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民生團 ) 사건"은 1932.11~ 1936.02월까지 발생한 사건으로, "중국 공산당"이 친일 단체인 "민생단"과 관련된 혐의로, "조선인 공산당원"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조선인들을 체포ㆍ살해한 사건이며, 동만(東滿)의 한ㆍ중 연합 항일유격대와 공산주의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한 일제의 공작사건이다.
1. 민생단 사건 (民生團)ㆍ반(反) 민생단 투쟁사건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의 "조선인 마녀사냥"으로, "간도참변"에 이어 "조선족 사회"를 작살냈다. 수많은 "좌익계 독립군들"과 후배지 역할을 하던 "조선족 인사들"이 "일본제국 밀정"으로 의심 받아, 처형당했으며, 이런 마녀사냥을 주도하던 조선인도 막판에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되고, 그 처형을 주도하던 인사들까지 "민생단"으로 처형당한 후에야 끝났다.
한국인 항일투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한국ㆍ중국 간의 민족 갈등을 첨예화시켰다. 중국 공산당 내, "민생단 간첩"이 전원 한국인이었으므로, 중국인이 한국인을 믿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무고하게 처형된 한국인 가족과 동료가 중국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인ㆍ중국인의 연대가 약해지게 된다.
• 일 시 : 1932.11~ 1936.02
• 장 소 : 만주국의 동만주 (간도 일부 지역)
• 피 해 : 367명ㆍ실제는 1,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500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비공식적으로는 약 2,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2. 사건 경과 (요약)
① 일제의 문화운동으로, "민족주의 우파 독립운동가"가 변절(민족 개량ㆍ실력 양성ㆍ자치) / 좌파 세력은 비 합작ㆍ단독 투쟁 노선ㆍ독자적 세력과 투쟁력 확보
② 1930.05.30 : 간도폭동ㆍ광주 학생운동→ 극한투쟁 시작
③ 1931.09.18 : 만주사변→ 중국 공산당과 합작, 항일전선 구축→ 1932.03월 : 만주국 (일제 괴뢰정권)수립→ 동만의 한국인과 중국인 연합ㆍ항일무장투쟁
④ 1932.02월 : 일제는 "간도(間島)에서의 조선인 자치"를 슬로건으로, 한ㆍ중 민족을 분열시키고, 항일유격대를 무력화 시도→ 박석윤(경성 매일신보 부사장ㆍ친일파ㆍ최남선 매부)으로 "민생단(民生團)" 조직
⑤ 1932.02.05 : "박두영" 단장(일본군 대좌출신)→ "용정"에서 민생단 발족→ 조선 총독부ㆍ간도 일본 영사관에서 후원
⑥ 1932.07월 : 일시적으로 사무소 폐쇄→ 일본 헌병대에서 다시 조직하여 후원
⑦ 1932.12월 :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가 "송노두(연길의 농민협회 기관지 인쇄책임자)" 처형→ 1933.12월까지, 200여 명의 한국인 처형→ 1935년까지 숙청
⑧ 1934.09월 : "김동한"이 "간도협조회(間島協助會)" 결성→ "김동한"은 약 2,000여 명의 귀순자ㆍ변절자 규합, 공작대를 조직하여 유격대 분열공작 전개
⑨ 1934.10월 : 항일유격대세력이 "민생단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한 "반 민생단 투쟁" 전개ㆍ중국공산당 동만(東滿)특별위원회ㆍ항일유격대의 지도자격인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민족배타주의"에 빠져, 한국인 항일투사의 대부분을 "민생단"으로 간주→ 조선인 공산주의자까지 파벌싸움으로 "민생단"으로 숙청→ 500여 명의 한국인 항일운동가들이 체포ㆍ살해ㆍ도주 → 하부조직 마비
3. 배경
1915.05월, "위안스카이"의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과 21개조 요구로 알려진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중일민사조약(中日民四條約ㆍ만몽조약(滿蒙條約))"은 "남만주ㆍ동부 내몽고 지역"에서 일본인의 토지 소유에 관한 특권ㆍ영사재판권 등을 규정하였는데, 일본은 조선인도 이 조약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간도지역"의 조선인에 대한 "보호"를 구실로,만주에서 자신의 세력을 손쉽게 확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1913.11월부터 "간도지역"에서 설립되기 시작한 친일 어용단체인 "조선인민회(민회)"가 일본영사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조직 규모를 점점 늘려가고,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와,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토벌을 명분으로 군사 행동을 벌이는 등 만주 지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1920년대 중반 이후로는 태도를 바꿔 조선인에 대한 압박과 탄압을 벌였고, 현지 중국인들 또한 조선 이주민에 대한 경계와 배척의 경향이 높아졌다.
간도 지역의 조선인은 일제의 탄압ㆍ친일 단체의 통제ㆍ중국인의 배척이라는 3중고에 빠진 상태였다.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나자, 조선인들의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고,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군사적 침략을 시작하자, 중국인과 조선인의 사이의 갈등 또한 더욱 심해졌다.
4. 민생단이란?
"민생단(民生團)"은 1932.02.15~1932.07.14일까지 존속한 단체로서, "간도지역"의 기존의 민간단체들, 특히, "조선인민회(민회)"로 대표되는 친일 부역자들과 그 외 민족주의 운동가 등이 모여 설립하였다. 친일파 "박석윤(경성 매일신보 부사장ㆍ최남선 매부)ㆍ조병상ㆍ김동한ㆍ김택현ㆍ이경재ㆍ이인선ㆍ최윤주ㆍ 전성호" 등이 설립에 참여하였다.
"민생단"은 "간도지역" 조선인의 생존권 확보, 구체적으로는 조선인 권익 옹호ㆍ조선인 자치를 표방하였으나, 막상 설립 후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정책을 지지하며, 친일ㆍ반공활동을 벌여 지역 대중의 분노를 샀고, 중국 공산당조직ㆍ조선인 독립군 등 반일무장세력은 "민생단"에 대한 탄압에 들어갔다. 각지에서 민생단 가입자에 대한 살해 위협ㆍ폭행 등이 이어졌고, 이는 많은 사람들의 "민생단" 탈퇴로 이어졌다. "동아일보(03.26일자)" 보도에 따르면, "민생단" 혐의분자 7명이 공산당에 의해 살해된 사건도 벌어졌다. 이에 대항해 "민생단"은 마을마다 자위단을 조직할 것을 계획하고 "일본총영사관"에 허가를 얻었으나, "간도"에서 조선인들이 무장 단체를 갖추고 정치적 조직을 키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일본"은 정책을 바꿔 자위단 결성에 반대하고 "민생단"에도 압력을 가한다. 이에 "민생단"은 1932.07월, 사무소 폐쇄를 신고하고 자진 해산한다.
"간도 자치" 얘기는 애초부터 "민생단"이 "중국공산당"에게 확실하게 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간도 지역"은 중국 영토에 속하나, 조선인이 이미 인구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동북지방 군벌 정부의 부실한 행정으로 인해 만주 지역의 안정성도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931.09.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여 그 일대가 완전히 정치적ㆍ행정적 진공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조선인 자치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중국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또 하나의 도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5. 민생단 사건의 시발점, 송노톨사건
"중국 지린성 옌지현 라오터우거우 (老頭溝ㆍ노두구) 당 위원회"의 비서 "송노톨(이송일(李宋一)ㆍ30대 초반의 중년이나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서 노톨 = 老頭(라오터우)이라고 불림)"은 자신이 1932.08월경, "노도구 일본헌병 분견대"에 체포되었다가, 1주일쯤 지난 후 항일유격대로 찾아와 "일본헌병대 구류소"를 탈출했다고 진술하였다. 당 위원회에서는 그의 체포ㆍ탈옥 과정에 대해 의심하여 원래의 비서 직무를 취소하고 "옌지현 농민협회"에서 꾸리는 "농민투쟁보 사"로 보내 인쇄소에서 일하게 하는 한편 감시ㆍ조사를 진행했다.
10.16일, "시린허(細鱗河ㆍ세린하)" 일대에서 활동하던 "옌지현 항일유격대"는 "매봉산"에 지형정찰을 나온 "노도구 일본헌병 분견대" 소속 "상등병 고노(河野)"와 통역인 등 3명을 발견, "유격대 장총대 분대장 최현" 지휘 하에 이중 2명을 사살하고, 통역관을 생포했다.
통역관은 심문에서 "송노톨"은 현병대에 갇혔을 때, 매수되어 "민생단"을 조직하여 유격대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사명을 가지고 파견된 사람이라고 진술했으며, "헌병대"에서 이런 임무를 받을 때 자신이 통역을 섰다고 덧붙였다. "최현" 등은 통역인을 데리고 "동만특위"로 갔고, "동만특위"에서는 "송노톨"을 체포ㆍ밀정 혐의에 대해 심문했다. 처음에는 혐의를 강력히 부정하였으나, 통역인과 대질 후, 입을 다물게 되었다. 이어서 "민생단원" 명단을 대라며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송노톨"은 20명의 조선인 간부ㆍ당원들을 "민생단" 동료로 지목하였다.
"옌지현 현위원회"는 "송노톨"의 자백을 근거로, "옌지현" 내의 모든 당 조직과 항일단체 내부에서 "민생단 숙청운동"을 벌였다. "송노톨"은 변절자로 인정되어 처형되었고, 진술을 통해 지목된 20여 명도 바로 체포ㆍ심문을 받게 되었다. 가혹한 고문ㆍ자백 강요를 거쳐, 적발된 "민생단원"은 날로 늘어났다. "민생단원"으로 지목된 많은 사람들이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모조리 체포ㆍ감금ㆍ심문 받았고, 이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억울하게 처형당하였다.
당시 항일유격대세력들은 "민생단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한 "반 민생단 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동만(東滿)특별위원회"와 "항일유격대"의 지도 직을 차지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민족배타주의"에 빠져 한국인 항일투사의 대부분을 "민생단"으로 간주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파벌에 물든 일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까지도 자신들에게 가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민생단"의 감투를 씌웠다. "반 민생단" 투쟁은 동만(東滿)일대의 공산주의운동과 항일무장투쟁에 커다란 혼란과 위기를 가져왔다. 500여 명의 한국인 항일운동가들이 체포ㆍ살해되거나 도망가야 했으며, 많은 하부조직들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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