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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46.10 : 대구 10ㆍ1사건 (대구 10월 사건)ㆍ추수 봉기ㆍ대구 소요

by 당대 제일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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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ㆍ1 사건 (추수 봉기ㆍ10월 인민항쟁ㆍ10월 항쟁ㆍ대구 소요ㆍ영남 소요)"은  1946.10.01.일, 미군정 영역인 "대구부 지역"에서 시작되어, 3개월간 지속된 "공산 폭동"이다. 좌파 세력과 민중이 "대구"를 시작으로 남한 전역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경찰과 시민들 간의 충돌로 시작된 대규모 유혈사건이다.

 

1. 대구 101 사건 (추수 봉기10월 인민항쟁10월 항쟁대구 소요영남 소요)

• 일 시 : 1946.10.01.~ 12월 말경 (3개월간)          • 성 격 : 대중적 민중항쟁 (참가자 : 전국적으로 230여 만 명)

• 관련 인물ㆍ단체 : 박헌영ㆍ조선공산당ㆍ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ㆍ전국농민조합총연맹ㆍ인민위원회        • 영 향 : 가장 큰 피해자는 "좌익세력ㆍ시민"이었다.

주요 좌익간부들은 "9월 총 파업ㆍ대구10월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었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감옥으로, 산으로 또는 지하로 잠적했다.  "미군정ㆍ우익"은 시위대를 진압함으로써, 좌익의 가장 커다란 "대중 투쟁적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는 "국립 경찰"의 실력과 생존력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 사상자와 피해 : 사상자와 피해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거의 없다.   이것은 당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했다는 점과, 시위 발생 시 많은 경찰이 도망가서 행방불명이 많았다는 점이 주된 이유이다.  경북지역에만 국한해 살펴보면,   • 사망자 : 136명(관리 63명, 일반인 73명)        • 부상자 : 262명(관리 133명, 일반인 129명)         • 건물전소 : 10개소(관청 4, 일반 6) • 건물파괴 : 766개소(관청 240, 일반 526) 등이었다.

• 피해액 : 당시 조병옥(경무부장)에 따르면, 3억 5,600만 원(민간측 2억2,000만 원, 경찰측 1억 2,000만 원, 기타 관공서 1,600만 원)이라 했으나, "대구10월 사건대책위원회"에서 발표한 피해상황에 나타난 "영천군" 만의 피해액이 10억 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앞의 발표는 지나치게 적게 보고된 것이라 판단된다.

대구 10ㆍ1 사건

참가자의 측면에서 이 사건은 전국적인 수준에서 230여 만 명이 참여하는 "대중적 성격"을 지녔다. 구체적인 주장과 행동이라는 측면에서는 "친일파에 대한 원한의 폭발ㆍ미군정의 반동화ㆍ식량정책에 대한 반발ㆍ생활고에 대한 분노ㆍ인민위원회에 의한 행정과 치안 담당의 요구" 등의 성격을 보였다. 역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남조선노동당의 지시ㆍ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조직적 동원ㆍ상호연락관계"가 분명한 것이었지만, 실제의 결과는 일제하에서 구조화된 사회ㆍ정치 구조가 8ㆍ15해방과 더불어 청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 또는 재건시키려는 "미군정ㆍ국내 보수 세력"에 대한 시민들의 자연발생적인 항거의 성격이 있었던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사건을 높이 사는 사람들은 "동학농민운동ㆍ부마민주항쟁ㆍ광주민주화운동"과 견줄 만한 사건이며, "부마항쟁"과 "광주 운동"과 함께 민중이 주도한 항쟁이라 평가한다. 1946.09월 "총 파업"의 연장선에서 시작되었는데, 10.01일 "대구"에서의 시위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우발적으로 격화되어 발생하였고, 시위는 "대구","경북"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점차 남한 전국각지로 퍼져나갔고, 약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남조선노동당"의 지시 아래, "남조선 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1946.09월 총파업" 기간에 "대구 지역의 좌익세력들"은 노동자ㆍ일반시민들의 "쌀 획득 투쟁"을 중심으로 대중시위를 전개했다. 1946.10.01일, 대중시위에 밀린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 1명이 사망함으로써, "대구 시민"의 평화적 시위는 급격히 폭력화되어, "경찰서 습격ㆍ유치장 개방ㆍ경찰 살해" 등으로 전화되어갔다. 10.02일, "미군정"은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 전술군과 중앙의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점거된 "경찰서·지서" 등을 원상 복구시켰다.

"미군 출동ㆍ계엄령의 선포"로 "대구시내"의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대중들의 시위는 "경산ㆍ성주ㆍ영천" 등 경북의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파급은 최초 시위 발생지인 "대구"로부터의 거리ㆍ교통ㆍ통신, 각 군이 처해 있는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상황, 8ㆍ15해방 직후의 정치적 갈등의 양태, 경찰ㆍ미군ㆍ우익 대 좌익의 힘에 있어서의 역학관계 등 여러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처럼 "경북 내 각 군"의 시위 양태가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남조선노동당 중앙지도부"나 "대구의 중간지도부"가 통일적인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1946년 말, 진압되기 전까지 사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각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경찰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미 전술군ㆍ파업 파괴단ㆍ조선국방경비대ㆍ각 지방의 일부 우익청년단체들"은 "대구10월사건 관련자들을 체포한다."는 명분 아래, 좌익관계자들을 체포ㆍ테러했고, 재산을 파괴했다. "미군ㆍ경찰ㆍ조선국방경비대ㆍ우익단체"로 이어지는 시위대 진압의 무장력은 "대구10월사건" 이후에도 그 기본적인 골격은 바뀌지 않았으며, 단지 "미 전술군"의 역할을 "조선국방경비대"가 대신 맡았을 뿐이다.

① 의의ㆍ평가

"10월 항쟁"은 정치ㆍ경제 분야 등에서 "미군정" 정책의 실패를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한 성격을 가졌다. "미군정"의 정책을 재검토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나, 시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② 특 징

전개양상을 보면, "경북ㆍ경남ㆍ전남"은 많은 지역에서 시위대가 발발했고, "경기도ㆍ충남ㆍ강원도ㆍ황해도" 등은 부분적인 지역에서만 발생했으며, 동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각 지역마다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발생했다. 또한 시위의 조직적 단위는 군ㆍ면 또는 마을 단위를 넘지 못했다. 이것은 전국에서 동시적으로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조직력ㆍ통제력이 없었음을 반영한다. 즉, 파급되어가는 시위에 대하여 중앙에서 통제할 수 있는 정도가 구체적ㆍ체계적인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했고, 대체로 일정기간 동안에 특정한 지역에 집중적인 운동이 발생하게 하는 정도였음을 나타내준다.

③ 역사적 배경

해방 후, "미군"의 진주를 환영하였던 민중은 "미군정"의 정책이 기대와는 다른 내용으로 실시되자, "미군정"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으로 전환하였다. 민중이 요구하였던 친일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를 처벌하기보다는 "군정 요직"에 기용하고, 토지개혁 등의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여론이 더욱 높아져갔다. 1946.03월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결렬되어, 통일국가 수립에 대한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다.

"미군정"에 대한 비판은 "식량 문제"로 폭발하였다.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로, 쌀값이 폭등하고, 시장에서 쌀이 사라져,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거나 굶주리는 사람이 급증하였다. "미군정"은 미곡을 수집하여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46년, 전국에서 발생한 "콜레라"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교통을 차단하고, 더욱이 큰 홍수로 대체 농작물마저 부족하여 식량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미군정"은 식량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보리 수집"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강제로 식량을 공출하여, 농민들과 충돌하는 등 농민들의 불만은 커졌다.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식량배급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946.0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미군정"은 "좌파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간부를 체포하거나 체포령을 내리고, "미군정"에 비판적인 좌파 성향의 신문을 폐간시키거나, 정간 처분을 내렸다. "조선공산당"은 여기에 맞서, "미군정"에 대한 타협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비판하는 "신전술"을 채택하였다. "신전술"의 일환으로, "조선공산당ㆍ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은 "미군정"이 "철도노동자의 감원과 임금지급방식의 변경" 등을 계기로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946.09월, "부산의 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파업은 산업 전 분야로 확산되었다.

④ 이 사건을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직접 지휘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이 사건에는 "조선공산당"이 개입한 건 맞다. 그러나 당시 "조선공산당"의 지령은 "9월 총파업"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미군정과의 항쟁을 결의하면서도 아직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기본 수단인 노동계급의 파업"만 설정했을 뿐, 무력투쟁은 상정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얘기다. 총파업을 지휘했던 "박헌영"은 "10ㆍ1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군정청의 체포령을 피해 영구차의 관속에 들어가서 비밀리에 "북조선"으로 월북을 하게 된다. 이것만 봐도 "공산당"이 "10ㆍ1 사건"을 주도적으로 일으켰다고 한다는 건 좀 애매한 감이 있다. 설령, "공산당"에서 주도하고 지휘했다하더라도, 폭발할 대로 폭발한 민심을 뒷수습할 역할이나 역량이 되지 못했다.

이 사건은 "공산당의 선동"이라기보다는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이 집약되고 폭발한 것이라는 점이 가장 주목할 점이다. 이러한 사례는 "미군정기 한국"뿐만 아니다. 세계사에 무수히 일어난 대부분의 민중폭동들은 자신들이 승리하여 정권을 탈취한다는 보장 같은 것 없이도, 오직 "생존권"을 위해 혹은 비인간적인 현실에 저항해 생명을 걸고 일어난 것들이었다. 이 사건이 터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일제강점기의 지배층"을 제대로 가려내지 않은 미군정과 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수매, 미군정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좌익 사냥,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권력 복귀 등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게 된 민중들의 분노에 있었던 것이 1차적인 원인이다.

2. 당시, 대구경북 지역의 민심

"대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공산주의사회주의"활동이 가장 왕성한 지역이었다"독립 운동가" 출신 비율을 보면, 경상도 출신, 특히 경북 출신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은데, 이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들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독립 운동사"에 더하자면, 주로 "자유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했던 호남에서는 모순되게도 이른바 일제암흑기 시절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씨가 마르게 된다이후 이들의 자녀들이 일제강점기에 "광주학생 항일운동" 등을 일으키나, 이때도 어김없이 호남은 토벌되다시피 하여 죽은 학생이 나오는 등 여러 피해를 입었다때문에 사상 배경이 달랐던 "대구""광주"지역 사이 항쟁의 연관성을 많은 역사학자들은 부정하고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기 시기는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남한 민중들은 배를 곯던 시기로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쌀값이 10배 넘게 올랐다고 한다). 이는 당시 미군정 당국의 행정 능력이 매우 무능했다는 게 문제였다"식량정책"이 실패했음에도, "쌀이 없으면, 채소나 과실(과일)을 구해 먹으면 되지 않냐"고 변명했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특히, "대구- 경북"지역이 매우 심각했는데, 이 무렵 "대구- 경북"에는 "콜레라"가 창궐하였다"대구- 경북" 일대에 2,000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미군정은 "대구"로 출입하는 것을 통제했는데, 이는 "콜레라" 같은 전염성이 강한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광복 직후 한국도 아프리카 빈국처럼 기반시설이 빈약한 나라에서 생긴 질병이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는 기반시설이 탄탄한 선진국이라고 다르지 않은데, 미국에서도 1993, 남서부 지역에서 "한타 바이러스"가 출몰하자, 발병 중심지로 출입하는 것을 통제하였다.

"대구""콜레라 발병" 또한 마찬가지라,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전염병이 창궐한 곳에 대한 기본 조치였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의약품이나 생필품을 보급하여 전염병을 치료했어야 했는데, 미군정은 이 점을 소홀히 했다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대구시의 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무엇보다도 쌀이 부족했다. 돈이 있다 해도 쌀을 구할 수 없어, 콜레라를 치료하는 의사들조차도 콩나물과 쌀로 죽을 끓여 먹을 지경이었다굶주림은 극에 달해, 당시 노동자 생활치고 사정이 좋다는 전매청 담배공장 노동자들조차 궐련을 붙이라고 풀을 주면, 너무 배가 고파 그 풀을 먹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로 활동했던 세력들이 "미군정 경찰"로 다시 고용되어, 민중들을 아주 못살게 굴었고, 당연히 민중들의 불만은 날로 쌓여갔다이러한 상황에서 "대구- 경북" 지역의 민심은 매우 흉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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