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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37.08 : 수양동우회 사건 → 친일파 논란 발생

by 당대 제일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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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동우회 (修養同友會)"는 1926.01월,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ㆍ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가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 조직격으로 통합해 운영되었던 단체였다. 주로 "안창호"를 따르는 "서북 지역(평남 일대)"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지도이념은 "안창호"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이었다. "수양동맹회(안창호ㆍ이광수)"에 대항하여, "기호"지역 지식인 중심으로 결성된 "흥업구락부(이승만)"와는 일종의 경쟁 관계였다..

 

1.  수양동우회 사건 (修養同友會ㆍ1937.08~ 1938.03)

이 사건은 "민족분열 통치의 기폭제"라고 봐야할 것이며, "친일파 논란"에서도 빠질 수 없는 사건으로"사회의 명망가지식인" 등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친일로 전향시키기 위해, "일제"주도적으로 일으킨 "일제강점기 후반"의 대표적인 사건의 하나로, 이 때부터 "명망 있는 친일파" 대거 형성되어, 사회적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 강점기에 결성된 "교육계몽사회운동 단체", "흥사단" 계열(국내조직 격)의 단체이다"부르주아적 사회운동" 추진하고, 조선의 독립은 "이광수"를 중심으로 "자치론적 입장"이었다"기독교" 내의 오랜 "서북기호" 출신들의 갈등 속에, "수양동맹회(안창호이광수)에 대항하여, "기호"지역 지식인 중심으로 결성된 "흥업구락부(이승만)"와는 일종의 경쟁 관계였다.

수양 동우회 결성 : 1926~ 1938   실질적 운영자 : 이광수

 지도 이념 : 안창호의 무실역행 (務實力行) 공리공론을 배척하며, 참되고 성실하도록,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사상

인적 구성 : 북지역 지식인들 + 흥사단 + 수양동맹회 + 동우구락부 + 신민회 출신 + 대성학교 졸업생(안창호 설립)

 회원 (82명) : 안창호이광수김동원주요한주요섭홍난파정인이용설ㆍ미국 쪽 - 조병옥 (흥사단 미국 조직 간부급수양동우회 미국지부 지도감독)ㆍ장택상 (소극적)

이광수

1926, "수양동맹회(이광수)동우구락부(김동원)" 통합하는 형식으로 결성되었고, 이어 "흥사단" 계 국내 조직을 흡수해 나갔다1929, 국외 조직인 "흥사단"과 국내 조직인 "수양동우회"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했다"안창호"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으며, "안창호"를 따르는 "서북지역 지식인들(기독교가 먼저 전파된 지역)"이 중심이 되었다.

1937.08월,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1938년 대규모로 체포구속되어, 해체되었다"수양동우회"는 국내의 지식인들에게 자극을 주어, "흥업구락부청구구락부" 등의 청년 단체들과 독교계 단체인 "적극신앙단"의 조직에 영향을 주었다.

1937"중일 전쟁" 발발 시점에, "일본 제국"이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와해되었다이 사건으로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다"홍난파(작곡가)정인(장로교 목사)이용설(의사)" 등이 대표적이며, 중심인물이었던 "이광수주요한"은 특히 "극렬한 친일 행적"을 보였다1937, "동우회"는 해산되면서 "보유 자금토지사무기구를 매각한 금액"까지 긁어모아 "국방헌금"으로 납부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형무소"구속된 사람 중, "안창호(흥사단수양동우회의 지도자)"출옥한지 얼마 안 되어, 다시 투옥되었고,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으나, 얼마 안가 사망하였다"홍난파(작곡가지휘자)"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곧 사망했다"윤치호""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 보증을 서주기도 했다그러나 이후 터진, "흥업구락부 사건청구구락부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보증까지 서 주면서, 그는 궁지에 몰리기도 한다.

2. 결성통합

"안창호""상하이"에 머물 때, "상하이" 청년들이 1920년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했고, "경성부"에서는 "이광수""수양동맹회", 1923년에는 "평양"에서 "김동원" 등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졸업생신민회 출신들""동우구락부"를 조직했다. 언변이 뛰어났던 "안창호""미국" 내 한인 청년들을 설득하였고, 그 중 "조병옥장택상" 등을 "흥사단"에 가입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조병옥"과는 달리 "장택상" 활동에 소극적이었다1926.01, "수양동맹회동우구락부""흥사단 국내조직" 격으로 통합하여, "수양동우회"가 탄생했다조병옥은 흥사단의 미국 조직의 간부급 인사이면서, 수양동우회 미국 지부의 지도도 감독하였다.

3. 활동

회원 다수가 "기독교"가 먼저 전파된 "서북 지역"에서, "기독교"를 통해 개화문물을 접했거나, 변호사의사교육인목회자와 같은 전문 직업을 가진 지식인들이었다또한 실업인광산업자 등 자산가들도 다수 포함되었다"수양동우회""이상촌을 건설하는 농촌 운동"을 전개하고,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행했다"부르주아적 사회운동"을 추진했고,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는 "이광수"를 중심으로 "자치론적 입장" 울어져 있었다.

4. 수양동우회 사건 (1937.08~ 1938.03)

"식민 통치"가 길어지면서, "동우회"로 개칭한 뒤, 활동이 거의 없었던 "수양동우회"1937"중일 전쟁" 발발 시점에, "일본 제국"이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와해되었다본격적인 전쟁 체제를 조성하기 위해, "양심적 지식인부르주아 집단"을 포섭할 필요가 있던 "일제" "수양동우회흥업구락부"를 표적 수사한 것이다.

1937.08, "서울"에서 55, 11월에 "평안도"에서 93, 1938.03월에 "황해도"에서 33명 등 모두 181명의 "동우회원들""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이 가운데 41명이 기소되었다가, 1941.11월에야 "무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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