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45.08 : 군정 (1945.09.09~1948.08.15)ㆍ해방직후의 활동

by 당대 제일 2022. 11. 9.
반응형

 

처음엔 좌우 관계없는 인사들이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했지만,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단체들이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좌익계열 인사들"이 점점 늘어났다. "소련"은 "인민위원회"를 인정했지만, "미국"은 "인민위원회"를 "공산당"으로 간주하며, 이들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 "소련 치스차코프 포고문"의 내용 :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고, 건국은 조선인들의 능력에 달려있다   • "미국, 맥아더 포고문"의 내용 : 38선 밑으로는 미국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공용어는 "영어"를 써야 한다.

 

1. 해방이후 활동 (조선인민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5.08.15 : 조선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 조직) 여운형을 중심으로 발족 

1945.09.02 :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장군(Hodge1893~196370)의 포고문을 비행기로 서울시 일원에 발포 , 미군이 진주하여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돕겠다.

1945.09.06 :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공산주의 계열)전국 국민대표자 대회에서 성립을 결의ㆍ중앙인민위원 (55): 민족주의자(9)여운형계 중도좌파(10명 내외)대부분이 박헌영 계의 재건파공산당 계열 (이승만(주석)여운형(부주석)허헌(국무총리) 김구(내무부장)김규식(외무부장)조만식(재무부장)김원봉(군사부장))

1945.09.09 : 미군정 시작 → 09.07 : 국민대회 준비회(임시정부 지지하는 민족주의 계열)발족 송진우김성수서상일김준연장택상 등 330조선인민공화국 타도 성명서 09.16, 한국 민주당 출범

1945.10.16 : 이승만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추대) 귀국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발족 조선인민공화국에 동의하지 않는다 11.12 : 조선인민당 발족 (여운형) 11.20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 (여운형허헌 등)

1945.12.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임시정부미소공동위원회신탁통치)→ 1946.03.20~ 1947.10.27 : 미소공동위원회

1947.03.12 : 트루먼 독트린 : 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냉전기간 중, 미국소련이 세력균형을 이루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미 대통령 트루먼이 "공산주의 폭동"으로 위협을 받고 있던 "그리스 정부지중해"에서, 소련의 팽창으로 압력을 받고 있던 "터키"에 대해 즉각적인 "경제군사 원조"를 제공할 것을 공약한 선언

1948.04 : 남북협상운동(4자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2. 군정

소련군 (1945.08.15~1948.09.09)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미군 (1945.09.09~1948.08.15) → 대한민국

1945.05월 초, "나치 독일"의 항복 이후, "대일전(1941~1945)"에 총력을 기울인 미국은 당시 일본 내에 "본토 결전"을 외치는 소리가 높음을 감안, 전쟁이 보다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소련(소비에트 연방군)"의 참전을 유도했다당시 미국은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의도"를 갖고 있었고, 1945년 해방 이전부터 한국의 독립능력에 회의적이었다. 미국은 전후 "뉴 월드 오더 구상"에 따라,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직접적인 식민지배 형태가 아니라, 한국을 강대국 관리 하에 두는 "신탁 통치안"을 추진했다.

그런데, 미국이 08.06"히로시마"에 핵무기를 투하시켜, 일본 제국의 빠른 항복을 기도했으나, 08.08"소련"이 선전포고하고, 소련에게 "일본 관동군"이 예상보다 쉽게 무너진데다가 설상가상으로 08.09일에는 "한반도"에 진입까지 시도해, 미국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08.09일에 "나가사키" 무기를 추가로 떨어뜨려, 일본의 더욱 빨리 항복하게 했다그러나 소련은 08.11"선봉군"을 점령한 후, 08.13~15일까지 "청진 전투"까지 벌이고, 08.15 "본 제국"이 항복했기 때문에, 미국의 한반도의 "단독 점령"은 불가능해졌다.

당시 미국의 "에드윈 폴리(모스크바 특사)해리먼(소비에트연방 대사)" 08.13"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련"이 한반도에 야심을 갖고 있으니, 당장 "한반도 전역만주"를 점령할 것을 건의하였다그러나 항복 당시, 이미 "소련군""한반도 동북부"를 폭격하고 있었고, "미군""필리핀"에 위치해 있어,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묵살되었다결국,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으며,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1945.08.10~15일까지, "소련""웅기군나진"을 점령한 후, 이어 "청진시"에도 08.15일 이후, 계속 4,000명의 "일본군"과 전투를 하고 있었다08.15일 오전 9시경, "조선 총독부""소련군"이 서울에 진입할 것을 두려워해, "총독부" "여운형"에게 맡기고, 일본 치안과 안정 등을 부탁한다그런데 "여운형"등은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기 위하여 "건준(건국준비위원회치안대)" 조직하였다가, 09.07"발전적 해소"라는 미명으로 이를 해산하였다"건준" 지도부는 09.06일에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3.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일 시 : 1945.12.16~25        장 소 : 소련 모스크바        참 석 : 3(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        내 용 : "2차 세계 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한 회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회의 결과 발표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해를 빨리 산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한다.        "연합국""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소 공동 위원회"가 수행한다.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대 강국에 의한 신탁 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4개국이 심의한 후, 제출한다.

그러나 "신탁"을 반대하는 "우익"과 찬성하는 "좌익"의 입장 차이는 대립으로 이어졌다이러한 "우익의 대립""미국소련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통한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3상 회의"의 결정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4. 미소공동위원회 (美蘇共同委員會)

일 시 : 1946.03.20~1947.10.27 (10.27, 소련 철수)        장 소 : 덕수궁 석조전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다.        내 용 : "한반도""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소련"이 개최한 회의. 개최 초기부터, "미국소련"의 의견차이로 인해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2차 위원회"지 열렸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

결 과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이 거세지는 가운데, "미국소련"은 합의의 실천을 위해 "소 공동위원회"를 열었으나, 회의 기간 내내, "소의 대립, 남한 내 정치세력 간의 갈등" 등으로 결국 어떠한 합의도 도출하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처음에 어느 정도 진전이 되는 듯한 기미가 보였으나, "신탁통치안" 문제가 논의되는 순간, 다시 난항을 겪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좌우합작"에 의한 "중도적인 정부"를 수립하려는 운동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으나, 1947.07.19"여운형"이 암살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1947.10"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도 성과 없이 결렬되고 해산되었다미국이 "한반도 문제""UN소총회"로 이관함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가속화되었고, 결국 남한은 각각 "단독정부 수립 확정"에 이르게 되었다"미소공동위원회" 해산이후, 한반도의 정부수립문제는 "미국"주도의 "UN 논의"의 장이 옮겨졌고, 1947.11.14, "UN""UN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가결하였다그러나 남한에 비해 인구가 적은 북한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은 결의안을 거부하였다.

이후 1948.05.10,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남한 단독"으로 실시되었다그러나 "김구" 등이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여 불참하였고, "제주도"에서는 04.03"단독정부 수립"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제주 43사건1948.04~1954.09) 한편, "북조선"에서도 09.09"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남북의 분단은 고착화되었다이러한 분단은 결국 1950"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의 도화선이 되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