리노비치"가 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놓쳤다. 근처의 군중 몇몇이 부상을 입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차는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암살단은 차가 빠르게 지나쳐 암살할 수 없었다. 약 1시간 후,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길을 잘못 들려 우연히 "프린치프"가 서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발사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가 사망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무관심한 듯 가벼운 반응을 보였다. 역사학자 즈비네크 제만(Zbyněk Zeman)은 나중에 "이 사건은 거의 어떠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일요일과 월요일(06.28~ 29일)에 "빈"의 군중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②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력 사태의 확대

그러나 "사라예보"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세르비아" 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사라예보"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 2명을 죽이고 "세르비아인" 소유의 건물을 불태우는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포그롬"의 특성을 갖추었다.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사라예보에서 증오의 열풍이 불었다"라면서, 이런 폭력 사건에 대해 말했다.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폭력 행위는 사라예보에서 뿐 아니라, 현대의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도시에서도 일어났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유명한 "세르비아인" 5,500명을 수감하고 송환했다. 그 중 700~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세르비아인"460명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지역에서는 "슈츠크롭스(Schutzkorps)"라는 "민병대 집단"이 형성되어,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핍박을 시작했다.

③ 7월 위기

"사라예보 암살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ㆍ러시아 제국ㆍ독일 제국ㆍ프랑스 제국ㆍ대영제국 간 1달간의 외교로 이끌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의 관리(특히 검은 손 조직의 임원들)들이 이 사건과 관련되었다고 판단하고, "보스니아" 내에서 "세르비아"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세르비아"에게 의도적으로 전쟁을 자극할 "10가지 요구 사항"으로 구성된 "7월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가 "10가지 요구사항" 중 8가지만 수락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07.28일 전쟁을 선포했다.

군사역사가인 헤우 스트라첸은 "세르비아의 초기 모호한 응답에 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행동에 차이를 주었을 것인지 아닌지는 의심해야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은 그리 인기 있는 성격은 아니었으며, 제국은 그의 죽음에 그렇게 애도를 표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에 내키지 않고, "세르비아 왕국"의 오랜 지원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07.29일 "부분 동원령"을 명령했다. 07.30일 "러시아 제국"이 "총 동원령"을 내리자, 같은 날 "독일 제국"도 "동원령"을 발동했다. 독일은 "베를린"의 대사를 통해, 러시아에게 12시간 내에 동원령을 해제하지 않으면 전쟁 상황이 올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는 "동원령을 해제하는 것에 협상하자"는 응답을 보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협상을 거부하고, 1914.08.0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했다. 독일의 전쟁계획인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가 동부에서 진군하기 전에 "프랑스" 지역을 빠르고 대규모로 침공해서 "서부를 미리 제압한다."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동원령 선포와 동시에 독일 제국은 "프랑스"에게 중립을 유지하라는 요구를 보냈다. "프랑스"내각은 즉시 "군사 동원령"을 내리라는 군의 압박에 저항하여 사건을 막기 위해, "프랑스" 국경에서 10km 밖으로 군대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독일 제국"은 08.02일 "룩셈부르크"를 침공했으며, 08.03일에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다. 08.04일, "벨기에"가 자국의 영토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하자, "독일 제국"은 "벨기에"에게도 선전포고했다.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 상태를 유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독일 제국"이 무시하자, 1914.08.04일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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