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근 • 현대사)/사건

사건- 1932.01 : 상하이 사변 ㆍ지나사변 ① → 중일전쟁 (1937~1945)

by 당대 제일 2022. 10. 12.
반응형

 

"중일 전쟁 (中日戰爭ㆍ1937.07.07~1945.09.02)"은 1937.07.0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전쟁으로"중일 전쟁"은 20세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1. 중일 전쟁 (中日戰爭ㆍ1937.07.07~ 1945.09.02)

중국항일전쟁 (中國抗日戰爭→ 중국)ㆍ일중전쟁 (日中戦争ㆍ지나사변→ 일본)ㆍ제2차 중일 전쟁 (2nd Sino-Japanese War→ 서양)이라고 부른다.

• 일 시 : 1937.07.07~ 1945.09.02 (소규모 충돌 : 1931.09.18~ )

• 장 소 : 만주ㆍ중국 본토ㆍ버마

• 결 과 : 연합국의 승리ㆍ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ㆍ일본은 만주/ 타이완/ 펑후 제도를 중화민국에 반환ㆍ중화민국의 연합국 지위 인정→ 중화민국이 유엔 상임 이사국이 됨ㆍ국공 내전 재개ㆍ북위 16도선 이북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중화민국 군 주둔

• 교 전 : 중국(국민당/ 공산당)ㆍ미국(1941~)ㆍ소련(~1941/ 1945) ㆍ중화민국 임시정부(~1940), 중화민국 유신정부(~1940)  -- 일본제국ㆍ만주국(1932~)ㆍ몽강연합자치정부(1936~)ㆍ왕징웨이 정권(1940~)ㆍ중화민국 지둥방공자치정부 (1937~1938)ㆍ나치 독일(1933~1938) 

• 지 휘 : 중화민국- 장제스ㆍ허잉친ㆍ천청ㆍ옌시산ㆍ펑위샹ㆍ리쭝런ㆍ쉬에위에ㆍ바이충시ㆍ쑨리런ㆍ푸주워이ㆍ두위밍ㆍ청취엔 /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ㆍ저우언라이ㆍ주더ㆍ펑더화이ㆍ린뱌오 / 미국- 조지프 스틸웰ㆍ클레어 첸노트ㆍ앨버트 웨더마이어 / 소련- 바실리 추이코프ㆍ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일본 제국- 히로히토ㆍ도조 히데키ㆍ고노에 후미마로ㆍ간인노미야 고토히토ㆍ마쓰이 이와네ㆍ스기야마 하지메ㆍ하타 슌로쿠ㆍ니시오 도시조ㆍ오카무라 야스지ㆍ우메즈 요시지로 / 만주국- 아이신교로 푸이ㆍ장징휘

• 병 력 : 중국- 560만 명ㆍ항공기 900대 (미ㆍ1942~1945)  /  일본- 410만 명ㆍ부역자 90만 명ㆍ전차 2,000대ㆍ항공기 10,000대 이상

• 피 해 : 중국- 전사(332만 명)ㆍ부상(160만 명)ㆍ공산당원(30만 명 사상) = 계 : 522만 명 사상 / 일본- 전사(106만 명)ㆍ부상(117만 명) = 계 : 223만 명 사상

2. 중국 민족주의ㆍ민족자결주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으며,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ㆍ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되었다. 1937년 이전에는 양쪽이 다양한 이유로 소규모, 국지적 전투를 벌였다. 1931년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과 함께 1945.09.02.일 종료되었다.

1931.09.18일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년의 "루거우 다리 사건 (盧溝橋事件ㆍ노구교 사건)"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7~1941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일본에 맞섰으나, "진주만 공격" 후 "중일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4년 즈음에 일본은 이른바 "대륙 타통 작전"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945.08.15일 천황 히로히토가 연합군에게 발표한 무조건 항복 선언과 09.02일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을 끝으로 중일전쟁 역시 종결되었다.

※  관동군 (關東軍ㆍ1906~ 1945) : 중국과 소련을 침략할 목적으로 1906~1945에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하고 있던 일본 육군 주력부대의 하나"일 전쟁" 승리 후, 러시아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인수하여 "관동주"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는데, 이때 "관동주" "남만주 철도"의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

※  만주국 (滿洲國ㆍ1931~ 1945) :  "일본제국"이 "만주사변" 직후부터, 만주지역에 세운 "괴뢰국(꼭두각시 국가)"이다. 1932.03.01 만주국을 선포하고, 03.09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푸이)" "황제(강덕제)"로 내세운, 일본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다.

3. 연 보

 노구교 사건 (1937.07.07) : 일본군중국 제29군의 교전 "일 전쟁" 발발 → 광안문 사건(1937.07 하순): 베이징성에서 중국군일본군의 교전

 상하이 전투 (1937.08~09) : 상해상륙작전: 상륙과정에서 일본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25만의 "국민당 군"이 일본군에 참패 → 보정 전투(1937.10): "화북 방면 중국군" 14개 사단이 "일본 북지나 파견군 제5사단"을 공격했으나, 본군 20사단의 증원으로 퇴각 → 태원 전투(1937.10): "신생 8로군 3개 사(115120129)"의 연합공격으로 "일본군 5사단"에 심각한 피해를 입힘, 이 전투에서 "등소평"이 정치위원으로 맹활약

 난징 대학살(1937.12.13~1938.01 말) : 일본군이 "국민당 수도 난징"을 점령ㆍ6주간에 걸쳐서 중국인 30만 명 학살

 태아장 전투(1938.05) : "국민당군 제5전구군"이 이종인의 지휘 하에 일본군 1만여 명 사살ㆍ"국민당군" 최초의 승전보  서주 전투(1938.05.10): 일본군에 의해 점령  광주 전투(1938.05.10): "일본 남지나 파견군"이 중국 남부 "광동성의 광주"를 점령  무한삼진 전투(1938.10.29): 일본군이 "무창" "한구"를 점령

 백단 대전 (1940.03~12) : "8로군 115개 단(연대)"과 학생의용군이 "산서성하북성"의 일본군 근거지 공격ㆍ"8로군" 2 2천 명 전사, 일본군도 큰 피해

 환남 사변 (1941.01) : 일본군을 치기 위해 이동 중이던 "공산당 신4" "국민당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9천 명 전사. 군장 "엽정"은 생포, 부군장 "항영" 전사

 둘리틀 공습 (1942.04.18) : "둘리틀 중령"의 폭격대가 중국 "복건성절강성" 일대에 불시착해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퇴각ㆍ일본군의 보복으로 중국인 25만 명 학살

 태항산 전투 (1942.05~06) : 일본 "북지나 파견군"의 본격적인 "산서성섬서성" 공략으로 "태항산"이 함락ㆍ중국공산당과 8로군 지도부는 연안 일대로 퇴각, 이 전투에서 화북 조선의용군의 "김무정"이 활약  후카웅 전투(1943.10): "리처드 스틸웰 장군"의 미군 레인저부대와 "손입인 장군"의 중국군 2개 사단이 "버마 후카웅 계곡"에 진출해 일본군에 큰 손실을 입혔으나, 버마로 이어지는 진격로를 확보하지는 못함

 1기 대륙타통 작전(1944.08) : 일본군이 설악 장군의 국민당군 제9전구 30만 명을 격퇴하고 형양계림 점령

 2 대륙타통 작전(1944.11) : 일본군이 "유주"를 점령. 미국은 중국이 일제(日帝)에 완전 붕괴될 가능성까지 있다고 예상해 "부통령 헨리 A.월리스", 참모총장 "조지 마셜"을 중국에 파견

 1945.08.15 : "히로히토" 천황, 무조건 항복 선언 (일본 제국 패망)  1945.09.02 : "일제(日帝)", 미국 "군함 미주리 호"에서 항복문서에 조인(연합국에 정식 항복)

4. 영 향 : 쌍십협정국공내전 발발타이완 정부(1949.12) 탄생

"일 전쟁" 기간 중, 중국대륙의 주요 도시들은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희생되었다당시 "중국 국민당"이 집권했던 "중화민국 정부군"은 부패하고 무능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편제 조직도 엉망이었다

반면, "중국 공산당"은 일본군과 싸우면서 민심의 지지를 얻어가면서, 뒤로는 "공산당 조직 강화"를 도모했다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전쟁이 끝나자, 평화를 바라던 중국인들의 열망에 따라, 내전을 피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 "중국 공산당" 간에 회담이 열렸는데, 여기서 "쌍십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이 협정을 무시하고,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고, "공 내전"이 재 발발하게 되었다부패하고 무능한 "국민당"의 행태와 "일 전쟁"  "일본제국"에 부역한 "매국노 한간"에 대한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중화민국" 정부의 태도에 등을 돌린 민심은 "공산당"을 지지하였고, 결국 민심을 잃은 "국민당" 내전에서 "공산당"에 패하여, 1949.12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겼다한편, "공산당"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면서, 중국은 분단되었다.

"일 전쟁"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발발한 "2차 세계대전" 1941년 발발한 "태평양 전쟁"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있으나, 일본 제국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태평양 전쟁"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역사에서 매우 큰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1939.09.01 "나치 독일" "폴란드 침공" "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는 유럽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1937.07.07일 발발한 "일 전쟁" "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5. 배 경 : 일본의 상황 (다이쇼 시대쇼와 시대만주사변)

1914년 유럽중동에서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은 "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에 가담하여 참전했다그 진의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령"이었던 "중국 산둥반도" "교주만"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산둥반도"를 점령한 일본은 1915.01월 중국에 대해 "만주"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21개의 특혜조건을 요구하였고,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부" 1915.05월 이를 수용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54운동(1919)"과 같은 격렬한 배일 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

 21개조에 대한 처리는 중국의 민중이 "위안스카이"에게서 이탈하는 계기가 된다일본이 이와 같이 아시아의 독보적 강대국으로 인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 무렵 일본 제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로 경제호황을 누렸다그러나 1920년대 말, "경제 대공황"을 맞게 되면서,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극우 군부세력들이 암살 및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고, 일본의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었다이어 일본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더욱 확보하고자 침략 전쟁의 길을 걷게 된다.

자원이 풍부한 "만주지역"을 얻으려고 전쟁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만주군벌 장쭤린 폭사 사건" 등을 조작하였고, 만주침략에 반대하였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수상"을 암살한데 이어, 1931년 선전 포고도 없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만주사변"으로 만주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일본 제국은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웠다이어,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만 블록경제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한편, "국제연맹"은 만주를 불법 침략점령한 일본 제국의 "만주지역 철수"를 결의하자, 일본은 1933.03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였다"국제 연맹(연합국)"이 일본군의 만주지역 철수를 결의한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의 연장인 "터키 독립 전(1919~1921)"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 시민군"에게 패함으로써, "로잔조약(1923)에서 식민지 일부를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서방 국가들은 일본이 식민지 확장에 나서는 것은 일본의 강대국 부상의 지름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나오는 것을 못 마땅해 했다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식민지를 포기하게 되었을 때, 일본에게도 똑같이 식민지 포기를 요구한 것이었다.

6. 배 경 : 중국의 상황 (신해혁명북양 군벌1차 국공합작)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 대륙은 격동의 시대였다. 중국의 사회질서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한편으로, 각지에서는 혼란을 틈타 여러 군벌세력들이 발호하였고, 이러한 "군벌세력"들은 주민에 대한 온갖 갖은 수탈과 함께 열강세력에 빌붙는 등 매국행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산둥지방 내 독일제국의 이권을 일본제국에 양도한다"는 "파리강화회의"의 내용이 알려지자, 1919.05월 "베이징" 지역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 군벌ㆍ반 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5ㆍ4운동) 1919년 "5ㆍ4 운동" 이후, 중국에서는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광둥"지방에서는 "국민당(1919. 10.10)"과 "공산당(1920.08)"이 창당되고, 1924년부터 여러 지역에 널리 퍼진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국민 혁명", "제1차 국ㆍ공 합작(~1927)"이 전개되었다.

국민당의 당수 "쑨 원"이 사망(1925)한 이후, "국민당" 당수가 된 "장제스"는 "쑨 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북벌운동"을 전개하여 강력히 추진하였다. "장제스"는 "북벌운동"으로 "북양 군벌"세력들을 몰아내고 사실상 중국을 장악하게 되었고, 1927년부터는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제1차 국ㆍ공 내전 1927~1936)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본제국의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중국 공산당"을 토벌하는 데 차질이 생긴 "장제스"는 "군벌 세력"들과 연합하게 된다.

7. 만주 사변 (滿洲事變) : 918사변1931.09.18~1932.02.1815년 전쟁의 시작

1931.09.18일, 일본 제국이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 만철 폭파 사건)"을 조작해,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을 말한다. "만주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 전쟁"의 시작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서곡(序曲)을 이룬다.

<  요 약 >

제1차 세계대전 종전(1918)→ 일본이 "장제스의 국민혁명군"과 싸우던 중국의 군벌 "봉천파(장쭤린, 일본 지원)"에게 퇴각 권고→ "관동군" 일부 참모가 반발하여, "장쭤린" 암살(1928)→ "관동군"과 "봉천파"의 협조 종결→ "장쉐량("장쭤린" 아들) "국민당 정부(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합류(1929)→ 만주에서 일본의 이권에 타격→ 만주 전체 침략을 위해 "만보산 사건(1931.07)", 자작극 "류타오후 사건(1931.09) 발생→ "동삼성" 전역 점령(1932.01)→ "만주국(괴뢰정권)"(1932.03)→ 국제연맹 비난탈퇴→ "중일전쟁(1937.07.07~ 1945.09.02)→ 제2차 세계대전(1939.09.01~ 1945.09.02)

• 일 시 : 1931.09.18~ 1932.02.18        • 장 소 : 만주ㆍ중국        

• 결 과 : 일본 승리      • 교 전 : 중화민국(국민혁명군) - 일본제국 육군

• 지 휘 : 중화민국- 장쉐량ㆍ마잔산ㆍ펑잔하이ㆍ병력 : 160,000명 /  일본제국- 혼조 시게루ㆍ미나미 지로ㆍ병력 : 30,000~ 66,000명

제1차 세계대전 종전(1918) 이후, 일본이 지원하는 중국의 군벌 "봉천파(장쭤린)"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밀리기 시작하여, 일본본국 정부는 "장쭤린"에게 퇴각을 권고했고, 만주에서 그를 보호하려 하였다.(1927)  일본 정부의 시각에 반발해, "관동군"의 일부 참모들이 모의하여, "장쭤린"을 암살(1928)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관동군"과 "봉천파"의 협조는 종결되고,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국민당 정부"에 합류하였다.(1929)

"국민당" 정부는 반일 공세를 전개하였고, "세계 경제 대공황 (1929)"과 겹쳐, 만주에서 일본의 이권(利權)이 타격을 받았다.  일본이 이러한 위기를 타파하고자,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만보산 사건(1931.07)"등이 터져 나와,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때, 관동군은 다시 한번 계략을 꾸며, 자작극인 "류타오후 사건(1931.09)"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은 1932.01월까지 "동삼성(東三省)"전역을 점령, 3월에는 "괴뢰(傀儡)정권"으로서 "만주국"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국제연맹"은 1933.02월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여, 일본의 철병(撤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이후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는 소규모 전투가 몇 차례 있었으나, 1933.05.25일 "난징 국민정부"가 일본 제국에 정전을 요청했고, 05.31일 "톈진"의 외항인 "탕구(塘沽, 당고)"에서 중국이 크게 양보한 내용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이 "정전협정"에는 일본군이 "만주국" 안으로 철수하고, "만리장성" 이남에 비무장지대를 둔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이는 곧 "만주국"이 중국에서 분리되는 것을 "난징 국민정부"가 인정한 셈이었다. 그러나 광대한 만주 땅의 구석구석에까지 일본의 지배력이 미칠 수는 없었으므로, 만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항일 무장활동이 계속됐다.

8. 공 내전 (반 공산당 토벌전)

1924년, "군벌과 열강세력들을 몰아내자"는 목표로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1차 국ㆍ공 합작"을 함으로써, "북벌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27.04월부터 "국민당 장제스"가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국ㆍ공 합작"이 깨지고, "국민당"은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전"을 펼쳤다. 1931년 "난창 지역"에 "중국 공산당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공산당의 세력이 넓혀지는 것을 우려한 "국민당"은 무려 5번이나 "공산당 지구"를 포위하고, "토벌전"을 펴 나갔다.

제1회 토벌은 1930년, 2회ㆍ3회는 1931년, 4회는 1932.06월에 이루어졌으나, 모두 국민당의 참패로 끝났다. 그러던 중 1933.10월에 100여만 명의 "국민당" 군대가 "제5회 토벌"을 시작했다. "공산당 토벌"을 4차례 실패를 겪은 "장제스"는 "군사 3할ㆍ정치 7할"이라는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농민을 "홍군"으로부터 떼어놓으면서, 철저한 경제적 봉쇄작전을 폈고, 수천 개의 "토치카"를 만들어 "공산당"의 근거지인 "난창"을 압박했다.

이에 맞서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고문 "리트로프(오토 브라운, 중국명 李德)"의 지도 아래 정규군에 의한 정면대결 전술을 택했으나, 그 결과는 대실패였다. "홍군"의 거점은 차례로 격파됐고, 1934.03월 중국 공산당의 영역인 "광창(廣昌)"이 함락되었다. "광창"이 함락됨으로써, 공산당 세력은 거의 회복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강서 소비에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7월에 "북상항일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1934.10월에 "홍군"의 주력인 "제1 방면군(규모 10만 명)"이 이른바 "대장정"에 나서면서, "강서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서쪽으로 탈주했다. 오랜 기간동안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무려 9,600km라는 장정 끝에 1935.10월에 "섬서성 옌안"에 다다랐을 때, 살아남은 "공산군"은 약 2만 명뿐이었다.

9. 시안 사건

1936.01월 말, "만주"의 근거지를 잃은 "동북군"의 실력자 "장쉐량"은 자신이 경영하는 "동북대(東北大)" 학생들이 "시안"에 찾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들은 뒤로, 항일여론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동북군" 안에서도 "반공보다는 항일을 주장"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1936.11월 "관동군"이 "내몽골"을 독립시키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수원사건"으로 알려진 "몽골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장학량"은 "수원성"을 지키던 중국군을 돕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을 허가해줄 것을 "장제스"에게 요청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불허하고, 오히려 "공산군 토벌"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섬서성" 북부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총공격에 나설 준비를 갖춘 뒤 12.04일 "시안"에 도착했다. "시안"에 도착한 "장제스"는 "동북군의 장쉐량"과 "서북군의 양호성"에게 "공산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따르던가, 아니면 "동북군"과 "서북군"을 각각 "복건성"과 "안휘성"으로 이동 시키던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압박했다. "장학량"과 "양호성"으로서는 "일치항일"여론이 "동북군"과 "서북군" 전체에 확산된 상황에서 "공산당" 토벌명령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뒤의 선택 역시, 자신들이 거세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은 일종의 쿠데타인 "병간"(兵諫, 무력으로 통치권자를 위협하고 간함)을 결의하고, "제6차 공산군 소탕전" 명령이 발동된 12.12일 새벽에 "장쉐량"이 "장제스"를 그의 숙소인 "화청지"에서 체포ㆍ감금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2.13일 "장쉐량"은 "일체의 내전 정지ㆍ민중애국운동 개방ㆍ손문의 유촉 준수ㆍ구국회의 소집"등 8가지 요구사항을 전국에 통전했다. 이와 동시에 "장학량"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있는 "보안(保安)"으로 비행기를 보내, "공산당" 측 대표를 초청했다.

"시안 사건"은 "내전 중지ㆍ일치 항일"의 여론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나,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감금한 사건이었으므로,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소련 신문들조차 이에 대해 "친일분자의 음모"이며, "반일세력의 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일본 측 신문은 "장쉐량의 독립정부와 소련이 협정을 맺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제국은 "장제스"가 제거되면, "난징 정부"를 친일파가 장악할 수 있게 하려고, 획책했다.

"난징 국민정부"에서는 "장제스"의 생명과 안전을 무시하고서라도, "장쉐량" 세력을 토벌해야 한다는 견해와 평화적인 사태해결을 바라는 견해가 대립했다. "중국 공산당"도 뜻밖의 사태에 당황했으며, 당내에서는 공개재판을 거쳐 "장제스"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마저 나왔다. "시안"에서 "장학량"에 체포되어 감금된 "장제스"는 "병간(兵諫)"을 수용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1936.12.16일, "난징 국민정부"의 실권자 가운데 한명인 "하응흠"이 "토벌군 총사령"에 임명되고, "토벌령"이 내려짐으로써, 새로운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마저 높아졌다. "국민당군"은 "장학량"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섬서성" 동쪽의 "동관(潼關)"으로 진입하고, "시안" 근교를 폭격했다. 한편, "장학량"의 "동북군"소속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장제스를 처형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태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장제스는 석방돼야 하고, 중앙정부의 지도 아래 대일항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시안 사건"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나면, 일본의 침략에 유리한 정세가 전개될 것이라고 우려했고, "장제스" 만이 전국의 무력을 통솔할 수 있으니,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2.18일 "중국 공산당"은 "난징 정부"의 실권이 "하응흠"에게 넘어간 것을 고려해, 평화적인 문제해결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주은래ㆍ섭검영ㆍ진방헌" 등 3명이 "시안"으로 갔다. 이로써 "중국 공산당 대표(장쉐량ㆍ양호성)"와 "국민정부"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장쉐량ㆍ양호성"에 대해서는 "장제스"가 정식 교섭상대가 될 수 없는 자신의 부하로밖에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 교섭은 실질적으로는 "중국 공산당"과 "난징 국민정부" 사이의 직접 교섭이었다. 협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

• 국민당과 국민정부를 개조해, "친일파(한젠)"를 구축하고, 항일분자를 영입한다   • 상하이의 애국영수와 일체의 정치범을 석방하며,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   • 공산당 토벌 정책을 정지하고, 홍군과 연합해 항일한다   • 각 당ㆍ각 파ㆍ각 계ㆍ각 군을 망라하는 구국회의를 소집해, 항일구국의 방침을 결정한다   • 중국의 항일에 동정하는 국가와 동맹관계를 수립한다   • 섬서성에 들어와 있는 중앙군 부대를 동관에서 철퇴시키는 명령 등 서북의 군정은 장학량과 양호성에게 맡긴다.

이 협정은 "장제스"의 체면을 위해 공식 서명도, 공개도, 하지 않은 이른바 "인격담보"의 약속이었다. "장제스"는 12.25일 석방되어 "시안"을 떠나면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언명했다. "장쉐량"은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겠다면서 "장제스"와 동행했다. "시안 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진 "제2차 국ㆍ공 합작"은 "항일전선"의 기반이 되었다.

1937.02월 "시안"에서 첫 "국공회담"이 열렸고, "국공회담"은 9월까지 장소를 바꿔가며 5차례에 걸쳐 계속됐다. "중국 국민당"은 "군의 통일ㆍ정권의 통일ㆍ적화(공산주의) 선전의 정지ㆍ계급투쟁의 중지"를 요구했다.

 

반응형

댓글