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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45.12 : 모스크바 3상회의ㆍ카이로회담ㆍ얄타회담ㆍ포츠담회담

by 당대 제일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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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제 처리를 위한 주요 회담으로는, "카이로 회담 (1943.11.22~26ㆍ1943.12.02~07)ㆍ얄타 회담 (1945.02.04~11)ㆍ포츠담 회담 (1945.07.17.~08.02)ㆍ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1945.12.16~ 25)"가 있다.

 

1. 카이로 회담 (Cairo conferences): 2차 세계대전 때,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2차례의 회담

① 일 시 : 1차 : 1943.11.22~26ㆍ2차: 1943.12.02~07 (제2차 세계대전 때)     ② 장 소 : 이집트 카이로

③ 참 석 : 루스벨트(미국 대통령)ㆍ처칠(영국 수상)ㆍ장제스(중화민국 총통)

④ 내 용 : 세계대전에서 대일전에서의 협력, 일본의 영토문제에 관해 결정→ 카이로 선언 발표(11.27)

3국(미ㆍ영ㆍ중)은 일본에 대해 가차 없는 압력을 가한다.       •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ㆍ응징하나, 영토 확장의 의사는 없다.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얻은 태평양제도의 박탈, 만주ㆍ타이완 등의 중국에 대한 반환, 일체의 점령지역으로부터 일본의 구축(驅逐) 등이다.       • 또한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을 넣어 "한국민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해,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은 회담이었다.

⑤ 1차 카이로 회담

연합국 지도자인 "루스벨트ㆍ처칠"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논의했다. 또한 "장제스"와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빼앗고, 한국의 독립보장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이 일본 영토문제에 관하여 내린 최초의 공식 성명이었다. "제1차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 "루스벨트ㆍ처칠"은 "스탈린"과 "테헤란 회담"을 위해 "이란"으로 갔다가 "카이로"로 다시 돌아왔다.

⑥ 테헤란 회담 (Tehran Conference)

 일 시 : 1943.11.28~12.01     장 소 : 이란 테헤란 (수도)

 참 석 : 루스벨트(미국 대통령)ㆍ처칠(영국 수상)ㆍ요시프 스탈린(소련 서기장)

유럽에 "제2전선"을 형성하는 것으로, "스탈린"은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함으로써 앞으로 있게 될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대한 침공과 보조를 맞추기로 약속했다. "스탈린"은 "독ㆍ소 불가침조약(1939.08.23)"과 "러시아-핀란드 조약(1940)"에 의해 "소련"이 획득한 지역을 전후에도 계속 보유해야 한다는 희망을 거듭 피력했으며, 또한 "발트 해 연안의 동프로이센"도 소련의 영토에 추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독ㆍ소 불가침조약(1939.08.23):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며칠 전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체결된 상호불가침 조약으로, 이 조약으로 동유럽에서 독일과 소련의 세력권 분할이 확정되었다.

"독일"에 대해서는 그 해결을 놓고 오랫동안 논의가 벌어졌으나, 3명의 연합국 수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았으며, 전후의 국제조직 문제에 대해서도 정확한 구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폴란드"에 대해서는 서방 연합국과 "소련"의 생각이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스탈린"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해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계속 밝혔다. 또한 연합군이 부분 점령하고 있는 "이란"에 대해서는 "전후 분할점령"을 하지 않고, 하나로 통합하여 독립시키는 동시에,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는 데 합의하여, 1943.12.01일 공식 선언문을 발표했다.

⑦ 2차 카이로 회담

"루스벨트"ㆍ처칠"은 "이뇌뉘(터키 대통령)"을 설득해, "터키"를 연합국 측에 가담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아이젠하워 장군"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최고사령관으로 결정했음을 알렸다.

2. 얄타 회담 (Yalta Conference)

일 시 : 1945.02.04~11             장 소 : 크림 반도의 얄타 (소련 흑해 연안)

참 석 : 루스벨트(미국 대통령)처칠(영국 수상)요시프 스탈린(소련 서기장)

얄타

내 용 :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주요 추축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 왕국" 항복을 하고, "나치 독일"이 패전할 기미를 보이자,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고, 그 후를 의논하기 위한 회담

"나치 독일"4(미국영국소련프랑스)가 분할 점령한다.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하여, 최저 생계를 마련해 주는 것 이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나치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하거나, 몰수한다.       전쟁의 주요 전범들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하였고, 전후 배상금에 대한 문제는 별도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임하기로 하였다.       폴란드 문제 :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서 규정한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 병합하기로 합의하였고, 대신 "폴란드"에게는 "동독"의 일부 지역을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각각 "폴란드" 동부 영토 일부를 얻게 되었다.        극동문제 : "소련""대일전"에 참전하는 대가로,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비밀 의정서"가 채택되었고, "스탈린""중국"과 동맹 및 우호 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1946년에 공표된 "얄타 협정""미국"에서, 특히 "폴란드독일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루스벨트""국무부의 친소집단"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비난과 함께, 그가 회담 당시 병에 걸려 "무능했다"는 주장도 나왔다그 후 1949"중국"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자, 그것 역시 "얄타 회담의 결과"라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으나, 역사가의 조사와 회담 참석자들의 증언 결과, 이런 비난들은 대부분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을 신뢰했으며, 그가 약속을 지킬 것으로 믿었다"스탈린"이 유럽의 모든 "인민전선 정부""공산당"에 접수시킬 계획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얄타 협정"의 일부 조항은 "태평양만주"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가정에서 체결된 것이었으나, "소련"이 참전한 지 5일 만에 "일본"은 항복하고 말았다.

3. 포츠담 회담 (Potsdam Conference)

일 시 : 1945.07.17~08.02          장 소 : 독일 포츠담의 Wilhelm 왕세자의 집인 Cecilienhof

참 석 : 트루먼(미국 대통령)처칠클레멘트 아틀리에(영국 수상)요시프 스탈린(소련 서기장)

내 용 : 9주 전에 무조건 항복하기로 합의한 "나치 독일"의 패배를 처리하는 방법을 결정.  "2차 세계 대전"의 전후 질서평화 조약의 수립전쟁의 영향에 대한 대응 등을 포함

각 나라는 오로지 자국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주요 관심사는 패전국 "나치 독일" 즉각 통치폴란드 서부 국경오스트리아 점령동유럽에서의 러시아 역할배상금일본과의 전쟁 등 이었다07.26, "미국""일본"에 무조건 항복할 것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그러나 "미국"이 원자폭탄 2개를 투하하고, "소련"이 전쟁에 개입하자, 08.10"일본 정부"는 항복했다이 회담에서는 유럽 평화협정의 내용과 절차를 논의했으나, "평화조약"을 서면화 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며, 이 임무는 "외무장관 회의"로 넘어갔다.

4.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일 시 : 1945.12.16~ 25       장 소 : 소련 모스크바       참 석 : 3(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

내 용 : "2차 세계 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회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회의 결과 발표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해를 빨리 산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       •  "연합국""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의 의를 통해 "미소 공동 위원회"가 수행한다.       •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대 강국에 의한 신탁 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4개국이 심의한 후, 제출한다.

그러나 "신탁"을 반대하는 "우익"과 찬성하는 "좌익"의 입장 차이는 대립으로 이어졌다이러한 "우익의 대립""미국소련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통한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3상 회의"의 결정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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