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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45.09 :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이유

by 당대 제일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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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0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제정된다. 이 법에 입각해서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다. 친일파 중, "이승만 정부"에서 중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 색출에 소극적이었다. "이승만"은 "빨갱이"를 언급하며, 반공 투사들을 잡아들이는 "반민특위"를 비난하는 연설을 한다. 잡아들인 친일파들은 단 1명도 법적으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1. 2차대전 승리 후, "중국"은 가장 먼저 한 것이 "친일파들"의 처형이었다.

한국에는 아직도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했고,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산다 왜 한국에서는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한 것인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부터 먼저 알아야 된다.

 프랑스 처형 : 나치 부역자 (1940.06~1944.08)

1944.06~1945.05 : 아무런 법적 절차없이 총살학살 : 3~ 4만 명 (역사학자 로베르 아롱) 선고를 거쳐 처형 : 779

 건국동맹 (建國同盟) :  향도자 (6): 여운형조동호황운이석구현우현김진우

1944.08.10, 조직된 한국의 비밀결사로서 광복을 맞이할 당시, 한국 안에서 조직적 실체를 유지했던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1945.08.16,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모체 역할을 하였고, 1945.10"정당"으로 탈바꿈했으며, 11월에는 군소단체들을 통합해 "조선인민당"으로 확대발전했다.

2. 조선 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방문

 1945.08.05, 조선 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여운형의 집을 방문한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총독"의 아래 2인자(총리), "군사통수권"을 제외한 행정사법을 통괄하던 직책  (엔도 류사쿠 (1886~1963ㆍ정무총감 근무 1944.07~1945.10) : 일본 무사시노 은행의 설립자ㆍ정치가ㆍ변호사)

여운형

일제 강점기, "여운형" 1944 "조선 건국 동맹"을 만든다. "여운형"은 자신이 만든 "조선건국동맹" "일본"에게 들켰나 싶어 놀랐다"엔도 류사쿠"가 여운형을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운형 : 나를 찾아온 용건은 무엇인가?     엔도 류사쿠 : 일본은 미국에 항복하고, 조선은 독립을 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에는 60만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는데,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일본인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러니 일본인들이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여운형 : 난 일본제국의 식민통치가 싫었을 뿐이지, 일본인 개개인들을 미워한 것은 아니다 너의 요구를 들어주겠다, 대신 나도 요구 조건이 있다 < 여운형의 협상조건   정치범경제범을 즉시 석방      경성의 식량 3개월 치 확보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간섭하지 말 것       학생청년의 훈련과 조직에 간섭하지 말 것      조선의 노동자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말 것

당시 "태평양 전쟁"을 위해, 각지에 흩어져 있던 무장한 "일본군" 32만 명 역시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반도로 집결하고 있었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조선인"의 폭동도 무서웠지만, 반대로 "조선" 입장에서는 패전한 "일본군"이 마지막이라며 한반도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 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가장 무서운 군대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패전군"이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거리에는 "일본"의 패전을 슬퍼하며, 할복하는 "일본군"도 많았기에 거리는 흉흉했다.

어떤 이는 "여운형" "엔도 류사쿠"의 요구를 들어주어서 나쁘다고 할 수도 있는데, 무장한 일본군 32만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기에, 패망한 "일본군"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그러면 조선인들의 목숨이 위험해지므로 무사히 일본인을 본국으로 보내주는 것이 오히려 조선에게도 안전했던 것이다.

  독립할 것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았고, 1945.08.16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만든다.

1945.09,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에도 정부를 대신해야 할 단체가 있어야 "미국" 협상할 때, 불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건준"을 국가적인 성격을 가진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 개편을 한다"여운형" "인공 주석"으로 "이승만"을 초대했지만, "이승만"은 거절한다"건준"은 한반도 전역에 치안행정교육 자치를 위한 지방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그 후, "북한"에는 "소련"이 들어오고, "남한"에는 "미국"이 들어온다.

처음엔 좌우 관계없는 인사들이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했지만,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단체들이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좌익계열 인사들"이 점점 늘어났다"소련" "인민위원회"를 인정했지만, "미국" "인민위원회" "공산당"으로 간주하며, 이들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소련 치스차코프 포고문"의 내용 : 조선의 독립을 축하하고, 건국은 조선인들의 능력에 달려있다    "미국, 맥아더 포고문"의 내용 : 38선 밑으로는 미국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공용어는 "영어" 써야 한다.

이 내용을 근거로 소련은 "해방군", 미국은 "점령군"이라고 학계는 해석했지만, 이 내용은 "이명박 정부" , 역사 교과서에서 사라진다그렇다고 "소련"은 좋은 나라이고, "미국"은 나쁜 나라라고 할 수는 없다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단체는 "시회주의 계열"이었기 때문에, "소련" 자신들이 개입하지 않아도 한반도는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위성국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고, "미국"은 조선인에게 "자본주의"를 알리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미국"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을 경계한 이유는 "일본" 탓도 있었다"일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미국"에게 한반도에 "사회주의 인사들"이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 한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3. "일본"이 패망하, 가장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바로 "친일파들"이었다.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숨기기 위해 08.15일 태극기를 흔들기도 하고, 밤에 야반도주하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1945.09.09, "미국"이 남한이 들어오고 나서, 위에 언급한 "맥아더 포고문"의 내용 중에서 추가할 내용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 공공기관에서 근무한 사람들의 "고용을 승계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이 남한에 들어올 때, 군인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행정 인력이 필요했고, 그들이 친일파였던 것이다. "미군정"은 나라를 배신한 매국노들은 "미국"에도 충성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친일파""미국" 덕분에 살아났고, 더 큰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물론 "북한"도 친일파가 100% 처형된 건 아니지만, "남한"보다는 친일파 청산에 적극적이었고, 북한에서 권력을 잡은 "친일파"는 극히 소수라는 점이다.

38선 밑으로 "미군정"이 관리하는 "남한"은 그래서 "친일파"를 청산할 수 없었다"일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김원봉(독립운동가)"은 남한의 친일파 때문에 분노하여 월북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기만 하다"미군정""김구의 임시정부여운형의 건준과 인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4. 1948.07.10, "이승만 정부"가 탄생했고, 국민들이 가장 바랬던 염원은 "친일파 청산토지개"이었다.

1948.09,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제정된다이 법에 입각해서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다1949.01월부터 "반민족 처벌 행위"가 시작된다이때, 친일파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김연수(김성수(고려대 설립자) 동생김성수도 친일파 논란이 많음)최남선(기미독립선언서 작성자)이광수(28독립선언서 작성자)최린"이 붙잡힌다특히 "최린""조선이 독립할 줄 몰랐고, 일본에 의해 조선인이 차별당하는 것보다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친일을 했다면 국민들에게 돌을 맞아 죽어도 싸다"며 반성을 하기도 했다나머지 사람들은 반성없이 변명을 했다.

친일파 중, "이승만 정부"에서 중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 색출에 소극적이었다"이승만""빨갱이"를 언급하며, 반공 투사들을 잡아들이는 "반민특위"를 비난하는 연설을 한다마침 "국회 프락치 사건"도 발생하고, "반민특위"는 빨갱이를 위한 단체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게 되고, "반민특위"는 거물급 인사들은 건드리지 못하게 된다"반민특위"가 그 다음으로 잡아들인 친일파가 "노덕술(일제강점기 고문경찰)"이었는데, 경찰이 국회를 습격해서 "노덕술"을 구출시키는 일이 발생한다이 일의 배후에는 "이승만 정부"가 있었고, "반민특위"는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그리고 잡아들인 친일파들도 단 1명도 법적으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5. "친미의 뿌리""친일"이었다는 사실

보수지지 성향의 주장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친일파 청산보다, 사회주의 계열 인사가 주도하는 공산화를 저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는 주장이다"북한"에서는 친일파를 청산하고, 토지개혁으로 지주들의 땅을 몰수하니까, 그 사람들이 남한으로 내려와서 반공세력이 되었고, "이승만"을 지지하게 된다"이승만"은 남한에서 자신의 지지기반 세력이 약했는데, 자신을 지탱해 줄 세력을 만들기 위해, "친일파"를 옹호했다"친일파"의 후손들이 한국의 기득권층이 되고 지배계급이 되었는데, 친일파가 제대로 청산되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변했을 것이다.

"""빨갱이"로 몰아가고, """친일파"로 몰아가게 된 것이다특히 "친일파" 중에는 "일본"을 찬양하며, "일본"이 조선을 발전시켜 주었다거나 위안부 할머니들은 창녀였다거나,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하기 때문에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친일파보다 독립운동가들이 대접받아야 되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냐심지어 "친일파들"은 독립운동가들의 평가를 깍아 내리고, 조선 독립은 순전히 "미국" 덕분이라며, "미국"을 치켜세운다.

6. 사"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은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남겨두려 했고, 독립을 반대했다.

한국은 "미국" 때문에 독립을 못 할 뻔했다"2차대전" 승전국인 "중국 장제스"가 조선 독립을 요구했다"미국""중국"에게 "오키나와"를 줄테니까, "조선""일본의 일부"로 남겨두자고까지 한다"장제스""오키나와"를 포기하면서까지, 조선 독립을 강하게 지지했다솔직히 말하면, 한국 독립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 덕분이다"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공산주의자"가 된 이유는 "이승만의 탄압" 때문이라는걸 부정할 수 없다

"친일파들"은 과거의 친일 행적을 진심으로,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다면, 좌우 대립은 사라질 것이다참고로 "프랑스""친나치 행위자들"1만 명이나 처벌했는데, 한국은 "자유를 지킨다"는 변명으로 1명의 친일파도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진짜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사실은 "친일파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은 평등을 중요시했던 것이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로 몰아간 것이 "친일파들"이 아닌가!

제일 처음에 언급한 "엔도 류사쿠""여운형"을 찾아가기 전에, "친일파들"을 찾아가서 일본인들의 안전을 요구했는데 "친일파들"은 변절했다"일제 강점기" 친일파들도 일본이 패망하고, 세상이 바뀔 거라는 걸 알고, "일본"과 변절했는데, 지금도 "친일"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미국""신탁통치" 때문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졌고, "미국"이 극동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켰기 때문에 "625 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은 한일외교 분쟁 때는 "일본 편"이라는 점이다"625 전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나라가 미국일본이다남의 나라의 불행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던 셈이다.

7. 광복회장 발언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이 "친일파"를 부활시켰다.  "소련"은 "해방군"으로 들어왔고, "미군"은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시작은 "얄타회담"이다(얄타 회담 : 1945.02, "루스벨트처칠스탈린""나치 독일의 패배"와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크림반도 얄타"에서 만나 회담을 했으며, 1946"얄타협정"이 공표되었다"루즈벨트스탈린""얄타"에서 만나서, "독일"은 곧 패망하고 정리가 되니, "일본"을 정리해야 하니, "소련"이 좀 내려와서, "관동군(만주 쪽)"을 좀 없애달라고 한다"미군""이오지마" "태평양"에서 "일본"이랑 치열하게 싸운다. 얄타회담" , 이미 한반도를 분할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관동군"의 관할 범위가 "한반도 북부 평안도함경도" 지역이어서, "한반도 북부" 들어온다

"소련군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쉽게 "관동군"을 깨부수고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조선인에게 발표한 "포고문" 등을 발표하게 되는데, 마지막 줄에 "해방"이라는 단어가 나온다"소련군"보다 늦게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 맥아더 사령관"도 포고령을 발표하는데, "점령"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된다"소련군""북의 인민위원회 자치"를 인정해주는데, "미군""맥아더 포고령 1"에 의해서 "미군정" 만이 유일한 정부임을 밝힌다.

"충칭 임시정부한국 광복군" 등의 무장해제를 지시하며,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김일성" 등이 "소련군"을 등에 업고 들어왔기 때문에, "조선의용군" 등은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신의주" 등에서 "조선의용군 선발대" 등을 받아들이는 척했다가, 강제로 돌려보내서 "중국 공산당" 편에 서서 싸우면서 힘을 보탠 "조선의용군"을 돌봐주던 "중국 공산당""소련" 마찰을 빚기도 한다"""인민위원회""친일 경찰" 등을 숙청한다.

"미군 맥아더 사령관 포고령 제2""친일파를 부활시켰다"고 하는 조항이라고 이야기한다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이제 친일행각이 드러나서 죽을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숨고 피해 살았던 사람들이 "포고령 제2"를 기반으로 다시금 제 위치를 찾게 되면서 반공을 외치게 됩니다"미군"은 행정치안에서 일을 해왔던 친일 잔존세력들을 계속 중용하여 행정업무를 수행해 나간다"일제 패망" , "미군""점령군"으로 들어왔다. 1945.10"미군" 철수. 한국전쟁 때 "미군" 참전

1953.10, "한미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동맹군"으로 주둔하고 있다"소련""해방군"으로 들어왔다고 하지만, 북한 주민들이 시계를 차고 있으면 다 빼았거나 지주들을 곱게 보지도 않았으며, 군표를 남발해서 인플레를 유발하기도 했다"해방군"인데 오히려 환영받지 못했던 것이다"소련군"이 북한 주민에 대한 약탈강간 등의 사건을 그대로 "평양"에 있던 "소련군 사령관""연해주" 있던 "상급부대"에 보고한다"신의주함흥"에서는 학생들 위주로 "반공 의거"가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소련군"은 말만 "해방군"이지, 오히려 "점령군"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소련군""독일 패망" 후에도 "베를린"에 사는 여성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함부로 하게 된다"소련"은 이미 "김일성" "사회주의 세력" 등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당시 "인텔리 지식인층"에는 "사회주의"에 흠뻑 취해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미국"은 왜 "점령군"이라고 자처했을까"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유럽태평양"에서 힘겨운 싸움을 많이 하게되었고, 전쟁에 많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좀 더 수월하게 일을 처리하고 해결하고 싶었던 거 같다"유럽"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병사들은 "크리스마스" 전에 "미국"으로 돌아간다그러나 "미국" "일본 본토"에 들어가기까지 정말 험난하고 힘든 전쟁을 계속하게 된다"이오지마 전투" 등을 하면서, "해병대" "미군들"이 많이 죽어 나가게 되면서, 결국 "원자폭탄" "일본 본토"에 투하하게 되는데, "일본" "태평양 전투사이판 이오지마 전투" 등에서 강렬하게 싸우게 된다. (반자이 돌격가미가제 등)

"미군"은 더욱 강한 "점령군"으로 "일본 땅"을 밟게 되어 쉽게 저항을 물리쳐야, 상대 "일본"이 협력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의 차이랄까"나치 독일일본 군국주의" 군인들과 직접 싸워보면서, "아시아 태평양 전략"이 수립된 거 같다이어서 "한국"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우리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해서 승전국의 지위를 가져야 "프랑스"처럼 지위를 가질수 있었는데, "일제 패망""프랑스"와는 다른 차원이 돼버린다.

"일본""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고, 본토에 상륙한 미군은 중무장하고 들어왔는데, 모든 지역에서 저항 등을 일체하지 않아 "미군들"이 놀랐다고 한다그래서 "미군""중무장""경무장"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반자이 돌격 (Banzai attackBanzai charge万歳 突撃)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즐겨 사용한 보병의 대규모 착검돌격을 지칭하는 연합군 용어다즉 총검이나 군도를 갖추고 돌격하여, "백병전"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반자이"라는 말은 "만세(萬歲)"의 일본 독음이다. 즉 단순히 다른 국가들처럼 흔한 "만세 돌격"이다"천황 폐하 만세"라는 구호는 "일본군 수뇌부"가 부족한 화력보급을 "총검 돌격"으로 메꾸기 위해 강구해 낸 방법으로, 병사들로 하여금 천황에 대한 광신적 충성으로 두려움을 잊게 해서 빠르게 적진으로 돌격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를 위해 돌격 전, "메스암페타민(히로뽕)"을 투여하는 일도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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